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명열칼럼> 한 겨울의 추억들

<칼럼리스트 / 탬파거주>
나는 시골에서 태어나고 어린 시절을 보낸 시골출신이라서 그런지 나의어린시절은 자연에 관한 추억으로 가득하다. 계절마다 독특한 추억들로 아롱져있지만 지금처럼 추운겨울에 관한 추억은 내 마음을 애틋하게 만든다. 온통 난방시설로 무장된 도시와는 달리 방을 나서는 즉시 매서운 추위와 대결해야했던 시골 겨울의 어린 시절은 고통에 시달렸던 추억들이 더 많다.
얼음이 얼은 논빼미에서 썰매를 타다 얼음이 깨져 물속으로 빠져들어 양말이나 고무신은 물론 솜바지 가랭이가 모두 젖어 얼어붙어서 그것을 녹이느라고 피워놓은 모닥불위에 말리다가 뜨거운 불에 데어서 장딴지가 싯뻘겋게 화상을 입었던 일, 변변한 장갑 한 켤레 없어서 얼고 부르튼 손을 호호불면서 다녀야했던 그 시절, 학교에 가면 난로불 위에 얹어놓은 도시락을 점심시간도 되기 전에 선생님 몰래 까먹다가 들켜서 추운복도에 두 손을 들고 무릎 꿇고 벌을 받던 일, 학교의 난로를 피우기 위해 집에 와서는 뒷동산에 올라가 볼따구니가 떨어져나가는 것 같은 차가운 바람과 추위에도 오직 숙제로 내준 솔방울과 장작을 갖고 오는 것을 충실히 수행하기위해 이산, 저산을 헤매던 일…….
이렇게 추위와 고통의 일과 속에 나를 유일하게 이러한 추위와 고통에서 구원해 주는 곳은 따듯한 안방의 아랫목 이불 밑이었다. 온돌방 아랫목의 온기는 본래 밥을 지음으로부터 발생한 부산물이다.
즉 밥을 짓기 위해 불을 지펴야하는데 이때 만들어진 열기로 우리의 몸도 데울 수 있게 된 것이다. 시골 농촌사람들 거의 모두는 하루세끼 밥과 국을 끓이기 위해 하루에 세 번씩 아궁이에 불을 지피는데, 아주 추운 겨울철이 되면 굴뚝으로부터 아래로 몰아치는 찬바람으로 인해 온돌방은 오래못가서 식어지게 마련이다.
그럴 때는 밥 짓는 것과는 무관하게 아궁이에 덤으로 군불을 때는데 이때를 이용하여 커다란 가마솥에 물을 가득 넣고 펄펄 끓여서 그걸 퍼 날라다가 곡식을 넣어두는 헛간이나 광, 또는 부엌 등 적당한곳을 택하여 큼지막한 함지박을 준비해놓고 물을 채워서 목욕을 한다.
어머니나 누나는 자주 목욕을 하기에 군불 때는 일이 종종 있는데, 나 같은 경우는 헛간이나 광이 너무 추워서 목욕을 꾀를 피우며 안 할려고 뻗팅기다가 어머니나 아버지에게 붙잡혀서 강제로 광속에 갇혀서 목욕을 할 때가 여러 번 있었다.
시골에서 겨울에 목욕을 한다는 것은 여간한 용기와 인내가 없이는 정말로 힘든 일이다. 아무리 꼭꼭 바람이 안 들어오게 쳐닫은 문이라고 해도 옷을 벗고 함지박에 하반신만 담그고 앉아있으면 어디선가 새어들어 오는 황소바람에 아랫니와 윗니가 맞부딪치면서 와들와들 사시나무 떨듯 떨면서도 때를 밀고 목욕을 해야 되기 때문에 나는 목욕하는 것을 아주 싫어했다.
내가 사는 시골동네의 경우 여름에 미역을 감으며 때를 씻어낸 이후 한 겨울동안 한 번도 목욕을 하지 않는 친구나 사람들이 많았었다.
나의 경우 한 달에 한번정도는 의무적으로 했는데, 이렇게 추운겨울에 목욕을 한다는 것은 꼭 소가 도살장에 들어가는 것처럼 정말로 귀찮고 하기 싫은 일이었다. 지금은 편리한세상에 살고 있어서 이러한 추위 속에 고통을 감수하며 때를 밀고 목욕을 하는 일은 이제 옛날이야기가 되었다.
아궁이에 군불을 땔때에는 어머니와 아궁이 앞에 앉아 나는 부지깽이로 불을 쑤시며 놀기도 한다. 유일한 간식거리인 군고구마의 구수한 향기나 군밤의 향기도 군불 앞을 떠나지 못하게 한다.
특히 어머니의 교훈을 들으며, 학교에 가서 공부 열심히 해라. 아이들과 싸우지 마라. 선생님말씀 잘 들어라 등등은 매번 귀가 아프도록 듣는 판에 박은 똑같은 말씀이며 이따금씩 다른 말씀의 교훈은, 나중에 커서 장성하면 불쌍한 사람을 외면하지마라, 남의 것을 탐내지 말고 네가 가진 것에 만족하라, 항상 겸손해라 등의 그 당시의 어린 나에게는 버겁고 소화하기 어려운 말씀도 군불을 때는 아궁이 앞에서 일러주시곤 하였다.
