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노를 누르고 도망간 사람-요나

이경규목사 / 서울 새로운 성결교회 담임
요나라는 사람을 이해하는 데, 그가 분노하는 마음을 가진 사람이었다는 사실을 기억하는 것이 중요하다.
그는 왜 하나님의 명령을 거부하고 다시스로 가려고 했을까?
그것은 분노하는 마음 때문이다.
하나님이 니느웨를 사랑하신다는 사실이 참을 수 없었다.
하나님한테 따질 수도 없고 또 하나님이 사랑하신다는 데 불평할 수도 없기에 도망하는 방법을 택한 것이다.
아마 그는 ‘저 큰 성읍 니느웨'(욘1:2)라는 말에 심사가 뒤틀렸을 것이다.
‘왜 니느웨가 그렇게 중요하고 으뜸가는 성읍인가? 그렇게 중요하게 여기시는 하나님이 직접 해 보시지. 나는 못해요’
이런 마음 아니었을까.

요나는 배를 타자마자 배 밑으로 내려갔다.
그리고 깊이 잠이 들었다.
아마도 이것은 분노 이후에 몰려오는 두려움 때문이 아니었겠는가.
홧김에 일을 저지르기는 했지만 두려움은 밀려오고, 하늘이 보이는 배 위보다는 배 밑이 하나님의 낯을 피할 수 있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그래서 아예 배 밑으로 들어가서 의식이 없는 수면상태로 빠져든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대부분의 경우 잠은 두려움이 많은 사람들의 방어기제다.
반면에 거절감을 가진 사람들은 잠을 이루지 못한다.

여하튼 배 밑창에서 자는 요나의 잠은 예사로운 잠이 아니다.
그가 폭풍을 만났을 때, ‘나를 들어 바다에 던지라. 이 폭풍은 나 때문이다’라고 말한 것도 고귀한 희생정신이나 회개하는 마음에서 나온 것이 아니라 분노의 마음을 가진 사람이 자기를 파괴하는 쪽으로 상황으로 이끌고 가는 일종의 자학적인 결정이라고 볼 수 있다.
좀 심한 해석으로 보이기도 하지만 뒤에 이어지는 상황을 보면 이 말이 그리 빗나가는 해석이 아닌 것을 알 수 있다.

물고기 뱃속에서 거의 죽음의 문턱까지 갔음에도 불구하고 요나의 분노하는 마음은 치유되지 못했다.
분노하는 사람은 언제나 은혜를 쏟게 마련이다.
비록 죽음에서 구원받는 은혜를 경험했지만, 그는 곧 다시 이전의 상한 마음, 분노하는 마음으로 돌아간 것이다.
상처가 얼마나 무서운지 알 수 있는 대목이다.
억지로(삼일 길 성읍에서 하루만 외쳤으므로) 니느웨를 향하여 외친 요나가 회개하고 용서받는 니느웨를 보고 싫어하며 분노하는 모습을 보이는 것은 그의 상처가 여전함을 보여주는 것이다.

하나님의 계획에 의해 자기를 시원하게 해주었던 박넝쿨이 말라죽는 작은 어려움이 더해지자 참지 못하고 ‘스스로 죽기를 구하여 가로되 사는 것보다 죽는 것이 내게 나으니이다'(욘4:38)라고 말한 것이나, ‘네 성냄이 합당하냐’고 물으시는 하나님 말씀에 ‘성내어 죽기까지 할지라도 합당하나이다'(욘4:9)라고 핏대를 세우며 대는 것은 억압된 분노가 폭발하는 모습이다.

그러나 요나의 이야기에서 우리가 주목해야 할 중요한 점은 분노하는 자를 다루시는 하나님의 방법이다.
요나가 비록 반항하는 태도로 계속 빗나가지만, 그리고 계속 분노하지만, 하나님은 그 분노에 맞대응하지 않으신다는 것이다.
고난을 통해 간섭하시면서도 그가 스스로 깨달을 수 있도록 기회를 주셨고 마주 부딪치지는 않으셨다.
‘내가 아끼는 것이 어찌 합당치 아니하냐?’ 물으시면서 그를 감동시키시고 납득시키시려고 하셨다.
이것이 분노하는 마음을 가진 자를 다루는 중요한 기술이다.<949/10232014>

To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