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명열칼럼> 고해성사와 회개기도

<칼럼리스트 / 탬파거주>
조금은 오래된 몇 년 전의 이야기다. 평소에 잘 알고 지내던 K씨는 천주교회에 다니는 성실하고 믿음 좋은 신자이다. 그 사람의 행실은 나무랄 데 없이 착하고 가정에도 충실한 50대의 자상한 아빠이자 사랑스런 남편이었다. 그런데 어느 날 그는 나에게 대단히 충격적이며 놀라운 사실을 고백했다. 사실은 자기가 몇년 동안을 자기의 부인 모르게 어느 여인을 사귀고 있으며 깊은 관계에 빠져있는데, 이제는 처자식들에게도 미안하고 심한 죄책감을 느껴서 더 이상 그녀와의관계를 지속할 수가 없다는 이야기였다.
부동산 중개업을 하는 그는 여성고객들과의 사업상의 일로 만나는 일이 많다보니 어느 고객 여인과 교제를 나누고 사랑에 빠지게 되었다고 한다. 그러다보니 은밀히 두 사람은 여행을 함께 다녀오기도 하고 불같은 사랑을 나누며 정신없이 깊은 연인관계를 이어가게 되었다. 그러다 어언 시간이 흐르다보니 이래서는 안 된다는 죄책감이 생겨나 지금은 괴로움 속에 나날을 보내고 있다고 했다.
성경말씀 십계명 제7항의 “간음하지 말라”는 하나님의 말씀을 어기고 죄를 범했으며, 사업상 부동산중개업을 하다 보니 집이나 건물, 기타 부동산을 팔고 사는 과정에서 매매를 성사시키기 위해 거짓말로 손님을 현혹시켜 매물을 팔고 사준 적이 많았었다고 한다. 직업상 하는 거짓말로 평소에 늘 이러한 점들이 마음에 걸려 죄책감속에 살아오다가 오늘은 큰맘 먹고 성당의 주임신부님을 찾아가 모든 사실을 말씀드리고 고해성사를 하고 왔노라고 하며 앞으로 어떻게 해야 할지를 나에게 자문을 구했다.
세상이 혼탁 되고 사람들이 죄를 많이 짓고 살다보니 용서와 회개가 강조되면서 화해의 성사인 고해성사의 부각성이 더욱 부각되고 있는 실정이다. 그런데 많은 사람들은 죄라는 단어자체를 듣기 거북해하며 기피하는 경향마저 있다. 성당이나 교회에 가면 항상 죄(罪), 죄 하기 때문에 교회나 성당에 가기 싫다는 생각을 가진 사람들이 늘어가고 있다. 그래서 어느 신부님이나 목사님은 미사나 예배시간에 설교를 하면서 참회 및 회개예절때 “죄”라는 말을 듣기 싫어하는 사람들을 염두에 두고 “우리의 죄를 반성합시다”라는 말을 하기보다는 “우리의 허물을” 또는 “잘못을” 반성합시다 라고 부드럽게 표현하려고 애쓰고 있다. 그리고 설교 중에 교인들이 죄를 지은 것을 정죄하고 심판하는 말보다는 칭찬이나 축복의 말씀을 더 많이 해주어서 우회적으로 죄에서 벗어나도록 인도해 주고 있다고 한다. 많은 사람들이 교회에 오면 심신의 위로를 받고 축복을 받으러 오는 것이 상례인데, 서울의 어느 교회 목사님은 교인들의 잘못을 끄집어내서 정죄하고 비판하며 죄를 지으면 지옥에 간다는 설교를 매주일 설교 때마다 강조하다보니 어느 듯 알게 모르게 교인들이 그 교회를 떠나 교인들의 숫자가 많이 줄었다고 한다. 이처럼 교회나 성당에 출석하는 신도들은 비판의 대상이 되기보다는 축복의 대상이 되기를 더 갈망하는 추세라고 한다.
많은 사람들이 죄를 짓고도 경찰서에 잡혀가 조사를 받거나 법정에 서게 되면 “나보다 몇 배 더 큰 죄를 지은사람은 멀쩡한데 나만 재수 없게 걸렸어”하는 태도를 보인다. 가만히 생각을 해보면 그 어느 시대보다도 죄악은 넘쳐나는데 죄의식이 결여돼 있는 시대가 바로 오늘을 살고 있는 우리들 시대이다. 현재 우리사회는 죄에 대한 집단불감증에 깊이 빠져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어떤 문명비평가들은 이 죄의식의 실종이 바로 이시대의 커다란 문제점을 보여 주는 것이라고 했다. 죄를 범하고도 자신이 죄인이라는 죄의식이 없다면 참된 뉘우침이 불가능하고 따라서 고해성사를 통한 죄의 용서도 기대할 수 없다.
