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명열칼럼> 내가 먼저 양보하면………

<칼럼리스트 / 탬파거주>
두 마리의 산양(山羊)이 냇가에 걸려있는 외나무다리위에서 만났다. 산양은 원래 뒷걸음질을 칠 수가 없다. 그렇다고 해서 다리의 폭이 좁으니 비켜서서 스쳐 지나갈 수도 없다. 부딫
칠 수 밖에는 다른 방법이 없으나 그렇게 하면 두 마리 모두 다리 밑 냇물에 떨어지고 만다.
도대체 이런 경우에는 어떻게 하면 좋을까? 자연은 산양에게 한쪽은 무릎을 꿇고 엎드리고 다른 한쪽이 그 위를 뛰어넘어 건널 것을 가르쳐주었다. 그렇게 하면 양쪽이 모두 안전하게 다리를 건널 수 있다.
세상을 살아가는데 절대적으로 필요한 양보는 아름다움이고 미덕이다. 이것은 나를 살리고 이웃을 살펴주는 마음이기 때문이다. 양보, 사양할 양(讓) 걸음 보(步), 즉 길이나 자리, 물건 따위를 사양하여 남에게 미루어주거나 자기의 주장을 굽혀 남의 의견을 쫒음을 양보라고 한다.
오늘날 특히 젊은이들 사이에서는 양보를 부끄러움으로, 힘이 없거나 상황에 따라 밀려서 빼앗김 정도로 생각을 하고 있는 것 같다. 섬김과 양보의 즐거움과 그 보람을 경험해 보지 못한 사람들은 양보에 대한 참된 내면의 맛과 느낌을 모르는듯하다. 양보하면 생각나는 것이 한국에서 보면 전철이나 버스 안에서 자리를 양보하는 것이다. 차안에서 보면 나이 드신 어르신이나 임산부, 장애인, 노약자등의 대상에게 자리를 양보해야할 상황이 생길 때가 있다.
어느 때는 하루 종일 일에 시달려 새벽잠을 설치고 일찍 나와 밤늦게까지 일을 하다 퇴근하는 젊은이들에게서 안쓰러움을 느끼고 자리를 양보해주는 나이 지긋한 어른들을 목격할 때도 있다. 차에 타자마자 차안에 걸려있는 손잡이를 잡고 쏟아지는 졸음에 비척대며 힘들어하는 젊은이를 볼 때, 남들은 저 나이에 학교에서 공부를 하고 부모님 사랑 속에 행복하고 즐겁게 지낼 나이인데, 가장이란 굴레를 메고 소년, 소녀가장이라는 막중한 책임을 떠앉고 직업전선에 뛰어들어 가족들의 생계를 짊어지고 사는 불쌍하고 가련한 청소년의 직업가장을 목격하게 된다. 양보의 미덕을 가장 의미 있게 잘 보여준 사실을 우리는 성경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창세기13장 9절에 보면 삼촌과 조카사이인 아브라함과 롯이 비좁은 땅에서 서로 싸우기보다는 자기의 불이익이나 악조건을 감수하고서라도 조카인 롯에게 모든 것을 양보하는 아브라함(삼촌)의 아름다운모습을 볼 수가 있다. “아무쪽이든 네가 원하는 곳을 골라라. 네가 왼쪽으로 가면 나는 오른쪽으로 가겠고 또 네가 오른쪽으로 간다면 내가 왼쪽으로 가마”
교회에서 예배를 마치고 친교시간에 점심식사를 전교인들이 함께 나눌 때 보면 식탁에 차려진 여러 가지 음식과 반찬들 중에는 특히 맛있는 음식이나 반찬이 으레 나오기 마련이다. 이때 다른 사람은 의식하지 않고 자기의 입맛대로 맛있는 것만 골라 수북이 음식대접에 담아가서 먹는 얌체 같은 교인들을 가끔씩 보게 된다. 내가 먹고 싶은 것을 조금만 참고 두개 갖고 갈 것을 하나만 갖고 간다면 그다음 다른 사람들은 맛있는 음식을 함께 공유하며 먹을 수 있는 즐거움이 따르는데도 말이다. 또 어느 화장품 상점에서 보면 물건을 구입할 때에 한 개라도 더 가질려는 욕심으로 화장품공짜 선물 없느냐고 점원한테 구걸하는 어느 중년부인의 얼굴에서 나는 서글프다 못해 불쌍하다는 생각을 가진 적이 있다.
그 사람들은 불경기에 사업을 하느라고 힘이 들텐데 너무 공짜만 바라는 그 중년부인의 모습이 부끄러움이나 양보의 미덕을 전혀 모르고사는 부인 같아서, 차라리 내가 하나사서 선물해 주고 싶은 마음을 꾹꾹 참은 적이 있다. 요즘 가정이나 국가나 사회적인 문제들의 근원을 살펴보면 조금만 더 참고 양보를 했더라면…이라는 결론에 도달하게 된다. 차를 운전하다보면 막무가내로 나의 앞을 가로막고 파고드는 악덕운전자들, 만약에 내가1~2초만 양보하지 않고 그대로 앞으로 향했다면 둘 다 사고가나서 다치거나 자동차가 망가졌을 것이 불을 보듯 뻔한 사실이다. 그런데 가끔씩 보면 그 1~2초도 양보하지 못하는, 마음이 각박한 인정 없는 사람들이 우리들 주변에는 너무나 많이 살고 있다. 양보는 나보다 상대를 생각하고 전체를 생각하는 마음에서 되어지는 것이다.
