<김명열칼럼> 삶의 보람

<칼럼리스트 / 탬파거주>
세상 사람들은 누구나 행복하게 살기를 원하고 바라며 살고 있다. 그러나 설사 그 행복이 자기에게 주어졌다고 하더라도 삶의 보람이나 진정한 가치를 느끼기는 쉽지 않다. “당신은 현재 삶의 보람을 느끼고 살고 있습니까?” 이러한 질문을 던진다면 많은 사람들이 그렇지 않다고 대답하는 사람들이 많다. 우리들의 일상생활에 있어 행복이라는 단어 뒤에는 반드시 삶의 보람이라는 단어가 따른다는 것을 느낄 수 있다. 그래서 사람들은 누구나 삶의 보람을 찾고 있다. 그러나 이 삶의 보람이라는 것이 쉽게 우리들의 손에 잡히지도 않고 또한 그 실
체도 단순치가 않아서 한마디로 간단하게 표현해 보이기는 실상 어렵다.
재물이 많고 부자이며 또한 훌륭한 사회적 지위에 있고 남들 보기에 원만한 가정을 지니고 있다고 자타가 공인하는 사람이, 이성으로서는 자신의 삶이 괜찮고 다행스럽다는 것을 인정하면서도 마음속으로는 삶의 보람을 느끼지 못해서 괴로워하는 예가 세상에는 얼마든지 있다.
이렇게 볼 때 삶의 보람에 대해 가장 정직한 표현은 나 자신의 감정인 듯 싶다. 가령 마음속으로부터 삶의 힘차고도 싱싱한 기쁨을 맛볼 수 있다면 이것이야 말로 삶의 보람의 가장 소박한 모습이 아닐까 생각이 든다. 이러한 기쁨은 어떤 때 예상치도 않던 경우에 일어나 그 자신마저도 놀라게 되는 경우가 있는데, 그때 자기 삶의 보람이 무엇이었느냐 하는 실체를 비로소 깨닫기도 한다. 그래서 어떤 사람에게 참된 기쁨을 가져다주는 것이 삶의 보람이라고 말할 수 있겠다.
그렇다면 우리 인간 활동 중 생활 속에서 “참된 기쁨”을 가져다주는 것은 어떤 것일까? 이것은 대체로 어떠한 목적이나 효용, 또는 필요나 이유 없이 “그것 자체를 위한 활동”이라고 말하고 싶다. 우리들이 그저 평범하게 생활을 하다보면 확실히 어떤 이익이나 효과를 목표로 하는 활동보다는 그저 하고 싶어서 하는 일이 우리에게 싱싱한 기쁨을 주고 있는 게 사실이다. 이것을 좀 더 구체적으로 설명을 한다면, 우리가 돈을 버는 것을 목적으로 어떤 일을 하기보다는 돈 때문이 아닌 일 돈이 되지 않는 일을 하기를 더욱 즐겨한다.
나 같은 경우 낚시를 하기위해 꼭두새벽부터 밤늦게까지, 심지어 어느 경우에는 칼치를 잡기 위해 집에서 160여마일이나 멀리 있는 동쪽 해안가 도시 코코아비치에 가서 밤을 꼬박새우며 낚시를 하는 경우가 있는데, 이렇게 낚시를 취미로 하고 밤을 새우는 것은 짜릿한 손맛을 즐기고, 펄펄뛰는 고기가 낚여 올라오는 그 기쁨과 즐거움이 하나의 쾌락이고 삶의 기쁨이며, 잡아온 생선을 이웃이나 교회의 교우들과 나누어 먹는 재미는 정말로 땀 흘려 고생한 보람을 함께 누리는 것 같은 삶의 기쁨을 맛보게 된다. 그러나 어부의 경우, 꼭두새벽부터 밤늦은 시간까지, 또는 밤을 새워가며 고기를 잡는 것은 고역이며 힘들은 노역이다.
또한 예로 취미로 돌을 주우러 수석 채집을 다니는 사람에게는 산천계곡을 헤매는 것이 즐거움이요 기쁨이고, 그러한 과정의 피로와 힘든 것도 하나의 흥겨움이지만 똑같은 돌 줍기를 장사로 하는 상인에게는 그것이 고역이 되고 싫증을 일으키게도 한다.
흔히 젊은 시절에는 삶의 보람을 열심히 추구하고 갈망하며 살던 사람도 나이가 들고 어른이 되어서는 이것을 모두 잊어버리고도 태연하게 사는 사람들이 많다. 남자들은 대체로 웬만큼 괜찮은 직업을 얻고 안정된 가정을 이루며 여유롭게 살면 자기의 생활은 살만한 값어치가 있다고 여기게 되며, 여자들은 능력 있고 좋은 남편을 만나 자식들 잘 낳고 평화로운 가정을 꾸려나가기만 하면 남, 녀 모두가 자기의 존재의 보람을 십이분 느끼는 듯 보인다.