이처럼 군불은 나에게 추운겨울을 행복하고 낭만적이며 교육적으로도 나의인간성을 참(眞)으로 이끌어주는 계기가 되었다.
지금이야 지구의 온난화현상으로 인해 겨울에도 얼음이 얼지 않고 따듯한 겨울이라는 얘기들을 종종 하는데 50~60대 이전의 나이 드신 분들은 한국의 그때 그 겨울은 몹시도 추었다는 말에 모두들 공감을 하시리라 믿는다.
나의 어린 시절, 그때는 솜바지, 저고리, 조끼가 우리들의 일상 생활복이었다. 나의 초등학교 다니던 때, 학교는 우리 집에서 오리(2Km)정도 떨어진 면소재지에 있었다.
검은 솜바지저고리에 조끼, 검은 고무신에 버선을 신고 등교하는 학생들이 대부분이었다. 그때는 어찌나 날씨가 추었던지 얼은 손과 발을 녹이려고 불을 놓다 바지에 구멍을 내고, 손이 너무 시려워 검은 조끼주머니에 손을 넣고 뛰다가 신작로 자갈길에 넘어져 얼굴에 상처를 내기도 하였다. 날씨가 너무 추워서 하교길에 논둑이나 밭뚝에 불을 놓고 쬐다가 오는 경우가 많았는데, 어느 날 논뚝에 불을 놓은 것이 강하게 불어오는 바람에 번져서 볏집가리를 태우고 밭가에 쌓아 놓은 나무 짐들을 태우고 큰불로 이어져 왼동네 사람들이 모두 나와 불을 끄느라고 난리가 난적도 있었다.
정신이 나간 사람처럼 우리꼬마아이들은 남자여자 할 것 없이 불을끄다보니 여자들의 단발머리가 모두 끄스르고 남자들의 솜바지저고리가 새까맣게 그슬러서 얼굴과 구분할 수 없을 정도로 까마귀사촌이 된 적도 있었다. 어른들에게 직사하게 야단맞고 벌로써 밥을 못 먹고 굶어서 배고파 고생한 기억이 지금도 선하다.
그렇게 어린 시절을 보내고 서울에 유학을 와보니 시골에서는 지천으로 널려 마음대로 먹고 군것질하는 고구마가 서울에서는 비싼 돈을 주고 사먹는 모습들이 무척 낯설고 이상하게 보였다.
이렇게 추운겨울밤에는 어김없이 메밀묵과 찹쌀떡이 등장하는데, 군고구마와 더불어 겨울밤의 주전부리로는 최고로 인기 있는 먹거리이다. 해가 짧은 겨울이 되면 일찌감치 저녁을 먹고 나면 잠자리에 들기 몇시간 전에는 으례 헛헛증이 생겨 배가 출출해지게 마련이다.
이때 골목을 돌며 외치는(찹쌀 떠~억, 메밀묵)소리는 그야말로 구세주나 다름없다. 대문을 열고나갈 필요도 없다. 창문을 열면 찹쌀떡장수는 건넨 돈만큼 찹쌀떡을 방안으로 넣어주니 사실 배달보다 더 편하다.
어느 땐가 찹쌀떡을사며 물었다. 어느 손님, 어떤 사람이 가장 많이 찹쌀떡을 사먹느냐고?……. 그 아저씨(총각)의 대답이 가장큰손님은 화투놀이 하는 사람이고, 두 번째는 신혼의 새색시, 그리고 세번째는 나처럼 군것질 잘하는 젊은 층의 청소년, 소녀들이라고….찹쌀떡과 메밀묵장사의 유래는 명확하지 않으나 일제강점기에 시작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한밤중에 야식장수들이 네모난 모판에 메밀묵, 찹쌀떡, 겐마이(현미)빵 등을 담아 어깨에 메고 다니며 팔았다고 한다. 이제는 그 모두가 사라져간 희미한 옛 추억의 그림자가 되었다.
공부를 마치고 촛불을 끄니 하얀 달빛이 창을 통해서 방을 비춘다. (찹쌀 떠~억, 메밀묵사려)하는 소리가 멀리서 들리더니 점점 가까이 들려온다. 군침을 넘기며 잠을 청하려고 이불을 뒤집어써보지만 귓가와 머릿속에서는 찹쌀떡과 메밀묵이 빙글빙글 떠다니며 사라지질 않는다.
저걸 사먹으면 며칠 동안 전차표살돈을 쓰게 되어 학교도 걸어가게 되기에 아예 큰맘 먹고 머릿속으로 시골에서 먹던 군고구마를 실컷 먹으며 목젓을 삼킨다.
이렇게 추운겨울이면 옛날 고교시절 써놓았던 일기장의 추억이 떠올라 한 겨울의 추억들과 함께 옛날이야기를 지면위로 옮겨보았다. 누구나 이런 추운겨울의 추억이 있으리란 생각도 든다.  myongyul@gmail.com  <1009 / 012720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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