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꾸러기의 짧은 글 긴 생각> 죄의 소원을 가졌던 사람-가인

이경규목사 / 서울 새로운 성결교회 담임
하나님은 왜 아벨의 제사는 받으시고 가인의 제사는 받지 않으셨는가?
제물의 종류나 상태 때문에 그러신 것이 아니다.
원래 제사는 양으로 드려야 하는데 가인이 곡식으로 드렸기 때문에 받지 않으셨다거나, 아벨은 정성스레 양의 첫새끼를 드렸는데 가인은 불성실하게 첫 곡식이 아닌 그냥 소산으로 드렸기 때문에 받지 않으셨다는 해석은 후대의 율법으로 이전의 일들을 살펴보는 무리한 해석이다.

성경이 직접 말하는 바 하나님이 가인의 제사를 받으실 수 없었던 것은 가인의 마음 속에 있는 ‘죄의 소원’ 때문이었다.(창4:7)
‘죄의 소원’이란 ‘상한 심령’을 말하는데 이것은 일종의 ‘반항하는 마음’일 것이다.
그의 마음 속에 그런 상한 마음, 즉 분노하는 마음이 있었다는 것은 제사가 받아들여지지 않은 후에 그가 보여준 행동을 통해 증명되고 있다.
‘가인이 심히 분하여 안색이 변하니'(창4:5)

그렇게 분노하고 있는 가인에게 주신 하나님의 말씀은 우리에게도 너무나 의미가 있는 말씀이다.
‘네가 분하여 함은 어찜이며 안색이 변함은 어찜이뇨 네가 선을 행하면 어찌 낯을 들지 못하겠느냐 선을 행치 아니하면 죄가 문에 엎드리느니라 죄의 소원은 네게 있으나 너는 죄를 다스릴지니라'(창4:6-7)

하나님이 말씀하신 것은 상처가 있는 마음 특히 권위에 반항하는 분노의 마음이 있는 한 그 예배를 받으실 수 없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먼저 그 사아한 마음의 소원, 그 상처에서 나오는 욕구를 따라가지 말고 다스려야 한다는 사실을 말씀하신 것이다.
하나님은 가인의 문제뿐아니라 그 치유 방법까지 분명하게 말씀하여 주셨지만 가인은 그 말씀을 따르지 않고 상처가 시키는대로 ‘죄의 소원’을 따라 행동함으로써 결국 살인에 이르게 된 것이다.

여기서 의미심장하게 깊이 생각해보아야 할 것이 있다.
거절감의 마지막은 ‘자살’인 반면에, 분노하는 마음이 속한 반항 쪽의 마지막은 ‘살인’이라는 것이다.
분노하는 마음을 끝까지 다스리지 못하면 가인처럼 살인자가 되는 것이다.
상처는 이와같이 끈질기고 무서운 것이다.
그러나 기억할 것은 이 분노하는 마음이 마지막까지 가야 살인을 하는 건 아니라는 것이다.
분노하는 마음은 말로, 행동으로, 무의식적으로 사람을 힘들게 한다.
완전 살인으로 가지는 않지만 그쪽 방향으로 기울어져 있다는 사실이 섬뜩하다.

가인이 아우를 죽였을 때 하나님이 하신 말씀 가운데 ‘네 아우의 핏소리가 땅에서부터 내게 호소하느니라'(창4:10)는 말씀 또한 의미가 심장하다.
분노하는 마음을 가진 사람에 의해 희생당한 사람(대부분 가족과 자녀들)은 반드시 소리를 지른다는 것이다.
분노는 자녀에게 전해 내려지고, 억압된 분노는 다른 방법으로 결국 터져나오게 된다.
이 또한 참으로 무서운 일이다.

분노는 참으로 무서운 존재다.
그래서 분을 품고 잠자리에 들어가서는 안되는 것이다. <950/110520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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