한국의 어느 공중목욕탕에서 있었던 실화이다. 어떤 사람이 목욕을 하다가 옆사람의 샤워기를 잘못 건드리는 바람에 찬물세례를 주었다. 찬물세례를 받은 그 사람은 화가 치밀어 자기도 찬물을 틀어 그 사람에게 앙갚음을 했다. 상대편의 사람은 계속 “죄송합니다”라고 사과를 했지만 이 사람은 계속 신경질을 내면서 “당신 나가자. 그만둘 수 없다. 옷 입고 보자”고하며 나가서보자고 으름장을 놓았다. 할 수 없이 두 사람은 밖으로 나와 옷을 입었다.
헌데 옷을 입고 보니까 화를 낸 젊은이는 중위계급장을 달은 군인이었고 계속 미안하다고 사과를 한 나이든 중년사람은 대령계급장을 붙이고 있었다. 그때서야 기세등등하며 화를 내었던 그 젊은 중위는 손이 발이 되도록 빌었다고 한다. 대령이 죄송하다고 말을 할 때 받아줄 것이지 젊은 혈기부리다가 체면이 구겨질 대로 구겨져서 쥐구멍에라도 들어갈 지경이 되었으니 웃음이 나올 수밖에 없다.
구약 성경에서 보면 솔로몬 왕이, 어느 두 여인이 찾아와서 자식을 가운데 두고 서로 자기의 자식이라고 다툴 때 그 자식을 반반씩 둘로 나누어 가지라고했다. 이때 그 자식을 낳은 친모는 그렇게 되면 자식의생명이 끊기는 것이라 눈물을 머금고 친자식을 양보했다. 뜨거운 모정은 생명이 죽어 나누어지는 그러한 잔인한 분배의 수학적 법칙을 차마 자신의 자식에게 적용하여 수락을 할 수는 없었던 것이다. 그리하여 진짜어머니는 포기하고 양보를 함으로써 자식을 다시 찾게 되었다.
인생의 많은 문제들은 아무런 양보 없이 자기 것만을 고집할 때 얽히고 복잡한 상황으로 바뀔 때가 너무나 많다. 우리들이 양보와 희생의 정신에 입각하여 산다면 인생의 많은 문제들이 얼마나 쉽게 풀려 나가게 될 것인가…… 그리고 세상은 얼마나 살기 좋고 명랑한사회가 될 것인가? 그런데 우리는 참으로 양보가 없는 사회에 살고 있다. 모두가 분주하고 열심히 자신의 목표만을 위해 옆을 보지 않고 앞으로만 달려가다 보니 주변에서는 양보하는 아름다운모습을 찾아보기가 힘이 든다.
어느 날 트럭운전사가 C.B라디오의 회로를 사용하고 있었는데 계속해서 다른 차량으로부터 그 회로를 양보해달라는 신호를 받고도 양보를 해주지 않았다. 그러자 다른 차량에서는 지금 급한 상황이라는 제보를 보내왔으나 이를 보고도 트럭운전사는 심술을 부렸다. 다른 차량의 운전사는 교통사고를 목격하고 구조요청이 절실해서 그 회로를 사용하고자 했던 것이다. 무겁고 큰 쇠파이프를 싣고 가던 트럭 뒤를 어느 여자운전자가 따라가고 있었는데 그만 트럭이 앞차와 충돌하면서 트럭에 실려 있던 파이프들이 튕겨져 나와 뒤따르던 그녀의 자동차유리를 뚫고 들어와 그녀의 몸을 찔러 부상을 당해 시급한 구조가 필요했던 것이었다.
그러나 트럭운전사는 끝까지 회로를 양보하지 않았다. 공교롭게도 부상을 당해 많은 피를 흘리며 사경을 헤매고 있는 여자는 바로 그 트럭운전사의 부인이었다. 회로를 양보해 주지 않은 트럭운전사의 아내는 시간이 지체되어 병원에 도착했을 때는 이미 피를 너무 많이 흘려 병원문 앞에서 죽고 말았다. 조금만 일찍 만약에 5분만 일찍 병원에 도착했어도 그 여인의 생명은 건질 수 있었다고 한다. 나중에 뒤늦게 이러한 사실을 알게 된 트럭운전사는 가슴을 치며 후회하고 울었으나 세상을 떠난 사랑하는 부인은 다시 자기의 곁으로 돌아올 수 없었다.
몇 분을 할애하여 남에게 양보를 해주었더라면 자기의부인은 죽지 않았을 것을 트럭운전사의 양보심 없는 심술에 애꿎은 자기의부인만 희생양이 되고 말았다.
myongyul@gmail.com <979/060920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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