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꾸러기의 짧은 글 긴 생각> 사실과 인식의 시차

이경규목사 / 서울 새로운 성결교회 담임
성경은 ‘믿음이란 하나님이 구원을 주시려는 대상에게 조건을 찾지 않고 결과를 주는 방법이다’라고 말씀하고 있다.
그러기에 구원은 선물이요 은혜이지 삯이 아니며 자랑이 아니라는 말이다.
오늘 창세기 15장에 보면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자 그것을 그의 의로 여겼다고 한다.
이 믿음은 아브라함에게서 나온 것인가?
아니다.
그러면 아브라함의 믿음은 어디서 나왔는가?
이에 대한 대답은 창세기 11장부터 시작하여 15장에 이르러서야 나온다.
11장에서 아브라함이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았을 때 ‘저는 하나님만 믿고 가겠습니다’하면서 믿음이 시작된 것이 아니다.
그래서 성경이 굳이 아브라함의 생애를 나열해 놓고 나서 15장에 와서야 비로서 믿음과 관련되어 벌어진 일을 진술하고 있는 것이다.
하나님의 설득이 비로서 아브라함으로 하여금 이 자리에 이르게 한 것이다.
구원은 하나님이 여러분을 중생시키고 여러분을 설득시켜서 하나님의 자녀가 되게 하는 행위 외에 아무 것도 아니다.

그러면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이 무엇인가?
하나님께서 내게 이루신 것이 무엇인지 이해되는 날, ‘주를 믿습니다’라는 자발적인 항복의 고백을 하는 것이다.
이것을 하나님은 우리에게 있었던 구원의 조건인양 칭찬해 주시는 것이다.
우리가 ‘예수를 믿었다’, ‘나는 결단했다’, ‘나는 몹시 울었다’ 하는 등의 여러 가지 경험들은 구원의 원인이 아니라 결과이다.
다시 말해 울며 회개했다면 거듭났기 때문에 울고 회개한 것인가, 거듭나게 해달라고 그렇게 한 것인가?

창세기 15장에서 아브라함이 하나님 앞에 의롭다고 인정받았다는 문제를 놓고, 바로 그 때 그 자리에서 아브라함이 구원을 얻는 것으로 보는 시각에 대해 반대한다.
의로 인정함을 받았다는 것은 구원을 얻었다기보다는 드디어 그가 하나님이 누군가를 알만큼 인식하게 되었다고 보는 것이 더 적절하다.
구원은 이미 그를 부르신 갈대아 우르에서 이미 이루어진 것이다.
구원을 얻는 방법에는 두 가지가 있다.
하나는 믿는 가정에서 태어나 별다른 큰 경험이 없이 예수를 믿는 것이고, 또 하나는 중간에 믿게 되어 갑작스런 변화와 경험 속에서 예수를 믿는 것이다.
후자 전자보다 훨씬 더 구원이 명확하고 감격적이며 신이 난다.
그러나 그러한 사람만이 구원을 얻은 것은 아니다.
전자도 구원을 얻은 것이다.
구원과 인식이 동일하게 나타나는 사람은 참 편하다.
내가 어느 날 믿게 되었고 어느 날 예수 믿는 사람의 생애로 완전히 탈바꿈했는가를 자신이 알 수 있다.
대표적으로 사도 바울이 그랬다.
그러나 그렇지 않은 사람도 있다.
예수를 만났는데도 불구하고 물에 물 탄 듯 별 차이가 없다.
그래서 때로는 ‘나는 아닌가봐’하고 떠났다가 다시 돌아오는 방법을 택하기도 한다.
타락을 해봐서 하나님이 간섭을 하시는지, 안 하시는지를 확인하는 것이다.
타락한 것을 하나님이 두들겨 패시면 너무나 감사해하면서 돌아온다.
이것은 우리나라 사람들에게만 있는 구원 확신 방법이다.
아주 몹쓸 방법이다.

우리는 15장의 사건에서 ‘아브라함이 여기까지 와서야 하나님께 이만큼 설득 당하고, 하나님이 일으키셔서 그의 영혼이 이 정도의 자리까지 왔구나’하는 것을 알아야 한다.
그리고 이것은 아브라함을 인도하신 하나님께서 이 사건을 우리에게 제시하시고 동일한 방법으로 우리를 부르신다는 것에 대한 증거이다.
여러분이 어떻게 구원을 얻었습니까?
여러분이 믿어서 얻은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여러분들을 이 자리까지 끌어다 놓으셨다.
그래서 어느 날 ‘주여 제가 주를 믿습니다’라고 외치게 된 것이다.
그리고 우리는 점점 그 하나님께 우리의 모든 것을 맡겨 튼튼한 믿음을 가진 자로 성장해가는 것이다. <957/12242014>

To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