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회칼럼> 변해야 할 것과 변해서는 안 되는 것

최래원목사 / 올랜도 선한목자교회 담임
오래 전 우리는 “문화” 라는 시대에 살았습니다. 그 문화의 최고의 수혜와 가치는 바로 그 시대를 살아간 사람들과 그들의 삶이었습니다. 그러나 언제부터인가 전통과 문화가 현대화를 가로 막고, 발전을 저해한다고 생각해 전통과 문화의 자리에 최신형의 건물을 올리고, 경제 발전을 자랑하려는 콘크리트 상징물들을 세워 자신들의 업적을 자랑했었습니다.
이런 시대의 급속한 발달은 결국 사람들에게 쉼과 여유를 잃어버린 고된 삶, 각박한 인간 성과 콘크리트에 갇혀 버린 인간 동물원을 만들어 버렸습니다.
산업의 발달로 성공과 꿈을 가진 젊은이들은 너나 할 것 없이 그들의 태어나고 자란 고향 과 부모를 버리고, 도시로, 도시로 모이는 러쉬가 일어난 것이 그리 멀지 않은 과거입니다.
지금도 생생한 것은 명절이면 구로공단의 직원들이 수백 대의 차량에 나눠 타고 고향으로 향하는 정말 대단한 장면을 TV뉴스에서 방영하던 장면을 기억해 내는데 어렵지 않다. 그런 어느덧 그런 삶에 익숙해지자 문화와 전통을 다시 되찾자는 운동과 더불어 사람들의 마음 한 켠에는 옛 것에 대한 그리움이 하나 둘씩 개화되기 시작했습니다. 이젠 산업시대의 바벨탑 같았던 고가도로가 미관을 해친다고, 구시대를 대표하던 건물들이 공기의 순환과 도시 미관을 해친다고 부시고 무너트려지고 있습니다. 인류의 역사란 세우고 무너트리고 또 다시 세우고 무너트리기는 반복하는 것인가 봅니다.

이제 나라의 경쟁력이 산업의 성공보다 문화적 질의 가치로 따지는 시대가 되어 버렸습니다. 문화가 없는 나라, 전통이 유지되고 보존되지 않는 나라는 나라의 상징과 존엄성이 없는 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미국은200년 조금 넘은 역사를 가졌지만 지금 세계의 문화를 지배 하는 문화강국들과 어깨를 나란히 하는 나라가 되었습니다. 미국은 처음부터 문화를 삶에 접목시켜 후세들에게 교육시켰으며, 작은 것 하나도 하찮게 여지지 않고 지키고 보존하며 소중하게 다뤄왔습니다. 이것이 서구사람의 정신이고, 문화가 미래의 국가 경쟁력이 된다는 것을 어쩌면 오래 전부터 그들은 인지하고 있었는지도 모릅니다. 오늘도 영국의 대영 박물관이나, 프랑스의 루브르 박물관 같은 곳은 세계적인 문화유산의 가치를 잘 보여주는 대표적인 사례입니다. 한 해 그곳을 찾는 관광객 수는 그 숫자를 헤아릴 수 없고, 벌어 들리는 수입만해도 나라의 어마어마한 경제적 가치를 창출해 내고 있는 산업의 동력이 돼버린 것입니다. 이런 것을 보면 이들은 이미 오랜 전부터 미래가 창출하는 경제의 가치가 무엇이 될지를 미리 짐작한 사람들처럼 보입니다. 미래를 읽고 보는 안목을 가졌다고 할 수 있습니다.
사실 고국 한국은 현재 살아가는 삶 외에 미래가 없는 나라가 돼버리고 있습니다. 미래를 꿈꾸는 사람들이 없습니다. 미래를 준비하는 인재들이 없습니다. 미래를 위해 나라를 틀을 세우는 위정자들이 없습니다. 오직 한국의 미래는 “권력과 돈”뿐입니다.
만약 우리가 산업사회가 시작할 즈음부터 지각과 생각을 가진 사람들이 일어나 조금 더디, 천천히, 한 걸음씩 가더라도 문화와 전통과 가치를 세우고 왔다면 선진국 대열에는 조금 늦게 도달 했을 찌라도 문화강국, 전통과 현대가 어우러지고, 가치관이 존중되는 단단하고, 조화롭게 성장하는 나라가 되었을 것입니다. 간발의 차이로, 한 뼘의 생각이 못 미치는 판단으로 인해 결국 지금 한국사회의 퇴락은 시작 되었다고 볼 수 있습니다. 보다 먼 미래를 내다보는 사람들이 더 많이 일어났더라면, 자신의 권력보다 국가의 경쟁력 있는 미래는 보는 시각을 존중히 여겨주었더라면 당리당략을 떠나 더 큰 그림을 그렸더라면 하는 아쉬움이 찐하게 여운으로 남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빨리 열매를 익히기 위해 조명을 달고, 열을 가하면서 열매는 빨리 익었지만 또 다른 열매를 익게 할 뿌리를 보존하고 튼튼하게 하며, 기본기에 충실하도록 하는 기반은 부실하게 관리돼 온 것입니다. 한국사회의 몰락은 그렇게 오래 전부터 서서히 시작된 하나의 결과물인 것입니다. 문제는 지금도 여전히 본질적인 가치들을 무시한 체 빨리, 고속으로, 닥치는 대로, 달려서 원하는 목적지만 가면 된다는 식의 사고와 발상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그것이 지금의 사회를 발목을 잡고 있는 심각한 병패가 돼버리고 있다는 것입니다. 분명 경제는 발전하고, 산업사회의 꽃은 활짝 피었지만 그 결과물은 너무나 아프고 참담한 현실을 만들어 내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뿌리가 썩어가고 있다는 것을 관과 하지 못한 체 성공, 부자, 잘 사는 나라, 세계의 경제 대국의 꿈만을 쫓게 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한국은 요행을 꿈꾸는 나라가 돼버렸고 행복한 나라가 되지 못하는 것입니다.

