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회칼럼> 고립과 진실 사이에 서서

최래원목사 / 올랜도 선한목자교회 담임
지금까지 칼럼을 쓰면서 처음으로 제 글이 아닌 두 편의 글을 인용해서 올리기로 마음먹었습니다. 이 글이 목사의 현실을 자신들의 회개하는 마음과 깨어지는 마음으로 진솔하게 고백한 글이어서 제 마음에 잔잔한 감동이 되었습니다. 물론 이 글을 칼럼에 올리는 것에 대해 두 분 목사님들께 양해를 받지 못한 것이 마음에 좀 걸립니다. 그렇지만 Facebook이라는 공개된 SNS매체를 통해 올라온 글이라 퍼가도 무방하지 않을까? 하는 마음입니다.
독자들에게 이 글을 올리는 것은 목사가 이런 사람이니까 목사를 이해해 달라하기 위한 것이 아닙니다. 목사를 한 성도, 한 사람 하나님의 자녀로 봐주고, 대해주기를 원하는 마음에서 입니다. 목사라는 직임을 특화시킨 어떤 특정인이 아니라 그저 쉽게 깨지고 부서지고, 흠 많은 한 인간이 라는 것입니다. 그저 한 성도가 되고, 그 성도 안에서 살아가는 우리의 형제이기를 원하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목사는 직임상 여러분보다 더 깨져야 하고 부서져야 하고 더 많이 회개해야 하며 더 진실해야 한다는 사실을 부정하지는 않습니다.
한 목사님께서 이런 말씀을 하신 게 기억납니다. “얼마나 변하지 않고 깨지지 않으면 목사까지 시켜서 하나님께서 이렇게 강하게 훈련하시겠냐? “ 이제야 그 말씀이 바로 저를 위한 말씀인지를 깨닫게 되었습니다.

[1] 목사, 고립에서 나와야 한다.

목사의 고립이란 책을 읽었습니다. 성도의 교제가 가장 결핍된 사람이 목사일 수 있습니다.
목사는 교인들에게 있는 그대로의 자신을 드러내기가 힘듭니다. 교인들의 기대에 부응하는 목사 상을 만들어내는데 무의식적으로 많은 에너지를 소모하면서 살고 있습니다. 은혜 없는데 은혜로운 표정과 이미지와 설교를 창출해 내려니 수고스럽고, 스트레스가 쌓이기도 합니다. 가식의 짐만큼 목사에게 무거운 십자가는 없을 것입니다. 신앙인격이 덜되고 영적으로 미성숙한 목사일수록 가면의 필요성은 더 커지며 거기에 더 많은 에너지를 소진됩니다.
어쩌면 오늘날 목회의 성공은 얼마나 교인들을 매료시킬만한 세련되고 멋진 가면을 만들어내며 거기에 따르는 힘겨운 수고와 스트레스를 잘 감수하느냐에 달려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렇게 외형적인 성공을 거둔 후에도 목사의 내면세계는 탈진해지고 채워지지 않는 영적 공허로 시달립니다. 어쩌면 성공의 함정과 늪에 빠져들기 시작한 것인지 모릅니다. 이런 상태에서 그는 온갖 영적인 일탈행위에 빠지기 쉬워집니다.
이런 사태를 악화시키는 데는 교인들도 한 몫을 합니다. 교인들은 자신들처럼 인간 냄새를 풀풀 풍기는 볼품없는 목사 상이 아니라 자신들이 우러러 볼 수 있는 신비감에 휩싸인 목사를 원하고 자신의 교회 목사님이 그런 분이 되어 주기를 은근히 부추깁니다.
자신들이 추앙할 수 있는 일종의 스타 또는 교주로서의 목사를 원하는 것입니다. 교주는 자신의 약점과 허물은 신비의 베일로 철저히 감추고 자신의 장점과 탁월함은 극대화하여 드러냅니다. 미성숙한 교인들이 목사 안에 잠재돼 있는 이런 교주 근성을 부추기는 것입니다.
그래서 목사는 자신의 연약함은 꽁꽁 숨기고 자신의 뛰어남은 한껏 과시하려고 합니다.
목사가 계속 가면 속에 숨는 고립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것은 가면을 벗고 자신의 허물진 얼굴이 드러나면 교인들에게 거부당할 것이라는 두려움 때문입니다.
만약 교인들이 얼룩진 목사의 얼굴을 보면서도 그를 있는 그대로 받아주고 사랑한다면 목사는 가면을 벗고 자신의 참된 얼굴을 드러낼 수 있을 것입니다. 그제야 목사도 특화된 특정 인물이 아니라 한 성도로서 성령 안에서 교인들과 진정한 교제를 누릴 수 있게 됩니다.
[중략] …
성화와 영적 성숙은 성령의 교제 속에서만 이루어집니다. 성령의 은혜는 목사와 교인들 간에 일방통행이 아니라 쌍방통행으로 역사합니다. 목사는 항상 교인들에게 은혜를 전달하는 역할만 하는 것이 아니라 교인들로부터 은혜를 받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고립 속에서 성령의 교통하심은 약화되는 반면에 죄와 사탄의 세력은 더욱 강해집니다. 그래서 고립된 목사는 가장 성화가 안된 사람일 수 있고, 동시에 죄의 세력 앞에 쉽게 무너질 수 있습니다. 그는 최대의 위기를 맞게 됩니다. 그러므로 목사가 사는 길은 고립에서 뛰어나와 성령이 역사하는 교제의 장으로 들어가는 것이며, 교인들은 그렇게 돌아온 탕자를 뜨거운 사랑과 배려로 포용하는 것입니다.

[2] 어느 목사님의 고백

설교만 잘하면 되는 줄로 알았습니다.
그러나 삶이 없는 설교는 성도들의 귀만 키우는 줄을 예전엔 미처 몰랐습니다.
기도만 잘하면 되는 줄을 알았습니다.
그러나 회개 없는 기도는 교만한 바리새인들을 만들어 내는 줄을 예전엔 미처 몰랐습니다.
심방만 잘하면 되는 줄을 알았습니다.
그러나 아버지의 마음이 없는 심방은 성도들의 가려운 곳만 긁어주는 줄을 예전에 미처 몰랐습니다.
장소만 좋으면 부흥하는 줄로 알았습니다.
그러나 한 영혼을 찾아가는 사랑이 없는 부흥은 “나는 너를 도무지 모른다” 하시는 주님의 엄중한 심판이 됨을 예전엔 미처 몰랐습니다.

삶이 없는 설교를 유창하게 했습니다.
회개 없는 기도를 날마다 중언부언했습니다.
아버지 마음이 없는 심방을 열심히 했습니다.
한 영혼이 귀한 줄 모르는 부흥을 얼마나 원했는지 모릅니다.

설교보다 더 귀한 건 내가 부서지는 삶이었습니다.
기도보다 더 귀한 건 내가 깨어지는 삶이었습니다.
심방보다 더 귀한 건 내가 아버지의 마음을 품는 것이었습니다.
부흥보다 더 귀한 건 내가 한 영혼을 찾아가는 주님의 발걸음이었습니다. <971/040820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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