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명열칼럼> 진정한 사랑

<칼럼리스트 / 탬파거주>
세상에서 보면 젊은 청춘남녀가 처음 만나자마자 첫눈에 반하여 뜨거운 사랑을 나누고 쉽게 결혼을 하는 사람들을 많이 보았다. 그러다가 얼마 못가서 사랑이 식어져 서로가 아픈 가슴을 쓰다듬으며 이별의 쓴잔을 맛보는 슬픈 사랑의 현실을 목격하는 경우가 종종 있다. 쉬 더운 방이 쉽게 식는다는 옛말이 있듯이 세상의 일중에는 빨리 이루어지기 보다는 늦게 성취되어도 좋은 것이 하나있다. 그것은 바로 사랑이다.
단 한 번의 만남에서 뜨겁게 타오르는 담뱃불 같은 감정보다는 삶속에서 보이지 않고 자연스레 진행되어 어느 순간에 그가 없이는 살아갈 수 없음을 느끼게 되는 은은한 백합꽃의 향기 같은 사랑, 그의 생각과 느낌이 말이 없음으로도 나에게 전달되기 시작하는 천천히 오는 그러한 사랑, 적어도 사랑에 있어서만은 기꺼이 완행열차를 타보는 것도 괜찮다는 생각이 든다.
순수하고 진지하게 나누는 사랑은 바보스러워도 좋다. 상대가 어수룩해 보이고 조금은 모자라보여도 좋은 것이 사랑이다. 그가 잘되는 것이 곧 내가 잘되는 것이라는 어리석은 착각이 오히려 눈물 나게 아름다운일이다. 사랑은 천천히 걸어와도 좋다. 거북이 걸음으로도 좋은 것이 사랑이다. 천천히 스며들어 결국에는 전체를 변화시키고 마는 리트머스 시험지 같은 사랑은 변질되는 것, 또한 지극히 더디다. 사랑은 아파도 좋다. 사랑은 눈물을 징검다리로 한걸음 한걸음 내 곁으로 다가온다. 시멘트에는 물이 섞여야 견고해지듯 사랑하기 때문에 흘리는 눈물 한 방울로 우리의 사랑은 더욱 견고해진다.
사랑은 오랜 기다림이다. 그러나 마냥 그저 앉아서 기다리는 수동적인 기다림이 아니라 사랑에 있어서는 기다림조차 간절하게 원하는 적극적인 기다림이어야 한다. 사랑이 대책 없는 한숨과 주체할 수 없는 눈물로 얼룩 진다해도 포기함이 없이 더더욱 사랑에 정진해야한다. 아무리 큰 아픔과 슬픔이 닥쳐온다 해도 더더욱 사랑에 힘을 쏟아야한다. 삶에서 가장 좋은 시간은 그렇게 쉽게 오는 것이 아니니까…………. 사랑하는 사람을 오랫동안 볼 수 없게 되었을 때 바로 그때 아름다운 사랑은 제 모습을 드러낸다. 작은 사랑은 점점 더 위축되어가고 큰사랑은 더욱더 깊게 뿌리를 내리게 되는 것이다. 촛불은 작은 바람에도 꺼져버리지만 장작불은 바람이 모질수록 더 훨훨 타오르는 것처럼…… 진정한 사랑이란 상대가 옆에 있든지 없든지 언제나 그리움을, 그 마음을 그만두지 못하는 것이다. 만날 때도 얼굴을 볼수록 보고 싶고 이별을 하면 더욱 깊은 그리움이 될 것이다.
사랑에 빠져있는 사람에게 그리움이란 달콤한 행복이다. 만날 수 있는 행복과 만나기 위해 참고 기다리고 있는 행복, 그것이 바로 사랑이다. 사랑이라는 말이 오늘날에 이르러서는 그 한계를 가늠하기조차 어려울 정도로 넓은 의미의 폭을 갖게 되어 그 말을 사용하기가 주저된다. 끊임없이 생각하고 그리워하는 정이 사랑의 원뜻인데 이제는 식욕이나 기타 물욕내지 정복욕 등과 구별되지 않는 탐욕에 이끌려 도달하는 심정적 경개(景槪)나 행위마저 사랑이라는 말로 지칭하기도 한다. 그리하여 누가 “우리 서로 사랑합시다” 라고 근엄한 음성으로 말하면 그것이 음탕한 농담으로 들리기도 한다. 뿐만 아니라 그 말이 특정집단이나 유사집단에 속한 사람들에 의해 너무나 헤프게 사용되다보니 그 말속에 있던 의미적절박성과 곡진함이 악화되었을 뿐만 아니라 경우에 따라서는 그 말이 거짓과 위선의 냄새마저 풍기게 되었다. 지극히 아끼고 근심하며 그리워하는 마음을 가리키던 말이 음욕이나 기타 야욕까지도 지칭하게 되었으니 진정한 연인들이나 개결한 벗들, 이웃들, 우애 깊은 혈연들은 오히려 그 말을 사용함에 머뭇거리지 않을 수 없는 상황이 되었다. 요컨대 사랑이라는 말의 의미가 모호해진 것이다.
