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꾸러기의 짧은 글 긴 생각> 희망을 말하고 싶었다

이경규목사 / 서울 새로운 성결교회 담임
언제부터인가…
우리는 희망보다 절망을 더 많이 이야기하는 시대 속에 살고 있다. 그리고 낙심과 포기가 익숙한 시대가 되어버렸다. 많은 사람들이 도무지 끝날 것 같지 않은 길고 어두운 터널을 홀로 뚜벅뚜벅 걸어가는 시대가 되어버린 것이다. 우리가 바라보고 있는 내일은, 아무리 노력해도 지푸라기조차 잡을 수 없을 것처럼 보이는, 희망이 없는 빈 공간처럼 보인다.

그래서일까?
밤새도록 헛고생만 하고 삶의 자리를 등진 채 빈손으로 뒤돌아서는 베드로의 모습이나, 당신은 나를 향한 소망을 품고 있느냐고 눈물을 집어삼키며 읊조리는 문둥병자의 모습은, 다름 아닌 바로 나의 모습의 투영인 것 같다. 잔칫집의 주인 인듯하지만 사실은 모든 사람들이 다 비웃는 껍데기뿐인 인생살이 레위의 모습도 내 모습 그대로다. 바로 ‘지금 여기’를 살아내고 있는 나의 모습이다.

희망…
절망 속에서 희망이 필요하다는 사실을 누구나 다 알지만, 사실 절망하기보다 더 힘들고 어렵고 고통스러운 일이 ‘절망 중에 희망을 꿈꾸는 일’이 아닐까? 그러나 제자들은 그들의 힘으로 도저히 헤어 나올 수 없는 절망 속에서 ‘희망’을 찾았다. 그들은 찾아온 ‘희망’을 만났다. 절망 덩어리에 불과하던 제자들을 ‘사람’으로 바라보시고, 그들에게 다가와 만나주신 예수그리스도가 바로 그분이 희망이었다. 제자들은 손가락 사이로 물고기들이 다 흘러나간 상황 속에서, 귓전을 윙윙거리며 때려대는 비판과 손가락질 사이에서, 아니 나 같은 놈이 무엇이길래 입에 밥숟가락 넣고 살아가느냐는 자학적인 가책 속에서 예수를 만났다. 그들을 찾아온 희망을 만났다.

하지만…
삶이 더욱 더 비참한 것은, 희망을 만난 절망이 절망스러운 현실 속에서 희망을 내팽겨쳐야 했다는 사실 때문일 것이다. 제자들은 겟세마네 동산에서, 빌라도 관정 문 앞에서 예수를 내팽개친 채 그들의 목숨을 건지기 위해 전력을 다해야 했다. 아, 그들을 둘러싸고 있던 상황들이 그들 힘으로 어쩔 수 없었을 만큼 너무나 절망스러워서 그랬던 것일까? 아마 제자들은 예수님을 버리고 자기 발로 도망치면서, 희망이라곤 찾아볼 수 없고 온통 다 절망스럽기만 했던 그들의 처음 상황과는 사뭇 다른 차원의 ‘희망을 버리는’ 경험을 했을 것이다.

그렇다.
어쩌면 제자들은 고통스러운 현실 속에서 따귀를 맞고 목숨을 내놔야 하는 절망스런 상황이 너무나 견디기 힘들고 이겨내기 어려웠을지도 모른다. 이미 그들이 예수님을 만나기 이전부터 익숙해져 있었던 모습처럼, ‘절망 속에서 희망을 선택하는 일’은 그들에게는 너무나 힘들고 어려운 일이었을지도 모른다. 그리고 이건 지금을 살아가는 나도 마찬가지가 아닐까? 정말이지 절망스런 상황 속에서 희망을 선택한다는 것은 너무나 힘겨운 일이다. 박해와 손해가 난무하는 현실 속에서 믿음 가운데 희망을 품고 하나님나라를 고대한다는 것은 지난한 일이다. 감내하기엔 너무나 고통스럽고 힘겨운 일이다. 그래서 나도 종종 제자들이 그랬듯이, 나만의 동산에서 나만의 문밖에서 희망을 포기해버리곤 한다. 그리고 예수님을 버리고 나만의 식탁을 찾아 배부름을 추구한다.

그러나…
하나님은 제자들을 그대로 끝까지 절망 속에 내버려두지 않으셨다. 아니, 이미 예수그리스도를 통해 희망을 맛본 제자들의 영혼은 더 이상 절망 속에서는 살아갈 수 없는 꿈틀거리는 생명을 갖기 시작했다. 절망의 목마름을 희망이 해갈해 주는 것을 그들은 이미 맛보았던 것이다. 사람은 떡으로만 사는 것이 아니다. 사람은 예수그리스도라는 하늘에서 내려온 희망의 떡을 저버리고는 살아갈 수 없는 존재다. 제자들은 처음과 동일한 절망스러운 현실 속으로 굴러떨어지지만, 그러나 더 이상 희망을 포기하지 않기로 작정한다. 모든 풍요를 다 포기하더라도, 내가 먹으려고 마련한 식탁을 포기한다고 하더라도, 내가 더렵혀지고 손가락질 당한다 하더라도, 따귀를 맞게 되고 목숨을 내놓아야 하더라도, 제자들은 결코 희망을 포기하지 않기로 작정한다. 넘실대는 바다를 건너, 저편에서 손짓하시며 조용히 나를 기다리시는 예수그리스도를 향해 헤엄쳐가기로 결심한다. 진정한 희망은 요한복음의 마지막 장면에서 주어진다. 예수그리스도 그분 자체만으로도 완벽한 ‘희망’이지만, 제자가 절망스런 현실 속에서조차 희망을 움켜주기로 작정하고 그분에게 나아갈 때에, 더욱 더 찬란하고 풍요로운 희망이 되어 제자의 영혼 속에서 영원히 샘솟을 것이다.

희망을 말하고 싶었다.
그러기 위해서는 엄연한 절망을 보아야 했고, 다시한번 희망을 포기한 채 절망 속에 기어들어가는 나의 연약한 믿음 없음을 이야기해야만 했다. 오늘도 나는 주저하며 머뭇거리고 있는 자신의 모습을 발견한다. 내게 찾아온 희망이 저편에서 나를 따사롭게 바라보고 있고, 동시에 절망스런 현실이 나를 둘러싸고 있을 때 절망할 것인지 아니면 희망을 붙잡을 것인지를 놓고 고민하는 나의 모습을 말이다. 나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 나는 손에 잡았던 것들을 내려놓고 ‘이미 찾았던 희망’이 내 영혼 속에 다시는 말라붙지 않는 영원히 샘솟는 샘물이 되도록 받아들이는 것을 선택하고자 한다. 예수그리스도께 나아가 그분이 준비하신 식탁에 둘러앉아 소박한 너털웃음을 웃으며 희망을 부여잡고자 한다. <939/08122014>

To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