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명열칼럼> 깊어가는 가을에……….

<칼럼리스트 / 탬파거주>
가을이 이제 떠나갈 채비를 하고 있다. 한잎 두잎 떨어지는 낙엽을 밟으며 이제 머지않아 북풍에 밀려오는 밀물처럼 겨울은 그렇게 눈과 얼음과 추위를 동반한 동장군을 호위병처럼 거느리고 점령지에 찾아오는 전승 장군처럼 위엄과 엄숙한 표정으로 암울한 회색 빛의 두터운 재킷을 걸친 채 의기양양하게 우리들의 곁으로 다가와 겨울이 왔노라고 호통을 치며 소리를 지르고 잔뜩 겁을 먹일 것이다.
봄, 여름, 가을, 겨울이 물레방아가 돌듯 때가되면 돌아오고 또 때가되면 떠나는 것이 자연의 이치이건만 가을이 되면 우리는 감상적, 성찰적 존재를 회복한다. 또 우리는 그래야만 한다.
아마 사계절이 돌아오는 자연의 섭리를 우리네 인생살이에 비유하기 때문일 것이다.
정열적이고 생산적이고 자신감 넘치는 계절을 지나, 찬바람 옷깃 속에 스며들기 시작하면 멀지도 가깝지도 않은 곳에 삶의 끝자락이 언뜻 언뜻 비친다. 그래서 가을은 중년의 계절이기도 하다.
가을이 저물어가고 있다. 기온은 갑자기 뚝 떨어져 작년에 세탁해둔 두터운 코트나 겨울옷을 꺼내어 입어야 할 때다.
울긋불긋 만산홍엽의 아름다움의 극치를 이뤘던 가을의 산에서 벗어나 회색 빛으로 변해 가는 하늘아래 마음도 덩달아 어둠이 깃 든다. 형형색색 아름답던 가을의 모습은 서서히 이제 모습을 달리한다.
낙엽은 거의 다 떨어져 내리고 나무의 모습은 앙상한 나목으로 탈바꿈하고 있다. 신비롭다.
자연의 순환속에 변해 가는 세상의 모습들이 너무나 신비롭기만 하다. 눈동자를 돌려 시선을 한번 돌린 것뿐인데 보이는 모습이 완전히 달라지는 것을 보고 놀란다.
세상사의 이치가 모두 다 이런 것이 아닐까? 어디에 서 있느냐에 따라 다르고 어디를 바라보느냐에 따라 달라진다. 우리의 눈은 한곳에 고정하고 싶어한다. 다른 곳을 볼 생각을 잘하질 않는다.
왜냐하면 좋은 것을 보게 되면 좋은 것만을 보고 싶어한다. 고개를 한번 돌리면 새로운 세상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바라보려 하지 않는다. 바라보지 않은 세상에 대해서 알지 못하는 것은 지극히 당연한 일이다. 그러면서도 불평불만을 늘어놓는다. 스스로 바라보지 않으면서 왜 보이지 않았느냐고 불평을 늘어놓는 것이다. 이렇게 어리석은 것이 사람이다. 회색 빛으로 변해가는 하늘과 바다를 바라보면서 깊어 가는 가을을 생각한다. 가을이 깊어진다는 것은 마음도 그만큼 깊어진다는 것을 의미한다. 마음이 깊어진다는 것은 생각이 깊어진다는 것을 뜻한다. 생각이 깊어진다는 것은 자신의 마음이 그만큼 숙성되어 아름다워진다는 것을 의미하기도 한다.
가을은 깊어지는데 마음은 그대로라면 그것은 문제다. 아니 심각한 결핍으로 완전한 삶이 되지 못한 것을 의미한다. 아름답고 곱게 물들여진 가을의 모습에 취하는 것도 중요하고 회색 빛 하늘과 바다를 바라보면서 마음을 아름답게 하는 것도 중요하다. 깊어 가는 가을을 바라보면서 그 겉모습에 취하고만 있다면 그것은 잘못된 것이다. 올해 가을은 이제 가면 다시는 오지 않는다. 물론 내년의 가을은 다시 또 오겠지만 올해 지금의 가을은 영원히 돌아오지 않는다. 올해 가을이 가르쳐주는 아름다운인생은 오직 지금이기 때문이다.
바다와 하늘을 바라보면서 마음을 본다. 나의 마음이 얼마나 아름다워졌는지를 생각해본다. 쉽게 긍정을 하고 고개가 끄덕여지지를 않는다. 어리석은 마음은 깊어지는 가을과는 전혀 상관없이 아직도 초록빛을 띄고 있을 뿐이다.
깊어지는 가을만큼이나 우리들의 마음도 깊어졌으면 얼마나 좋을까?……저 멀리 잿빛하늘위로 날아가는 갈매기 한마리가 손짓을 한다. 부질없는 욕심을 버리면 마음도 깊어질 수 있다고 말하고 있다. 갈매기를 바라보면서 빙긋이 웃었다.
깊어 가는 가을밤에는 사람이 그리워지는 계절이다. 요즘처럼 한잎 두잎 낙엽이지고 추적추적 가을비까지 내리면 춥지 않아도 옷깃을 여미게 된다. 김이 모락모락 나는 차 한 잔을 들고 창밖을 보게 된다.
아무도 찾아올 사람도 없고 나 자신도 저물어 가는 가을밤에 딱히 만나러 찾아갈 사람도 없다. 가을밤은 책읽기에 아주 좋은 밤이다. 과거 옛날 나의 고향에서는 종이가 귀하고 책을 구하기가 힘들다보니 마을에서 누가 책을 한권 구하면 석유등잔불아래 여러 사람이 둘러앉아 한사람이 읽어주는 내용을 집중해 듣곤 하였다. 책의 내용 중에 구슬픈 대목의 이야기라도 나오면 마을아낙네들은 때묻은 치맛자락으로 솟아나는 눈가의 눈물을 찍어 닦아내기도 하였다. 시골의 가을은 입동이 지나면서 끝이 난다. 겨울김장도 이맘때에 일제히 담그고 가을의 추수도 모두 거둬들여 방앗간에 가서 도정을 마친다.
지금은 시대가 바뀌고 생활방식조차 변하다보니 이러한 농촌의 풍경은 아득한 옛날의 활동사진 속에 나오는 추억의 한 토막 영화장면처럼 머릿속에서 사라진지가 오래이다.
나뭇잎이 우수수 떨어져 내리는 깊어 가는 가을…….버려야할 것이 무엇인지 아는 순간부터 나무도 가장 아름답게 불탄다. 제 삶의 이유였던 것, 제 삶의 전부였던 것, 아낌없이 버리기로 결심하면서 나무는 생의 절정에 이른다. 이렇게 나무는 자연의 순리, 창조주의 질서를 우리에게 보여준다.
뼈대만 앙상하게 남은 나목으로 되돌아가 기나긴 추위에 더욱 자신을 단련시키는 나무들처럼 우리도 스스로 채색된 의식과 세상에서 물려받은 가식을 모두 벗고 이 가을을 순수하고 지고스럽게 보낼 수는 없을까?……… 내려놓음이란 자신의 최상의 것을 미련 없이 버리는 것이거늘………..
낙엽은 스스로를 가볍게 하여 그 몸을 내려놓지만 우리는 스스로 무거워져 그 압박을 이기지 못할 때 내려놓는다. 나무와 자연의 섭리를 보면서 깨우치고 배울 것이 너무나 많다. 어느 듯 조물주께서 주신 또 한번의 가을은 우리 곁을 영원히 떠나가고 있다. <myongyul@gmail.com> 904/111920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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