이런 모습들을 그리 멀리서 찾을 필요가 없습니다. 우리가 다니는 이민 교회를 보면 그와 별반 다르지 않기 때문입니다. 성장과 성공을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습니다. 말씀은 가르치지만 그 말씀대로 살지 않은지는 이미 오래된 이야기입니다. 지도자들은 허풍과 허세만 가득합니다. 실현할 수도 없는 답답한 이야기로 사람들은 점점 종교적 사막화로 변해가고 있습니다. 우리는 더 이상 부흥을 기대하거나, 변화와 회복을 기대하지도 않습니다. 괜히 그런 것들을 거추장스럽게 생각합니다. 괜히 그런 것들 때문에 우리의 안락하고. 평안하고, 멋진 삶이 뒤바뀌기를 원치 않습니다.
일전에 칼럼에 쓴 것처럼 우리는 마치 천국이 결코 없는 사람들처럼 살고 싶어 합니다. 교회의 본질은 뒷전에 두고, 급속한 성장, 자기의 자랑을 위한 기념비들, 수많은 명목들을 만들어 건물을 꾸미고, 건물과 시설물에는 아까워하지 않고 돈을 쓰면서 사람을 위해서 쓴 돈은 한 푼도 아까워하는 마음에는 변화가 없습니다.

성도들은 결코 봉이 아니며, 바보들이 아니며, 우롱하고 함부로 대할 대상이 아님에도 종교란 이름으로, 말씀이란 권력으로 때론 인격도, 가치도 무시당하는 일들이 여전히 매주일 강단에서 이루어지는 살인들이 끊어지지 않습니다. 교회란 가치와 본질은 바로 사람에게 있습니다. 사람을 수단으로 여기는 한 교회는 무너지고 말 것입니다. 왜입니까? 그들은 다 교회를 떠나고 말 것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건물에 목숨 걸 지 않으셨습니다. 오히려 성전의 건물을 보고 돌 위에 돌 하나도 남김없이 무너지게 될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인간이 세운 그 어떤 바벨탑도, 그것이 설령 교회로 쓰시는 건물이라 해도 다 무너지고 말 것입니다. 무너질 것들은 본질이 아닙니다. 그러나 영원한 것은 무너지지도, 흔들리지도 않습니다. 그것이 바로 교회란 본질의 사람입니다. 바로 그 사람들 안에 하나님께서는 그분께서 거하실 성전을 짓고 싶어 하시기 때문입니다.

아무리 시대가 변화고 타락하며, 예전의 교회의 모습을 원하지 않는 시대가 되었다고 해서 교회의 본질적 가치인 복음의 진리와 사람에 대한 가치를 변개시킬 수는 없습니다. 그것이 물질을 대신할 수도, 권력과 힘과 자기 과시를 대신할 수는 결코 없습니다. 그것들을 위한 대용물이 될 수도 없습니다. 또한 어떤 인간이 만든 전통과 제도라 해도 그것이 진리 위에 올려 져있거나 예수보다 더 가치 있게 여겨지거나, 사람 위에 세워지고 군림하는 독재자가 된다면 그것은 사형대위에 올려야 합니다.
그래서 교회는 예수님의 전적인 통치와 다스림 안에서 복음의 급진전적인 도전과 성도 각 개인의 존엄성과 가치가 고스란히 하나님의 나라를 위한 자원이 되게 해야 합니다. 이것만 이 이 땅에 남겨진 교회라는 잉여자산입니다. 보존해야 할 문화이며, 지켜내야 할 전통의 전부인 것입니다. 그 외에 것들은 소모품이자, 외형만 거창한 종교적 이데올로기며, 종교적 허상과 허실이기 때문입니다.
변해도 무방한 것들과 결코 변해서는 안 되는 것들을 결코 혼돈하지 마십시다.

<960/012120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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