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명렬칼럼> 홍도야 우지마라 ‘사랑에 속고 돈에 울고’

<칼럼니스트 / 탬파거주>
지나간 시절, 한국의 대중술집인 선술집은 노래를 부르는 장소가 아니다.
넓지 않은 홀 안에 손님들이 술과 안주를 먹기 편리하게 하기 위해 테이블 몇 개와 의자 몇 개를 점포 안에 배치해놓고 저렴한 값의 두부찌개와 돼지고기, 생선구이, 나물무침 등의 몇 가지 안주거리를 준비해놓고 손님들에게 제공하며 서민들의 애환과 힘든 생활의 노고를 풀어 주기 위한 일반 대중적인 목로주점이다.
거기에 비해 여기에서 조금 한 차원을 높여 고급? 분위기에 주머니에는 술값을 넉넉히 넣고 가서 술과 노래와 접대부(도우미)의 시중을 받아가며 기분 좋게 스트레스를 풀고 젓가락장단에 흥을 돋우며 목청을 뽑아 노래를 부르며 술을 마시는 곳이 소위 말하는 니나노집이다. 니나노집은 노래를 부르고 또한 듣기 위해서 간다. 도우미(접대부)가 있어야하는 까닭이 바로 이 노래 때문이다. 그 옛날 조선말기와 일정 때는 난봉가나 수심가 등을 불렀겠으나 내가 직장에 다니며 술집을 드나들던 청년시절에는 그 시대에 유행하는 유행가는 물론 아울러 흘러간 옛날노래인 울고 넘는 박달재라던가 선창, 방랑시인 김삿갓, 번지 없는 주막, 홍도야 우지마라, 등등 추억 어린 옛 노래가 주종을 이루었다.
술은 정종이나 소주 또는 맥주를 마실 수도 있으나 대종은 역시 동동주나 막걸리였다. 양주를 마시지도 않았을 뿐 더러 팔지도 않았고 이러한 술집에서는 양주만은 분위기에 맞지 않는 술이었다.
막걸리는 주전자에 담아서 나오는데 주전자바닥을 우그러뜨려 양을 적게 준다고 깐깐한 친구 녀석으로부터 시비가 붙은 적도 있었다. 그러면 여주인은 어느 손님이 술기운에 주전자를 내동댕이쳐서 그렇게 됐노라고 앙칼지게 쏘아붙이기도 했다. 지금은 흘러간 옛날얘기이지만, 아마 지금쯤은 서울의 뒷골목에서 이러한 니나노 집은 찾아보기가 힘들 거란 생각이 든다.(술집에 간적도 오래됐고 한국에 다녀온 지도 오래돼서 잘 모르겠지만). 어쨌건 간에 고교동창, 대학동창, 직장동료, 사회친구, 등등 마음이 통하고 의기투합하는 친구들 몇 명이 모이면 나는 종종 친구들에게 이끌리어서 이러한 니나노술집에 가서 술도 마시고 단골메뉴로 올라오는 통닭 백숙안주에 배를 불리며 젓가락장단에 맞춰 그 시대에 유행하는 노래를 비롯하여 옛날노래들을 목이 터져라 부른 적이 많았다.
특히 이러한 떄 술판이 무르 익어가는 밤이면 어김없이 부르는 노래가 있었다. 술이 얼큰하여 어깨동무를 하고 목에 맨 넥타이를 풀어서 이마에 질끈 동여매고 비장한 표정을 지으며, 유독 이 노래를 부를때 만큼은 옛날 고교시절 교내경기에 응원을 하며 교가를 합창하듯 자못 결연한 표정이 되어 “홍도야 우지마라 오빠가 있다”를 모두 함께 구성지게 불러 젖히던 모습들이 추억이 되어 떠오른다.
그렇게 술이 거나하여지면 누군가가 지정을 하지 않아도 자연스럽게 부르는 단골 곡목들이 많이 있지만 유독 이 노래를 부를 때만은 이상야릇하게 감정이 차분해지고 마치 내 자신이 홍도의 오빠가 된 것 같은 기분으로 목청을 한껏 돋워가며 얼굴의 표정에 슬프고 애처로운 분위기를 연출하는 친구들이 많았었다. 이제는 참으로 세월이 많이 흘러갔다. 이제 그 친구들은 모두 어디에 가서 어떻게 살고 있는지 궁금하기도 하다. 힘들고 가파른 미국의 이민생활, 삶의 고갯길에서 새삼 옛날 술 먹고 흥에 겨워 어깨동무하고 춤추던 친구들이 그리워진다. 추억의 노래 “홍도야 우지마라”라는 제목의 노래는 대한민국의 사람이라면 모르는 사람이 거의 없을 정도이다.
옛날 내가 살던 시골 고향에는 일 년에 한두 번 정도 전국 각지를 돌며 신파극을 하는 유랑극단들이 찾아와 공연을 하는 일이 있었다. 이들의 주요 공연내용제목은 “홍도야 우지마라”였다.