그래서 이러한 최소한의 여유 속에 인간생존의 욕구나 그 역활이 이루어지면 삶의 보람이란 따로 있지 않다고 자인하게 된다. 그러나 이러한 삶의 안이한 자족감(自足感)이 결코 계속되지 않는데 문제가 있다. 사람은 이따금 스스로 의식해서 생각을 꺼내지 않더라도 “나의삶이 이대로 좋은가? 이것이 참으로 산다는 것일까?”라는 반문과 의문이 존재 내면에서 솟구쳐 올라 가슴속에서 회오리가 일고 구멍이 뻥 뚫리며 공허함을 느낄때가 있다. 이렇게 볼 때 삶의 보람이란 결코 어떤 목표의 높고 낮음이나 그 성과의 많고 적음에서 얻어지지 않고, 또 주어진 삶의 행복과 불행한 여건 속에 있지 않고 그 삶 자체의 본질적 추구나 그 감응에 있다고 하겠다. 즉 철학적인차원으로 설명을 드린다면 소유의 세계에서가 아니라 존재의 세계에서 삶의 보람을 찾고 지녀야 한다는 말이 되겠다.
내가 잘 알고 지내는 평범한 40대의 여성, 어느 가정주부의 이야기이다. 이 여인은 자기남편의 와이샤쓰나 카키바지, 속옷, 양말, 애들의 옷가지, 자신의 옷 등 집안의 침대시트, 홋이불, 테이블보 등 여러 가지들을 모두 손빨래로 처리한다. 그러고서는 앞마당의 햇볕이 잘 내려쬐는 곳의 빨래 줄에 주섬주섬 널어서 말린다. 이런 것을 보고 우리는 여기서 가령 소유의 세계, 즉 물질의 세계에서 생각한다면 손빨래를 하기 보다는 전기세탁기를 사용하는 것이 훨씬 더 수고도 덜고 능률도 오를 것이다. 또한 소유의 세계에서 가족에게 향한 애정의 농도도 이것보다 더 짙고 직접적인 것이 얼마든지 있을 것이다.
그러나 존재론적으로 본다면 그녀에게 있어 이러한 손빨래는 수고라든가 능률이라든가의 문제를 넘어 생활의 충족감을 주고 있고 오히려 남편이나 아이들에게 향한 애정에 있어서도 그 밀도를 더하게 하고 승화시키고 있음을 넉넉히 엿볼 수가 있다. 그래서 삶의 보람이란 결코 소유에서이거나 그 소유가 지니는 기술에서가 아니라 존재와 그 존재가 지니는 신비하고 무한한 감각 속에서 좌우되는 것이라고 하겠다.
인간은 밥만 먹고 일만하는 동물이 아니다. 거기에는 필수적으로 사랑이 따른다. 사랑이 내재된 모든 일에는 삶의 보람도 따르게 마련이다. 사랑이 없는 생은 결코 행복한 생이 아니다. 사랑으로서 이루어진 행복 속에 삶의 보람이라는 결실을 얻을 수 있는 것이다. 사랑과 행복은 삶의 보람을 찾는 열쇠다.
사랑하는 기쁨과 사랑을 받는 보람을 가질 때 우리는 세상에 인간으로서 태어난 것을 감사하고 싶고 축복받고 싶어진다. 건강해서 일하는 기쁨은 행복에 없지 못할 요소다. 남자는 일에 살고 여자는 애정에 산다. 일은 우리에게 벗을 주고 건강을 주며 삶의 보람을 선물한다. 온 정열을 쏟을 수 있는 일을 인생에서 발견한 사람은 세상에서 다시없는 행복자이며 삶의 보람을 찾는 개척자이다. 열심히 자기의 맡은바 일에 최선을 다하고 가진 것에 만족하며 감
사한 마음으로 살자. 그러다보면 행복이 찾아오고 삶의 보람을 느낄 것이다.
한국의 남쪽 육지가 끝나고 바다를 만나는 해안가는 얼마 전 내린 비에 힘입어 온갖 봄꽃들이 피어나 장관을 이루고 봄 향기가 물씬 풍겨나고 있다고 한다. 연일 TV에서는 이러한 풍경과 그곳을 찾은 관광객들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3월중순, 시카고를 비롯한 지구의 북쪽지방은 아직 철이른 꽃샘추위가 시샘을 하는데……이글을 읽는 애독자 여러분들의 마음이라도 봄향기 가득담은 보람된 삶의 하루하루가 되시기를 기도드린다. <1016 / 031620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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