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회칼럼> 존재를 만나다

최래원목사 / 올랜도 선한목자교회 담임
여러분은 하나님이란 존재 때문에 설렘을 가져보고, 하나님이란 존재로 인해 두려움을 가져 본적이 있으십니까? 누구나 신에 대한 두려움을 가지고 있는 것이 인간입니다. 그러나 인간은 어느 누구도 신을 제대로 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그래서 더 두렵게 느껴지는지도 모릅니다.
인간은 결코 하나님이란 존재를 알지 못합니다.(처음에는 누구보다 하나님의 존재를 알도록
창조되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그분 자신의 존재를 스스로 우리에게 가르쳐 주셨습니다.“ 나는 스스로 있는 자다”“ 나는 스스로 존재하는 자다”라는 것입니다. 그분의 존재를 결정해 준 또 다른 존재는 존재하지 않습니다. 오직 그분의 존재는 그분 스스로 자신의 존재를 결정하신 분입니다.

우리는 과거 언젠가 한 철학자의 이 말 때문에 젊음의 시간을 고뇌와 갈등과 가슴 설레며
밤잠을자지못하고고민하며한시절을보냈습니다.
바로 에리히 프롬(Erich Fromm)의 “ 소유냐 존재냐” 라는 질문 때문이었습니다. 그것이 닭이냐, 달걀이냐를 놓고 무엇이 먼저인지 판가름 내지 못했듯, 소유나, 존재냐 역시 그 수많은 고민의 결과는 아직 결론지어지지 못한 체 미해결로 남겨진 인생의 난제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소유의 삶을 선택한 사람은 자신의 삶의 목적을 무엇을 가졌느냐, 얼마를 벌었느냐, 어떤 집에 사느냐, 자녀들이 어떻게 성공했느냐, 사회적인 지위와 신분이 얼마큼 상승되었느냐, 어떤 직업을 가졌느냐, 무엇을 먹고, 어떤 옷을 입고, 어떤 명품을 사고, 한 주에 쇼핑에서 얼만의 돈을 썼느냐에 따라 자신의 가치를 결정하게 된 것입니다.
물론 그런 삶을 사는 사람들의 삶을 잘못됐다고 말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그러나 목적은 분명히 눈에 보이는 그 어떤 것에 집중 되어 있는 것만큼은 부인할 수 없는 것 같습니다.
‘가지기 위해 존재하고, 벌기 위해, 먹기 위해, 고로 나는 존재한다’ 라는 자신의 모토를 가지고 부지런히 열심히, 때론 성실하게, 악착같이 살아갑니다.
그러나 존재의 삶을 선택한 사람은 조금 더 벌어도, 더 의미 있게 사는 법을 배우고, 조금 못 가져도, 더 부요하게 사는 법이 무엇인지를 습득하게 됩니다. 더 크고 좋은 집에 살지 못해도 더 행복한 삶의 가치를 만들어 가려고 노력합니다. 자녀들에게 멋진 차, 명품 옷, 멋진 인생을 살도록 많은 재산을 주지 못해도 그들의 세대가 더 정직하고, 의미 있는 삶, 더 보람 있게 사는 삶이 무엇인지를 알려 주려고 매우 성실한 일상의 삶을 또한 살아갑니다.

이 두 가지의 차이가 인생의 가치를 서로 다르게 만들어 갑니다. 하나는 더 세속적이고, 더 세상적인 가치와 목적이 삶의 의미가 되어버리게 만들고, 다른 하나의 가치는 더 종교적이고, 신앙적이며, 선행과 친절한 배려의 삶을 만들었습니다.
사실 하나님께서는 소유와 존재가 분명하신 분입니다. 그분은 스스로 존재하셨으며, 스스로 모든 것을 소유하신 분이십니다. 소유와 존재가 양분되지 계시지 않으신 분입니다. 그러나 분명하신 것은 그것이 무엇이 먼저 선행되느냐의 문제입니다.

소유가 존재보다 먼저인 사람인가? 아니면 존재가 소유보다 먼저인 사람인가?
소유가 존재보다 우선적인 사람은 사람의 가치, 삶의 가치, 의미의 가치가 소유에 따라 달라질 것입니다. 돈과 명예와 권력과 신분상승을 위해 가정이, 자녀들이, 삶의 질이 뒷전으로 밀리고, 소홀하게 되고, 심지어는 모든 가정 구성원들의 관계가 다 깨지고, 행복이 허물어 져도 소유가 주는 심각한 함정에 빠질 때까지 결코 그 존재를 보지 못할 것입니다. 결국 소유는 존재의 가치를 짓밟아 버리게 됩니다. 그러나 존재가 소유보다 우선적인 사람은 좀더 행복한 삶을 위해 많은 연봉을 주는 대가로 가정을 버리고, 자녀들과 종교적인 삶까지 희생하도록 강요하는 직장과 상사의 눈치를 뒤로하고 고액의 연봉대신 가정을 선택하게 됩니다. 승진의 기회가 충분히 주어졌음에도 그 승진 때문에 많은 것들이 희생 되야 하기 때문에 그 승진의 기회를 포기하고 희생 되여 할 것들을 지켜 내려고 할 것입니다.

