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회칼럼> 의무냐! 사랑이냐! 이것이 문제로다

최래원목사 / 올랜도 선한목자교회 담임
얼마전 인터넷과 신문에 십일조에 대한 두 상반된 기사가 올라와 지면을 달군적이 있었습니다.
시카고 트리뷴은 파그 커뮤니티교회가 지난 1월부터 십일조의 일정한 금액을 다시 교인들에게 돌려주고 그 돈으로 지역사회를 위한 구제나 자선활동에 사용하도록 한 것입니다.
교회가 다 할 수 없는 일을 교인들이 행함으로 더 많은 부분에서 구제와 사마리아 사역을 할수 있게 된 것입니다. 교인중 한명은 “교회가 십일조를 돌려주는 돈으로 이웃을 돕는 방안을 가족들과 함께 생각하다 보니 지역사회문제에 관심이 더욱 많아졌다”며 한 노숙자 여인에게 그 돈으로 구입한 식료품 등을 주며 실천에 옮겼다고 했습니다.
마침 그 즈음에 교단설립100년을 맞이한 한국의 굴지의 교단에서 소득의 십일조를 하지 않는 교인에 대해 교인으로서의 자격 정지를 추진한다는 내용을 포함한 교회헌법을 전면적으로 개정한다는 내용의 기사가 실렸습니다.
교회출석을 막는 것은 아니지만 장로, 권사 등 교회 내 선출직에 대한 선거권, 피선거권을 갖지 못하게 한다는 것입니다. 물론 사정과 이유가 있어서 그렇게까지 무리수를 두는 것이라고 생각은 했지만 그런 모습까지 가버린 교회의 현실이 부끄럽기 짝이 없었습니다.
십일조로 성도들의 의무를 보다 강요할 것이냐! 십일조를 보다 의미있고 나은곳에 쓸것이냐! 똑같은 십일조의 문제로 한쪽은 살리는 쪽으로, 다른 한쪽은 죽이는 쪽으로 사용하려고 하는 두가지 얼굴입니다. 다행히 그 법안은 많은 논란끝에 상정되지 못했다고 합니다.

어떤 법도 우리를 얽어매도록 주신 것이 아니라 유익하게하기 위해 주신 것입니다. 십일조는 의무의 개념으로 설득시켜서는 안됩니다. 십일조가 의무가 될 때 우리는 하나님을 향한 사랑을 잃어버리게 됩니다.
신약적 십일조는 은혜와 감사에 대한 자발적 표현이자 하나님의 실존적 임재에 대한 그리스도 인의 자발적 헌신으로부터 비롯되는 것입니다. 만약 십일조를 내고 안내는 것이 신앙의 표준이 된다면 얼마나 많은 거짓 신앙인들을 만들어 내겠습니까?
십일조는 그 사람의 신앙의 척도를 측량하는 기준으로 세워져서는 안됩니다.
왜냐하면 십일조는 신앙 그 이상의 것이라고 믿기 때문입니다. 돈에 대한 더욱 강한 집착과 애착이 갈수록 더해 가는 이 세대속에 자신의 전 삶이 맘몬의 우상인 돈이 아니라 하나님이라고 당당히 선언할 수 있는 가장 강력한 믿음의 선언이요, 고백이기 때문입니다.
아울러 그분에 대한 온전한 사랑을 돈과 비교할 수 없기에 십일조를 통해 내가 맘몬에 속한 자가 아니라 하나님께 속한 자며 그분을 나의 사랑으로 고백하는 신앙의 고백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어느때이든 우리는 맘몬에 집착할 수 있기에 그 가능성을 차단하고, 아예 잘라 내 버리는 거룩한 행동에서 나오는 경건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그런한 경건을 어찌 의무로 규정한단 말입니까? 그것을 의무로 묶을 때 그것이 바로 율법이 됩니다. 하나님이 십일조를 요구하신 것은 아무런 분깃을 받지 못했던 레위인들을 배려하시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십일조 하나에도 사람에 대한 배려가 묻어 나는 이유입니다.
만약 우리가 매일 매일을 하나님의 현존(실존)앞에서 살아간다면 나의 전부를 그분에게 드려도 아깝지 않을 것입니다.
사실 신약은 십의 일이 아니라 전부를 드리라고 그 범위를 더 확대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 드리는 모든 것은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대로 드려져하는 것이지 우리의 판단기준에 의해 드려져서는 안됩니다. 그러나 세상을 살다보면 그리 못합니다. 십일조를 어떻게 하면 적게 낼까?를 궁리하고 숫한 방법을 찾습니다. 그래서 많은 분들이 적당히 계산해서 적당하게 십일조를 하는 경우들도 있습니다. 그것은 내가 사용처에 비해 너무 작아 보이지도 않는 금액일 뿐입니다.