세상을 살아가는 궁극적인 과제는 사랑이다. 본능에 바탕을 둔 사랑도 사랑이다. 그러나 본능은 일단 이성(理性)의 용광로를 거쳐야한다. 이성을 차리지 못하고 본능의 뜨거운 불길에 희생되고 타죽은 사람들이 한두 명이 아닌 수없이 많다. 식욕도 조절돼야 창조적 에너지로 발동이 걸려 보람 있는 일을 할 수가 있다. 먹는 그 자체만을 사랑하다 못살게 된 사람도 인류의 역사에는 너무나 많이 있다.
성욕도 더욱 그렇다. 이것이야말로 승화돼야 진정한 사랑이지 승화되기 전에는 뜨거운 욕망의 불길에 지나지 않아 위험하기 짝이 없다. 불이 위험하지 않다고 할 사람은 없다. 불에 손을 데기도 하고 온몸에 화상을 입을 수도 있다. 화상 때문에 죽는 사람도 있다. 집도 태우고 숲도 태우는 것이 불이다. 불같은 성욕의 욕망은 더욱 무서운 것이다. 그러나 불을 제대로 조절만하면 밥도 지어먹을 수 있고 추위에 얼은 몸을 따듯하게 녹여주고 모닥불을 피우면 주위에 둘러앉은 젊은이들의 가슴에 화려한 꿈과 낭만을 심어주기도 한다.
욕심을 사랑과 혼돈해서는 안 된다. 욕심은 빼앗으려는 충동이고 사랑은 주고 싶은 욕망이다. 주고 또 주고 마침내 모든 것을 다주고 그래도 모자라서 또 주지 않고는 못 견디는 것이 사랑이다. 나를 몽땅 전부 너에게 주어서 저절로 하나가되는 것이 사랑이다. 너를 빼앗아 나에게 붙여서 억지로 하나가 되게 하는 것은 사랑이 아니고 욕심이다. 욕심과 사랑을 분별할 수 있도록 가르치는 것을 교육이라고 한다.
사랑은 끝없이 행복을 창조하는 거룩한 천사라고 한다면 욕심은 우리 모두를 불행의 낭떠러지로 몰고 가는 흉악한 사탄이라고 할 수 있겠다. 그래서 세상은 천사와 악마의 싸움터가 되고, 인류의 역사는 그 전쟁의 기록영화에 지나지 않는가보다. 한 개인의 인생도 그런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해본다. 사랑과 욕심이 한판승부를 벌이는 것이 우리의 인생이다. 삶이란 그런 까닭에 모순이고 역설이며 그 자체가 수수께끼이다. 악마가 없으면 천사의 모습이 눈에 띄지 않고, 욕심이 아니면 사랑을 올바르게 인식하지 못한다. 그러므로 욕심을 버리라고 가르치는 것이 훌륭한 교육이 아니고, 사랑에 힘쓰라고 가르치는 것이 바람직한 교육이다. 욕심을 부채질하고 그것을 더욱더 키워주는 것을 마치 훌륭한 교육인줄 잘못 아는 사람들이 많은 세상이니, 욕심을 버리라고 가르치는 이가 칭찬을 받아 마땅한 줄도 모르겠지만 비록 ‘선의의 경쟁’이라 할지라도 그 ‘경쟁’자체에 문제가 있다는 사실을 모르는 사람은 없다. 그 경쟁에서 승리한 사람이 느끼는 쾌감은 일시적이지만 패배한 사람이 느끼는 고통은 오래가는 것이다. 그래서 사랑에는 경쟁이 없다.
이제 우리 모두는 사랑으로 돌아가자. 거기에는 이성적 사랑도 있고, 아가페적 사랑도 있고 , 희생과 헌신의 숭고한 사랑도 있다. 사랑이 아닌 것은 길이 아니고 사랑이 아닌 것은 일이 아니다. 당신께서는 꿈길에서라도 보고 싶고 만나고 싶은 그런 ‘그대’를 가져본 적이 있었는지? 사람이 흙에서 왔다 흙으로 돌아간다니까 사랑도 그런 것으로 잘못알고 있는 사람이 많다. 몸은 죽어도 사랑은 죽지 않는다. 사랑만이 영원한 것이다. 그 꿈을 찾아, 사랑의 꿈을 찾아 우리는 나가야 한다. 흠뻑 소나기가 지나간 후에 아름다운 동산위에 아롱진 저 무지갯빛, 사랑의 무지개가 당신의 눈에는 보이지 않으시는지?…………!
myongyul@gmail.com <985/072220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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