에릭프롬은 그의 책 한 귀퉁이에 성경의 내용을 인용하고 있습니다.
구약성서 중 이집트의 노예로 살던 유대인은 소유양식을 가지고 살았으나 모세를 통해
광야로 나가면서 존재양식과 소유양식 양립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신앙을 가진 사람들은 애굽의 삶과 광야의 삶 즉 소유와 존재의 두 기로에서 완전히 떠나지 못한 체 어정쩡하게 살고 있다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기 전의 삶의 모든 가치는 당연히 소유에 있습니다. 그 가치 외에 자신을 존재하게 만들어 주는 가치는 없거나, 박탈당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철저히 소유에 길들여지고, 소유주인 돈과 권력에게 지배당하게 되어 있게 됩니다. 이집트를 탈출하게 되면서 소유의 목적이었던 사람들이 존재의 목적을 가르치는 새로운 패러다임 때문에 갈등하고, 힘겨워하고, 이전의 소유가 목적이었던 그때를 그리워하고 동경하고 심지어는 그리로 돌아가고 싶어 합니다. 그만큼 소유는 존재보다 더 강한 끌리는 힘을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그것이 진정한 존재의 가치를 찾아 주었음에도 그 존재의 가치가 손에 붙잡은 소유에 밀려 나고 만 것입니다. 그것은 우리가 존재의 가치로 지어졌다는 것을 알게 하신 것이고, 진정한 존재의 가치를 만나고, 경험하면 그 존재가 어떻게 소유에 집착된 인생을 전혀 다른 가치의 목적을 가진 사람들이 될 수 있다는 사실을 증명하고 싶어 하셨던 하나님을 실망시키고 만 것입니다.

신약성서 중 예수님이 광야에서 마귀가 던진 첫 번째 질문에 대한 답을 내놓습니다. 사람이 빵으로만 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입으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사는 것이다.
좀 더 명확하게 예수님은 빵의 가치(소유)보다 말씀의 가치(존재)를 더 강조합니다. 그러나 둘 중 한 가지 만을 강조한 것이 아닙니다. 무엇이 더 우선적인 것이냐! 을 알려 주시고 계신 것 입니다. 그것이 곧 예수님의 삶이셨고, 예수님을 믿고 따르는 모든 사람들의 가치와 의미와 우선권이 되게 하셨습니다. 우리가 여기서 소유의 진짜 주인이 누군지를 잘 알아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그 동안 빵을 위해 살게 했던 마귀의 목적을 깨트려 버리신 것입니다. 그리고 소유에 묶여 살고 있는 수많은 사람들에게 빵만이 사람이 사는 목적이 될 수 없다라는 것을 선언하신 것입니다. 그보다 더 중요하고 의미 있는 삶이 있다는 것입니다. 바로 존재 그 자체이신 그분의 말씀으로 사는 것, 그것이 바로 존재의 이유이며, 목적이라는 것입니다. 그것이 소유를 의미 있게 사용하게 만들고, 가진 것을 어떻게 나눌 수 있게 하며, 먹는 것의 포만감보다 한 끼를 먹지 못해 아사 직전의 사람들의 아픔을 잊지 않게 하고, 내가 누리는 것이 사치가 아니라 최소한의 것으로 만족하는 법을 배우며 그 나머지를 흘려보내고 나눌 수 있는 삶이 되게 만드는 것입니다
마이스터 헤르트는 이렇게 두 양식을 정의합니다. 소유하되 그 소유가 당신이 가진 자유를 방해하지 않도록 해야 하며, 존재하되 선행을 위한 끊임없는 봉사와 섬김의 활동을 멈추지 않아야 그 자체가 존재가 된다. 라고 했습니다.

이제 결론에 도달하겠습니다. 나는 존재를 알고 깨닫게 될 때 내가 어떻게 살아야 하며, 무엇을 위해 살아야 하는지를 알게 된다고 믿습니다. 진정 하나님을 아는 사람은 그분이 원하는 삶이 무엇인지를 아는 사람이 될 수 있다는 말입니다.
떨기나무에서 하나님을 만나기 전의 모세의 존재는 그저 소유를 위한 존재였고, 먹고 살기 위해, 자신의 삶의 의미를 생계수단을 위해 열심 있는 사람으로 살아가는 것이 인정과 행복과 가치를 주는 것으로 믿고 알았습니다. 그렇게 40년의 삶을 산 것입니다.
그러나 떨기나무에서 스스로 존재하시는 하나님을 만난 후 더 의미 있는 삶이 무엇인지 알게 됩니다. 남은 자신의 인생을 무엇을 위해 살아야 할지를 깨닫고 발견하게 됩니다. 좀 자신은 없었지만 그래도 그것이 전반부의 소유를 위한 삶과는 전혀 다른 길의 삶이 될 것을 믿었습니다.
그리고 소유의 우선순위를 존재로 바꿉니다. 이제 더 의미 있는 삶을 위해 필요를 가질 수 있게 된 것입니다. 모세의 손에 든 지팡이는 소유를 위해 필수적인 도구입니다. 일이고, 노력이고, 성과이고, 목적이었습니다. 그러나 이제 그 손에 든 지팡이는 사람들을 이끌고, 기적을 만들고, 이스라엘 백성을 인도하는 전혀 다른 존재를 위한 지팡이가 된 것입니다.
똑 같은 지팡이가 어떻게 전혀 다른 의미로, 목적으로 사용될 수 있습니까? 바로 그가 스스로 존재하시는 하나님을 만나고 나면서 입니다. 그분을 두렵고 떨림으로 만났지만 그 만남은 모세에게 설렘이 되었고, 인생에는 그런 목적도 있다는 것을 발견하게 된 것입니다. <968/03182015>

To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