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회칼럼> 우리는 모두 주가 필요합니다

최래원목사 / 올랜도 선한목자교회 담임
매일 스치는 사람들 내게 무얼 원하나 / 공허한 그 눈빛은 무엇으로 채우나 / 모두 자기 고통과 두려움 가득 / 감춰진 울음소리 주님 들으시네 / 그들은 모두 주가 필요해 / 깨지고 상한 마음 주가 여시네 / 그들은 모두 주가 필요해 / 모두 알게 되리 사랑의 주님
캄캄한 세상에서 빛으로 부름받아 / 잃어 버린 자들과 나누라고 하시네 / 주의 사랑으로만 사랑할 수 있네 / 우리가 나눌 때에 그들 알겠네 / 그들은 모두 주가 필요해 / 깨지고 상한 마음 주가 여시네 / 그들은 모두 주가 필요해 / 모두 알게 되리 우리의 사랑으로 / 그들은 모두 주가 필요해
송정미 사모가 불러 많은 이들의 심금을 울리고 회복을 전해주었던 찬양입니다. 특히 제게 많은 은혜가 되었던 부분이 후렴에 나오는 “그들은 모두 주가 필요해 깨지고 상한 마음….모두 알게 되리 사랑의 주님…” 이란 부분입니다. 정말 우리는 예수님이 필요한 사람들입니다.
지난 금요일 최인혁 전도사님을 모시고 찬양 콘서트를 열었습니다. 많은 분들이 오셔서 아버지의 사랑과 위로를 받는 시간이었습니다. 상하고 지친 우리의 영혼에 단비와 같은 사랑은 바로 하나님의 사랑 외에 다른 것이 필요치 않다는 것을 다시 한번 알게 하신 시간이었습니다.
그 콘서트 중에 함께 예배드리면서 많은 질문이 저의 머리속에 떠올랐습니다. “교회는 무엇이어야 하는가? 교회는 무엇을 해야 하는가? 우리는 정말 올바른 교회로 가고 있는가? 정말 교회는 지치고 상한 마음을 감싸주는 공동체인가? 아님 더 아프게 하고, 상하고하고 지치게 만들고 있는 곳은 아닌가? 나의 설교는 지친 성도들에게 주님이 주시는 쉼에 머무르게 하고 있는가? 우리가 드리는 찬양은 정말 하나님 한분만을 향하는 찬양인가?” 등의 많은 생각들이 저의 마음을 무겁게도 하고, 다른 대안이 없는 것 때문에 슬프게도 했습니다.
이민생활이 교회를 떠나서는 생각할 수도 없었던 때가 있었습니다. 교회는 모든 나그네인 이민자들의 위로 피난처와 안식처였고, 힘들고 어렵고, 고향생각 나고, 한국음식이 너무 그리워 향수병이 날 때도 교회는 그런 갈증을 풀어주고, 위로해주고 용기를 주고 새롭게 살아갈 소망을 주었던 곳이었습니다.
그러나 이제 이민교회는 그런 따스함도, 포근함도, 잔잔한 감동과 사랑을 주기엔 너무 부자연스럽게 변모해버렸고, 그런 것을 요구하면 눈총을 받게되었습니다. 어쩜 그런 것을 기대하고 바라는 것이 이젠 사치스러운 바람이 되어버렸는지 모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사람들은 사랑에 목말라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진정한 위로와 상한 마음의 치유를 더 간절히 바란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영적이지 않고, 신앙의 모습과는 거리가 멀다고 치부한다해도 여전히 사람들의 필요는 더 커져만 갑니다. 신앙이 무엇입니까? 영성이란 것이 무엇입니까? 성도들이 없이 그것들이 존재하고 논의 될 수 있을까요?
성경에는 참된 영성의 기준을 정해 둔 것이 없습니다. 찾아봐도 어디에도 없습니다. 진정한 영성은 더불어 성장하고 더불어 걸어가는 신앙이 아닐까요? 누군가는 자기 혼자 저 멀리 앞서가고 누군가는 뒤쳐져 저 뒤에 홀로 주저앉아 도퇴되어 못 따라오고 낙오되면 저 사람의 믿음은 저 정도밖에 안되니까? 라고 무시를 당하기 일쑤입니다. 만약 교회가 그 본질을 외면한체 독불장군같이, 자신밖에 모르는 철저한 개인주의적 신앙을 양상해 낸다면 교회의 자멸은 불을 보듯 뻔 할 것입니다. 만약 교회가 지치고 상한 사람들을 위해 모든 것을 포기할지라도 가던 걸음을 멈추고 다시 돌아서 그 사람의 손을 잡아 일으켜 더불어 걸어 갈 수 없다면 교회는 앞으로 50년이 체 못되어 이땅에서 서서히 사라지고 말 것입니다.
히브리서10장23-25을 보면 교회는 사람들에게 소망을 주어야 하고 소망이 되야 한다고 가르칩니다. 그 소망은 어디로부터 옵니까? 서로 돌보고, 사랑하고, 선행을 격려하고 자주 만나고 모일 때 소망이 옵니다. 왜입니까? 결국 우리밖에 우리를 가장 잘 이해하고 함께 할 수 있는 사람들이 이 세상에는 없기 때문입니다. 어려움을 당하고 환란을 당할 때 바로 전에 교회 공동체로부터 위로 받은 사람, 손을 잡아 일어난 사람만이 그 일을 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같은 마음으로 걷고, 같은 목표를 향해 달리고, 같은 생각을 공유하고 갈 수 있는 공동체, 그러면서도 따뜻함을 잃지 않고, 상처를 감싸주고, 지치고 상한 마음의 단비와 같은 위로를 부어줄 수 있는 공동체 그것이 이땅에서 교회말고 또 무엇이 있겠습니까?
이 시대의 대안인 교회가 그 대안을 제시하지 못하면 더 이상 우리는 모여도 모임이 아니요, 찬양해도 기쁨이 아니요, 예배해도 하나님이 받으실 만한 예배가 아닌, 그저 세상의 또 다른 축소판이 되어 아규와 다툼과 분쟁의 소용돌이 속에서 헤어나지 못 할것입니다.
사단은 철저한 전략으로 그리스도의 몸을 무너트리기 위해 예수님의 승천이후 이땅에 세워진 교회를 2000년이 넘도록 포기하지 않고 공략하고 있습니다. 그러는 동안 교회는 그들에게 속수 무책으로 당했고 당하고 있습니다. 전략을 안짜거나 좋은 아이디어가 없어서가 아닙니다. 그렇게 속수무책으로 당하고 있는 한가지 이유는 교회가 더 이상 예수님을 붙잡지 않기 때문입니다. 더 이상 예수님 때문에 고난받고 싶지 않고 싶기 때문입니다. 교회가 주님 외에 다른 것들의 필요를 너무 쉽게 허용해 버렸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모두 주가 필요합니다. 그런데 더 절실히 주님을 필요로 해야하는 곳은 바로 교회입니다. 교회가 정말 주님을 붙잡으면, 주님 외에 다른 모든 것을 버리고 오직 주님만 필요로 하는 갈망이 회복되면 교회는 더 강력해질 것이고, 사단의 전략은 속수무책으로 무너지게 될 것입니다. <916/021920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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