저는 오래전 선교단체에서 사역할때 모든 사역자들에게 10/3조를 하게 했습니다. 십일조, 선교헌금, 심을씨(다른 사람에게 심는 재정)입니다. 그런데 그때 재정때문에 힘들고 어려웠지만 그것을 한번도 의무로 생각지 않고 그것이 당연한 삶이라고 여기며 살았었습니다. 그런데 저는 그때 경건의 능력을 배웠고, 돈이 아닌 하나님을 주인으로 모시는 삶의 기쁨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것이 지금까지 제겐 소중한 영적 자산으로 남아있습니다.
그때 저희는 가난했지만 부요함을 누릴 수 있었고, 없었지만 핍절하거나 궁핍하지 않는 법을 알 게 하셨습니다. 그때 돈이 아닌 하늘을 움직이는 훈련을 받을 수 있었던 소중한 경험을 간직하게 된 것입니다.
그것이 성도의 신앙과 경건의 능력을 위한 것이라면 과하리만큼 가르쳐도 무방할 것입니다. 그러나 십일조가 고작 교회에 재정을 충당키 위한 수단이고 목사들의 비자금 만들고, 주머니 채워주는 것으로 사용하기 위한 것이라면 교회 재정은 충당될지 모르지만 성도의 경건의 능력에 는 아무런 도움이 되지 못할테니까요?
혹시 하나님을 향한 의무가 있다면 오직 사랑뿐이여야 합니다. 그 사랑이 모든것의 기초로 자리 잡도록 해야합니다. 진정한 사랑과 비교될 가치는 세상에 아무것도 존재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을 향한 사랑이 의무적이거나 법적인것이라면 그 사랑은 종속입니다. 하나님도 그런 사랑을 원하지 않으실 것입니다. 십일조는 복의 척도와 교회 직분 상승을 위한 수단이 아니라 하나님께 대한 사랑입니다.
한때 저는 이런 고민에 빠진적이 있었습니다. 왜 교회는 들어오는 재정의 십일조를 떼지 않을까? 저의 생각은 교회에 들어오는 십일조 중에서도 십분의 일을 떼 가난하고 소외당하는 고아와 생활고에 시달리는 과부들을 위해 사용해야한다고 생각합니다.(이건 제 생각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사랑하신 조건으로 자신의 전부를 주셔야 했습니다. 우리는 나의 전부중 일부를 계산해 들이면서도 많이 아까워하며 드립니다. 그것이 하나님과 우리의 사랑방식의 차이입니다.
정말 하나님이 나의 최고의 사랑이시라면 내가 몇%를 드려야할지 고민이 될까요? 왜 우리는 나 자신을 위해 더 많은 재정을 써도 아깝지 않다고 여기는데 유독 교회에 내는 십일조에 대해서 만큼은 고민하고 아까워할까요? 그것은 교회가 드려진 재정을 올바른 목적으로 쓰지 않기 때문은 아닐까요?
교회의 이런 관행이 성도들에게서 하나님에 대한 사랑마저 인색하게 만들어 버린것은 아닙니까?
교회가 투명성을 잃어버린체 성도들에게 강요하는 모양은 아름답지 못합니다.
만약 십일조가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것이 아닌 종교적 의무감으로 드려지는 것이라면 오히려 그렇게 드린 십일조의 일정부분을 지역사회에 환원함으로 교회와 성도들에게 자부심과 자발적 동기를 만들어 주는 것이 더 보기에 좋지 않을까요? 만약 교회가 십일조를 사용하는 방식이 점점 투명해진다면 십일조도 의무에서 점차 사랑으로 바꿔가지 않겠습니까? <919/031120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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