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명열칼럼> 감사하는 생활

<칼럼리스트 / 탬파거주>
사람들은 흔히들 말하기를 11월과 12월을 감사의 달, 또는 감사의 계절이라고 말한다. 일 년 중 열심히 일하고 땀 흘려 농사지은 곡식이나 과일들을 추수하여 가을의 풍요와 더불어 그러한 혜택을 선물한 조물주(하나님)의 섭리와 사랑에 감사를 드리는 계절이이맘때이고, 인류를 구원하신 예수님께서 탄생하신달이 또한 12월이기에 더불어 사람들은 이렇게 감사의 계절(달)이라고 말하는 것 같다.
그러나 조용히 생각해보면 우리가 감사할일들이 어찌 그뿐이겠는가?……. 일년 사계절과 아름다운 천지만물, 자연을 주심을 감사드리고 우리에게 주어진 모든 환경과 조건, 그리고 내가 이렇게 세상에 존재하여 살아가고 있는 것에 대하여도 감사를 드려야겠다.
감사는 유독 11월과 12월이 아니라 일년 열두달, 365일 모두가 감사의 달이고 감사의 날이다. 우리는 이 세상을 빈손으로 왔다가 빈손으로 돌아간다. 공수래(空手來) 공수거(空手去)라고 하듯이 우리는 세상에 태어날 때 우리의 손에는 돈 한푼, 옷 한벌, 고무신 한켤레도 안가지고 태어났다. 그리고 죽을 때는 내가 벌은 돈과 재산, 모든 재물이나 명예, 정들은 가족과 친척, 지인 등 세상의 모든 것들을 다 두고 빈손으로 혼자서 쓸쓸히 저세상으로 떠나간다.
우리는 이 세상에서 많은 사람들의 은혜와 신세 속에 살아간다. 수없이 많은 사람들에게서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은혜와 도움을 받으면서 나의존재가 살아간다. 그러는 과정에서 우리는 많은 빚을 지고 살아간다. 우리는 그 빚진 것을 갚아야한다. 인간은 모두가 채무자들이다. 하나님에게 진빚, 부모님, 스승과 지인, 이웃, 사회 및 나라와 사람들에게 진빚 등등을 모두 갚아야한다. 나는 결코 이 세상을 나만의 힘만으로 살아갈 수 없다. 이 나라와 세계, 그리고 타인의 힘으로 살아가고 있는 것이다.
인간은 자력(自力)의 존재인 동시에 타력(他力)의 존재다. 그래서 우리는 매사에 감사의 철학을 배워야하고 감사할 줄을 알아야한다. 그래서 사도바울은 “범사에 감사하라”고 가르쳤고 불교에서는 사은(四恩)을 강조한다. 나라의 은혜, 부모의 은혜, 진리의 은혜(法恩), 중생의 은혜를 사은이라고 한다. 옛날 시골에서 밥을 먹을 때 어쩌다 밥을 남기거나 밥알을 흘리면 나는 아버지나 어머니에게 혼이 난적이 많았었다. 우리들 형제자매 5남매는 아버지로부터 일미칠근(一米七斤)의 교육과 훈시의 말씀을 매 식사 끼니때마다 들었다. 쌀 알 하나를 만들려면 농부들은 일곱근의 땀을 흘려야한다는 것이다.
이른 봄부터 늦가을까지, 밭을 갈고, 씨를 뿌리고 무더운 여름에 땀으로 목욕을 하며. 거름 주고, 김을 매고, 비가 오나 바람 불고, 가물고 추워도, 농부들은 노심초사 농작물에 대한 걱정과 노력을 다 한끝에 어렵고 힘든 과정을 거쳐 비로써 추수의 기쁨을 얻게 되고 그것을 힘들여 운반하고 타작하고 정미소에 가서 방아를 찧고 난후 힘든 여러 과정을 거치고 난후 우리의입으로 들어갈 수 있는 쌀을 만들어 밥을 지어먹을 수 있는 것이다. 이렇게 어려운 각고 끝에 농사지은 그 쌀 한알, 보리쌀 한톨을 배부르다고 남겨서 버린다거나 헤프게 숟갈질을 해서 밥알을 흘려버린다는 것은 하늘에 죄를 짓는 것처럼, 함부로 쉽게 소홀히 하면 안 된다고 나의부모님께서는 불호령이 내려 지금도 풍요롭게 사는 이 미국 땅에서도 나는 밥을 남기거나 버리지 않으며 흘려버리지도 않는다.
그러면서 항상 이렇게 일용할 양식을 먹게 해 주시는 하나님께 감사드리고, 농부와 그밖에 여러 수고한 일손들에게 언제나 감사를 드리며 밥을 먹는다. 우리 모두는 하루삼시세끼 식사를 하면서 그것을 먹게 해준 농부들과 자연의 섭리를 주신 하나님께 감사를 드려야겠다. 아울러 이러한 모든 사물을 쓰고 사용할 때는 아끼고 절약하는 근검의 미덕을 생활신조로 삼아야한다. 지난날 한국의 박정희대통령은 청와대 화장실의 변기 안에 벽돌장을 넣어 수세하는 변기의물을 절약했다고 한다. 감사를 망각한 종교는 종교가 아니다. 감사를 잃어버린 철학은 철학이 아니며 감사를 저버린 교육역시 교육이 아니다. 감사를 모르는 사람은 인간의 자격이 없으며, 사람이 사람답다는 것은 감사할 줄을 아는 것이다.
