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명열칼럼> 묘령(妙齡)의 여인, 그리고 묘자모(妙姿媒)

<칼럼리스트 / 탬파거주>
사람들은 흔히 꿈속에서나 생시에 묘령의 여인을 만났다. 또는 그 묘령의 여인과 데이트를 했다.
또 어느 설화에서는 묘령의 여인을 만나 마음이 통하여 정을 나누고 그녀와 미래를 함께 하려고 여자의집에 갔더니 그 묘령의 여인이 알고 보니 호랑이였다는 이야기도 전해 내려온다.
나는 이번에 그 묘령의 여인과 얽힌 이루지 못한 사랑의 이야기를 여러분들께 들려 드리도록 하겠다.
옛날 신라시대 원성왕때의 이야기이다. 화랑도인 김현이란 사람이 밤이 깊도록 혼자서 쉬지 않고 흥륜사
의 전각과 탑을 돌았다. 삼국유사를 보면 신라풍속에 매년 2월이 되면 초여드렛날부터 보름날까지 서라벌의
남. 녀들이 서로 다퉈 탑돌이를 하면서 복을 비는 모임을 했다고 한다. 여기에 맞춰 김현도 밤늦도록 혼자서 탑을 돌게 되었다. 이때 한 묘령의 어여쁜 젊은 여인이 나타나 염불을 하면서 자기를 따라 탑을 돌았다.
얼마를 돌았을까? 시간이 많이 흐른 후 두 사람은 감정이 통해 눈길을 맞추고 서로 손을 잡고 탑을 돌았다.
김현과 스무 살 남짓의 어여쁜 묘령의 여인은 이윽고 이심전심으로 정분이 솟아나 탑돌이를 끝내고 으슥한
숲속으로 가서 정을 통했다.
그 당시의 탑돌이행사는 불교축제의 하이라이트로 동맹, 영고, 무천 등 고대에 성행했던 축제가 불교식으로 변해져 큰 행사로 치러졌는데 탑을 도는 일차적인 목적은 자신과 가족, 국가의 평안을 기원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이 탑돌이가 모처럼 젊은 남. 녀가 만나 눈이 맞을 수 있는 이성교제의 장이 되기도 했다. 이렇게 본다면 왜 김현이 혼자서 남아 늦은 시각까지 탑돌이를 계속했는가를 짐작할 수 있다.
즉 그는 짝을 찾지 못했던 것이다. 묘령의 여인과 으슥한 곳에서 정분을 나눈 후 여인이 집으로 돌아가려하자 김현은 예쁘고 아름다운 묘령의 여인과 이대로 끝나고 헤어진다는 것이 아쉽고 서운해서 그녀를 따라갔다. “제발 따라오지 마세요” 하고 그 여인은 간곡히 청을 하며 거절을 했는데도 김현은 막무가내로 그 여인을 아내로 삼고 싶어서 그녀의 집까지 집요하게 따라갔다. 그녀의 집은 그곳에서 한참이나 떨어진 서산근처의 산림이 우거진 산 아래의 어느 초가집이었다.
노모가 그 여인에게 함께 온 사람이 누구냐고 묻자 여인은 자초지종을 노모에게 설명을 드렸다. 여기부터 이야기는 설화모드로 바뀌어서 이야기를 이어가겠다. 노모는 네오라비들이 집에 오면 나쁜 짓을 할 텐데 어쩌면 좋겠느냐고 걱정을 하더니 김현을 구석진 다락방위에 숨겨뒀다. 이때 호랑이세마리가 나타났다. 호랑이를 본 묘령의 여인은 세 마리의 호랑이를 보자 “오빠들 이제 오셨느냐”고 인사를 했다. 호랑이 세 마리는 여동생의 말에는 대꾸도 않고 “어찌 집안에서 사람의 냄새가 나느냐”며 집구석구석을 뒤지더니 다락방속에 숨어있는 김현을 끌어내렸다. “오늘은 사냥감 한 마리 잡지를 못했는데 이렇게 먹잇감이 내 집에 굴러들어왔으니 아침식사로서는 안성맞춤”이라고 혀를 날름대며 가까이 왔다. 이때 그 여인은 오빠들의 앞을 가로막으며 제발 살려달라고 울면서 애걸을 했다.
이때 하늘로부터 갑자기 큰소리가 들리며 “네놈들은 생명을 많이 해치고 있으니 마땅히 죽어야겠다”는
목소리가 들렸다. 그 여인이 나서며 자기가 그 벌을 대신 받겠다고 하늘을 보고 말하니, 세 마리 호랑이는
모두 잽싸게 도망을 치고 말았다.