교회는 전통적으로 인간의 이 약함 때문에 거듭 떨어지는 모든 죄와 악에서 우리자신을 나날이 새롭게 하고 이웃과 하나님과 화해함으로써 하나님과의 은총관계를 회복하고, 회복된 은총관계를 유지시키기 위하여 회개와 고해성사를 권유해왔다. 그래서 특별히 한국의 교회는 부활과 성탄을 준비하는 판공성사를 실시해왔다. 세례 후 지은 모든 죄를 용서받기위해서 고해성사가 필요하다는 것은 인간의 나약함을 생각하면 너무나 당연하다. 고해성사는 우리가 잘 알다시피 성찰(반성), 통회(뉘우침), 정개(결심), 고명(고백), 보속 등 다섯가지의 구성요소로 되어있다. 카톨릭 성당에서는 자기의 죄를 뉘우치고 반성하며 다시는 같은 죄를 번복하지 않는다는 다짐으로 고해성사를 하는데 기독교에서는 이와 같은 것을 회개라는 개념을 통해 죄를 용서받고 하나님께 더 한 발짝 가까이 다가감을 의미한다.
예수그리스도께서는 우리들이 회개할 수 있도록 우리 죄에 대한 형벌로 고통을 당하셨다. 회개란 우리를 하나님께로 더 가까이 다가가게 하는 마음과 정신의 변화이다. 회개에는 죄로부터 돌이켜 하나님께 나아가 용서를 구하는 일이 포함된다.
회개는 하나님에 대한 사랑과 그분의 계명에 순종하려는 진지한 소망에서 비롯된다. 간단히 말해서 회개란 죄를 문제 삼아 스스로 자기를 면책하는 것이다. 자기를 부정하고 죄와의 싸움에서 십자가의 보혈로 더러운 죄를 깨끗이 씻음 받기를 갈망하는 염원에서 신령과 진정으로 죄를 자복하고 용서 받기를 원하며 똑같은 죄악을 반복하지 않기를 십자가 앞에서 서원하는 것이다. 자기부정이란 이제는 더 이상 죄를 짓지 않겠다는 선언이다.
자기부정이 가슴 아픈 고통이나 육신의 연약함과 연관되는 것은 아니다. 사도 바울이 “내가 매일 죽노라” 했을 때 그 뜻은 단순하다. 내가 죄를 지으면서도 하나님의 은혜를 입는 이러한 모순은 이제 우리는 버려야한다. 자기 자신이 자선을 베풀고 선행을 한다는 구실로 작은 죄를 끼고 살고 있다면 결코 그것은 면책이 될 수 없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티끌만한 모든 죄를 다 자복하고 회개하고 용서를 받아야한다.
성경적으로 보더라도 회개는 매우중요하다. 회개는 예수님이 설교한 첫 번째 교리이며, 회개는 하나님의 첫 번째와 마지막교훈의 주제이다. ‘이때부터 예수님께서 비로소 선포하여 이르시되 회개하라 하늘의 왕국이 가까이 왔느니라 하시더라’.
인간은 선과 악, 유능과 무능 등 모든 가능성을 지닌 존재다. 열심히 노력을 하면 성인처럼 될 수 있고, 이성을 잃고 자기 본능적 동물적인습성에 구속이 된다면 그 반대로 치달을 수도 있다. 항상 그런 것은 아니지만 인간세상은 뿌린 대로 거두는 일이 흔한 곳이다. 개인이 그렇고, 가정, 집단, 지역사회, 국가단위도 마찬가지이다.
천주교에서는 자신의 잘못과 죄를 겸손하게 고하며 죄를 용서받는 고해성사가 있다. 앞서도 말했듯이 고해성사는 성찰, 반성, 결심, 고해, 보속의 다섯단계가 있다. 죄를 알아내고 반성하며 다시는 같은 죄를 짓지 않겠다는 결심을 하고 고해하며 보속을 하게 된다. 이 다섯단계는 해도 되고 안 해도 되는 것이 아니라 모두 꼭 해야만 하는 것이다. 그리고 당연히 자신의 잘못을 겸손하게 고해야한다. 핑계를 대거나 다른 사람의 죄를 잔뜩 고하고는 자신은 어쩔 수 없이 그랬다는 것은 고해가 아니라 고자질을 하는 것이다. 고해를 함으로써 우리는 죄를 용서받게 된다. 그러나 벌은 남게 된다. 이것을 갚는 것이 보속이다. 가끔씩 보면 보속을 하지 않는 사람이 있는데 이것은 잘못된 습관이다. 고해의 비밀은 아주 중요한부분이다. 사제나 목회자는 목숨보다 이것의 비밀을 지키고 중요시 한다.
어느 교회의 목사는 성도가 가정사를 의논할 겸 고한 가정의 비밀을 그녀의 남편에게 알림으로써 그 가정이 결국은 파탄 나는 결과를 초래하는 것을 보았다. 책임감 없이 입이 가벼운 목사들을 우리는 종종 보게 되며 그 목사를 불신하게 된다. 교인이나 성도들이 사제나 목사에게 고한 일체의 말들은 고해자가 죽은 다음에라도 그의 비밀은 끝까지 지켜야 된다. 신자들도 고해나 회개의 의미를 지킬 의무가 있다. 모든 회개의 비밀과 고해의 비밀은 생명을 걸고 영원히 지켜야 하는 것으로 고해성사나 신앙상담의 존립에 대단히 중요한 요소인 것이다. 사람들이 죄를 짓고 신앙상담이나 고해성사를 통하여 하나님의 대리인인 목회자나 사제를 통하여 자신의 잘못을 용서받을 수 있다는 사실 자체가 정말로 하나님이 커다란 은총이 아닐 수 없다.
myongyul@gmail.com  <1015 / 030920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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