지금세상을 가만히 살펴보면 현대인들은 개인과 권리와 자유와 물질과 향락의 사상에 마음이 혼미해지고 가치관이 마비되어 감사의 철학을 망각하고 감사의 심정을 상실해가고 있다. 이것이야말로 인간의 근원적 비극인 것이다. 우리는 세상을 살아가면서 알게 모르게 많은 은혜를 입고 살아간다. 그런데 그 은혜들을 피부로 느끼며 살아가는데도 감사할 줄을 모른다. 은혜를 아는 것을 지은(知恩)이라하고 은혜를 느끼는 것을 감은(感恩), 은혜를 감사하는 것을 사은(謝恩), 은혜에 보답하는 것을 보은(報恩)이라고 한다. 그러나 은혜를 배반하는 것을 배은(背恩)이라하고 은혜를 망각하는 것을 망은(忘恩)이라고 한다.
여기서 배은이라 함은 인간의죄이고 망은은 인간의 부끄러운 수치(羞恥)이다. 감사는 우리들 인생학의 제일이 되는 기본이다. 우리는 우리의 마음 밭에 감사의 나무를 심고 가꾸어야한다. 그러면 불평과 불만, 원망은 점차 사라지고 기쁨과 행복의 꽃과 열매가 맺혀날 것이다. ‘나는 너무나 아름다운인생을 살았다. 내 인생에서 행복하지 않은 날은 하루도 없었다’ 두 눈이 보이지 않고 말도 하지 못했던 헬렌 켈러가 했던 말이다. 이렇게 헬렌 켈러는 불완전한 악조건의 신체적 장애를 겪으면서도 항상 범사에 감사하며 세상을 살았다. 반면에 프랑스의 황제가 되어 권력을 한손에 거머쥐었던 나폴레옹은 감사할 줄 모르고 이렇게 투덜거렸다. ‘내가 기억할 수 있는 범위 내에서 행복한날은 엿새를 넘지 않았다’.
비록 말도 못하고 눈조차 볼 수 없는 힘든 생활이었지만 세상의 모든 것에 감사했던 헬렌 켈러와, 보이는 세상의 모든 것을 욕망의 대상으로 삼았던 나폴레옹……. 헨리 워드 비쳐는 이렇게 말했다. ‘교만은 감사하는 마음을 죽인다. 그러나 겸손한마음은 감사가 자연히 자라게 하는 토양이다, 자긍하는 자는 좀처럼 감사할 줄 모른다. 그는 결코 자기가 받을 만큼 받고 있지 못하다고 생각하고 있기 때문이다.’ 지난해 한국의 119구급대가 발표한 통계에 따르면 약 30만명에 육박하는 많은 사람들을 구해주었거나 병원으로 이송했다고 한다. 하지만 이들 중에 감사를 표현한사람은 3%에 불과했다. 세상 살기가 각박해진 만큼 감사의 표현도, 의미도 퇴색해가고 있는 실정이다. 은혜를 모르는 것은 근본적인 결함이다. 그렇기에 은혜를 모르는 사람은 삶이라는 영역에서 무능한자라고 할 수 있다. 타인의 은혜와 세상의 모든 것(범사)에 감사를 할 줄 아는 마음, 그것은 건실한 인간의 첫 번째 조건이다. 사람이 얼마나 행복한가는 그의 감사함의 깊이에 달려있다. 아무리크나큰 행복을 갖고 있다고 하더라도 그것을 감사할 줄 모르는 사람과 조그만 행복이라도 그것을 만족으로 여기고 배로 감사할 줄 아는 사람……. 작은 행복이나 주어진 조건과 환경에 감사할 줄 아는 사람은 정말로 행복한사람이다.
옛날 공자님은 자신이 싫어하는 인간상이 있는데, 그것은
1 타인의 실패를 기뻐하는 자.
2) 윗사람을 헐뜯고 남을 비방하는 자, 앞에서는 맞장구치고 뒤에서는 욕하는 자.
3) 용기는 있으나 예의가 없는 자.
4) 은혜를 원수로 갚는 자, 즉 감사할 줄 모르는 자 인데 그중에서 가장 싫은 사람을 감사할 줄 모르는 자라고 했다. 감사에는 시간이나 계절의 제약을 받지 않는다. 감사는 주어진 조건이 아니라 만들어지는 해석이다. 부족하여도 감사를 잉태하는 사람은 감사를 낳고 풍족하여도 불평을 잉태한사람은 불행을 초래한다. 감사는 소유의 크기가 아니라 생각의 크기이며 믿음의 크기이다. 감사한 만큼 자신의 삶은 여유가생기고 따듯함이 함께하며 행복이 동반한다.  myongyul@gmail.com <1005 / 122220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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