묘령의 여인이 말했다. “저와 낭군님은 비록 사람과 호랑이 사이지만 하루저녁의 즐거움을 얻어 부부의 연을 맺었습니다. 내일 제가 시장에 들어가 사람들을 해치면 임금께선 큰 상을 내걸고 나를 잡으려할 것이니 겁내지 말고 나를 쫒아 성 북쪽 숲까지 오십시요” 울면서 헤어진 김현은 그녀의 말대로 행하고 북쪽의 숲에가 보니 여인이 웃으면서 기다리고 있었다.
찾아온 김현의 품에 한번 안기고난 묘령의 여인은 갑자기 김현의 칼을 뽑아들고 스스로 목을 찔러 김현의 품속으로 쓰러졌다.
갑작스러운 돌발 사태에 너무나 놀라 김현이 한참 후 정신을 차려보니 눈앞에는 커다란 암놈의 호랑이가
피를 흘리며 쓰러져있었다.
이 일로 벼슬길에 오른 김현은 묘령의 여인으로 나타난 호랑이를 애도하기위해 호원사(虎願寺)라는 절을 지어 그녀를 그리워했는데 지금도 경주 황성동에는 그 절터가 남아있다고 한다.
이상의 이야기는 ㅁ묘령의 어여쁜 여인을 만나 생겼던 설화의 옛이야기이다. 흔히들 사람들은 묘령(妙齡)
이라는 말을 많이 하는데 이것은 무엇인가 말로 표현할 수 없는 미묘하고 신기한 구석을 감춘 20세 전.후
의 꽃다운 여인의 나이를 말한다.
여자나이 20세 정도를 묘령이라고 한다. 즉 묘한 나이란 뜻이다. 묘하다는 말의 어원도 갑골문(甲骨文)에서
눈을 그려 남자를 묘하게 끈다는 의미를 갖는다. 즉 눈빛이 다르다는 이야기이다. 혹은 방년(芳年)이라고도
한다.
방년이란 말 중에서 芳은 꽃향기가 온 사방(四方)으로 퍼져 나간다는 뜻이다. 즉 그러한 꽃 같은 나이라는
말이다. 참으로 멋진 말이다. 향년(享年)이란 말은 의미가 전혀 다르다. 향년이란 한평생 살아 누린 나이, 즉
죽을 때의 나이를 말할 때 쓰는 말이다. 향년 75세하면 75세를 살다가 돌아가셨다는 말이 된다. 享의 의미는 사당(祠堂)에 자식들이 많은 음식을 마련하여 올리니 조상들이 그것을 누린다는 뜻으로 풀이한다.
그리하여 누릴 향이라고 한다. 여자에게는 아름다운마음이 첫째이다. 옛날의 가요 노래가 사중에 (마음이 고와야 여자지 얼굴만 예쁘다고 여자냐) 하는 그런 노래가 있다.
따라서 여자는 고운마음이 첫째이고 둘째가 바로 모습(姿態),자태를 말한다. 그 글자가 바로 맵시姿, 모습자, 모양자이다. 옛날사람들이 글자를 정말 잘 만들었다는 생각이 든다. 그처럼 여자가 곱게 자라면 그냥 두지 않는 사람이 있다. 바로 중매쟁이이다. 중매쟁이는 세상을 오래 산, 세상경험이 풍부한 할머니들이다. 여자는 여자가 안다고 중매쟁이노파들은 한번만 척 봐도 대충은 처녀의 가문이나 교양의 정도는 그 처녀의 옷매무새와 자태만 봐도 한눈에 알아본다. 중매란 의미도 결혼이 이루어지도록 중간에서 소개하는 일을 말한다. 특히 媒는 계집女에 아무개 某가 합쳐진 것으로 아무개여자를 엮어서 결혼하도록 중매해 주는 것을 말한다. 더구나 某에는 달감甘에 나무목木이 있으므로 달고 새콤한 매화(梅花)를 의미하는 것이다. 중매쟁이들이 달콤한 말로 현혹되는 말들을 잘 하는 것을 보면 엉뚱한 비유는 아닌 것 같다.
그 옛날 신부들은 신혼첫날밤이 지나서야 신랑의 얼굴을 볼 수 있었다. 그것은 부끄러움에 감히 신랑의 얼굴을 쳐다 볼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요즘과는 비교가 할 수 없을 정도로 여자란 정숙함과 부끄러움을 지녀야만 여자답다고 생각을 했다. 그게 여자의 덕이고 아름다움이었다. 어쨌거나 결혼은 인생에 있어서 큰 전환기임에는 예나 지금이나 달라지지 않았다. 다만 묘령의 나이인 20세를 전. 후한 결혼이 아닌 현대사회에서는 여자나이 30세가 넘어서 결혼을 하는 것을 예사로 하고 있다 묘령의 결혼시기가 중령(中齡)의 나이로 바뀐 것이 세상의 큰 변화라고 할 수 있겠다.
<myongyul@gmail.com> 898/100120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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