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명열칼럼> 얻기 위해서는 버릴 줄도 알자

<칼럼리스트 / 탬파거주>
옛날 고사에 나오는 말에 염일방일(拈一放一)이란 말이 있다. 이 말의 뜻은 하나를 얻으려면 하나를 놓아야한다는 말이다. 하나를 쥐고 또 하나를 쥐려한다면 그 두개를 모두 잃게 된다는 말이다.
약 1천 년 전에 중국의 송나라시절, 사마광이라는 사람의 어릴 적 이야기이다. 한 아이가 커다란 장독대에 빠져 허우적거리고 있었는데 어른들이 사다리를 가져와라, 줄을 가져와라 는등 요란법석을 떠는 동안 물독에 빠진 아이는 익사직전에 이르고 있었다.
이때 작은 꼬마아이하나가(사마광) 돌멩이를 주워들고 그 커다란 장독을 깨뜨려버렸다. 치밀한 어른들의 잔머리로 단지값, 물값, 책임소재를 따지며 시간 낭비하다가 정작 사람의 생명을 잃게 하는 경우가 허다하다. 더 귀한 것을 얻으려면 덜 귀한 것을 버려야한다.
사람에게는 누구나 자기 소유에 대한 집착력이 있다. 그래서 자기가 가진 것 중에 단 하나라도 버린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더군다나 자신이 아끼던 것을 버리기는 쉬운 일이 아니다. 사람이 살다보면 여러 가지 문제를 만나게 된다. 모든 일들이 자신이 원하는 대로 이루어지는 경우는 극히 드물다. 금전적으로나 법적으로, 그리고 인륜적인 문제를 포함한 다양한 문제 속에서 중요한 것은 그 문제를 어떻게 받아들이고 어떻게 대처하느냐이다. 이 부분에서 각자의 삶이 달라지고 결정되는 것이다.
즉 무엇을 성취하고 추진하는 과정에서 모든 것을 다 챙기고 얻고 가지려면 자기가 원하는 것을 다 얻을 수가 없고 실패하는 경우가 많다. 아쉽지만 버려야 할 것이 있고 챙길 것이 있다는 얘기다. 버린다는 것은 욕심을 버리라는 뜻과 일맥상통한다. 눈에 보이는 것에 정신이 팔리다 보면 중요한 것을 놓쳐 일을 그르치는 경우가 적지 않다. 급하고 중요한일은 서두르는 것보다 느긋하게 처리하는 게 바람직하다.
아무리 급하다 해도 바늘허리에 실을 매어 꿰맬 수는 없는 법이다. 가령 벼이삭이 늦게 핀다고 그 이삭을 강제로 뽑아낸다면 그 해의 농사는 망치고 만다.
골프공을 멀리 보내려면 세게 내치기보다는 부드럽고 자연스럽게 스윙해야 하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자신을 낮출 때는 높아지지만, 스스로 공치사하면 응당 받아야할 존경심도 사라진다. 실패를 격려해주고 칭찬해줘야만 남에게서 인심을 얻고 인격적인 대우를 받으며, 잘하는 것 열개가 있어도 잘못한 거 하나를 들춰내 뒷다리를 잡고 늘어지면 모든 조직이나 개인의 명예와 탄력은 무너지고 경쟁력도 떨어진다.
왕건처럼 송도를 버릴 줄 알아야 고려를 세울 수 있다. 궁예처럼 초심을 잃고 관심법에 집착을 부림으로써 애써 일궈놓은 발해국을 송두리째 빼앗기는 경우도 수없이 많다. 버림의 미학을 실천하려면 자신과 신념이 있어야 한다. 작은 실패와 지금의 양보를 감내해야만 미래의 큰 선물과 결실을 얻을 수가 있다.
기원전 10세기경, 26년간의 대기근을 겪은 스페인의 왕 밀레시우스는 아들들에게 새로운 땅을 찾으라는 유언을 남기고 세상을 떠났다. 그의 아들들은 축복 받은 섬 에이레를 발견하고 아버지의 유언에 따라 손이 먼저 닿는 사람이 그 땅을 지배하기로 한 약속을 내걸고 원정을 떠났다. 아들중 하나인 헤레몬은 치열한 경쟁에 뒤져 자칫 승리를 빼앗길 위기에 처했다. 그러자 헤레몬은 자신의 오른손 손목을 잘라 이것을 섬을 향해 힘껏 던짐으로써 가장먼저 육지에 손이 닿은 승리자가 되었다. 이로써 헤레몬은 왕이 되었고 이것이 아일랜드역사의 시작이며 그 후손들이 바로 1500년간 아일랜드를 지배한 오닐 가문이다. 오닐가는 그들 선조의 전설처럼 가장 소중한 것을 버리면 가장 큰 것을 얻는다는 것을 가슴에 새기고 절박한 순간에 희생할 줄 아는 용단, 핵심가치의 공유를 통해 성공을 이어올 수 있었다.
금을 얻으려면 마음속의 은을 버리고 다이아몬드를 얻으려면 그 금도 버려야한다. 그러나 우리는 그 미지의 보장되지 않은 공허가 두려워서 하찮은 현실과 오늘의 모든 것에 집착하기도 한다. 우리들 주위에 보면 수명이 다한 물건(잡동사니)들을 버리지 못하고 전전긍긍하는 사람들이 많다. 사람들의 소유물 중 잡동사니로 추정되는 비율은 대략75%나 된다고 한다. 이렇게 사람들이 쓸데없는 물건을 버리지 못하는 이유는 인간내면에 침전된 심리적 쓰레기가 물건에 투영돼 있기 때문이라고 한다.
살아가면서 내 주위의 필요 없는 잡동사니부터 버려서 그 자리에 활력과 행복을 채워 넣자.
소금은 물에 녹으면 소금은 온데간데없고 그냥 물만 남는다. 그런데 부르는 이름은 물 소금이 아니라 소금물이라고 한다. 녹아 없어진 소금을 주체시하는 것이다.
이치대로라면 소금은 자신을 버렸지만 물은 자신의 모습을 버리지 않았다. 버린 것 같지만 세월이 지나면 물은 온데간데없고 하얀 소금만 남는다. 버렸다고 없어지는 것이 아니라 각인된 조건반사처럼 융해되었다가 다시 돌아오는 작용을 하는 것이다.
밭에 씨를 버려야 싹을 얻고, 꽃을 버려야 열매를 얻는다. 도(道)를 이야기하다보면 근심도 잊어버리고 늙어 가는 것조차 모를 지경이라고 했듯이 우리들 인생이란 다 버리는 것이다. 얻기 위해서는 반드시 버릴 줄 알아야 한다. 나를 버리지 않고는 공의로운 진정한 나를 얻을 수 없다는 것을 깨달을 때 쫓기듯이 허둥지둥 살지 않고 무엇에 구속되어 매여 살지는 않을 것이다.  myongyul@gmail.com <959/011420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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