이것은 원래 사랑에 속고 돈에 울고 였는데, 극중의 주연배우인 홍도의 생애가 너무나 가엾고 눈물 없이는 볼 수 없는 파란만장한 인생이었기에 남녀 누구나 보면서 울음바다를 이루었다.
서울에서는 1938년도에 동양극장에서 연극 사랑에 속고 돈에 울고가 공연되었다고 한다.
이렇게 전국에서 성황리에 공연을 가졌던 이 ‘사랑에 속고 돈에 울고’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오빠에게 공부와 출세를 시켜주기 위하여 홍도는 스스로 자청하여 기생이 되었다. 화류계 생활을 하며 갖은 역경과 고생을 마다 않고 학비를 모아 오빠를 졸업시켰다. 여동생의 도움으로 학업을 마친 오빠는 순사가 되었다. 이후 홍도는 화류계에서 빠져나와 시집을 가지만 시집살이의 삶이 순탄치가 않았다. 홍도의 과거를 알게 된 시어머니는 온갖 학대로 홍도를 괴롭혔다.
어느 날 홍도는 심하게 매를 맞고 실성한 상태에서 시어머니에게 칼을 휘두르고 살인미수죄로 잡혀가는데 이때 홍도의 손에 수갑을 채운 순사는 뜻밖에도 홍도의 오빠였다. “오~ 이런 하늘이 통곡할 운명의 장난이 또 어디 있으리요?” 이것은 신파극을 설명하는 변사(辯士)의 말이다. 통곡하는 홍도가 몸을 제대로 가누지 못하고 쓰러질 때 오빠는 홍도를 위로하며 노래 한곡을 부른다. 그 노래가 바로 ‘홍도야 우지마라’였는데, 이 장면에서 관중석은 온통 눈물바다가 되었다고 한다. 이 연극을 본 어느 기생은 자신의 처지와 현실이 너무나 비관이 되어 마침내 한강 물에 투신자살을 했는데 이 사연이 신문에 보도되어 연극과 노래는 더욱 유명하게 되었다고 한다. 극장의 앞과 주변은 온통 화류계의 슬픈 사연을 다룬 이 연극을 보러온 기생들로 넘쳐났다고 한다. 어느 날은 마치 약속이라도 한 듯 5백여 명의 기생들이 아예 손수건을 준비하고 한꺼번에 몰려와서 이 연극을 보며 흐느꼈는데 이 때문에 그 날 밤은 서울 장안의 권번이 왠통 텅 비었다고 한다. 왜 이렇게도 이 연극이 많은 기생들에게 그토록 화제가 되었을까?
그 까닭은 이 노래가 기생들의 박복한 삶과 고달픈 처지를 마치 자신들의 생애처럼 생생하게 다루었기 때문이었다. 공연의 전.후 사정이 이러했으므로 이 연극이 한국 연예사에서 최고의 장기공연 작품 중 하나로 기록된 것은 당연한 결과로 보인다. 훗날의 어느 비평가는 이 연극을 두고서 여성 수난극의 전형, 한국형 최루극(催淚劇)의 원조라고 불렀다.
연극에서의 이러한 폭발적인 인기에 힘을 얻어 영화 ‘사랑에 속고 돈에 울고’가 제작되었는데 이 영화주제가로 올린 곡이 바로 “홍도야 우지마라”였다. 그 당시 이 노래는 나오자마자 대중들의 가슴속을 파고들었고 크게 히트가 되어 이음반의 판매량이 10만장이 넘는 엄청난 숫자였다고 한다. 이 노래를 취입 한 가수는 김영춘이었는데 그분은 1918년 경남 김해에서 태어나 열아홉에 김해농고를 졸업하고 20세에 콜럼비아 레코드사 주최 전국 가요콩쿠르에 출전하여 입상해 가수가 되었다. 그분의 노후는 너무도 가난하고 쓸쓸했으며 2006년에 88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고 한다. 그분은 떠났지만 그 사람의 노래 ‘홍도야 우지마라’는 한국인들의 기억 속에 하나의 원형으로 영원히 자리잡고 있다.
나는 지난 주말 지인을 만나서 식사를 마치고난 후 그분의 손에 이끌리어서 참으로 오랜만에 노래방에 들렀었다. 노래를 잘하지는 못하는 편인데, 이곡 저곡을 뒤지다가 마침 ‘홍도야 우지마라’의 곡이 눈에 띄어서 그 곡을 불러보았다.
그러나 나는 그 ‘홍도야 우지마라’의 노래를 목이 메어서 끝까지 부를 수가 없었다. 그 노래 가사나 사연에 감정이 북받쳐서가 목이 메인 것이 아니라 이제는 청년시절의 잘나가던 때와는 달리 오랫동안 노래를 부르지 않다가 갑작스레 고음으로 노래를 부르려다 보니 목청껏 소리를 높일 수가 없어서 끝내는 저음으로 노래를 마무리 지을 수밖에 없었다.
‘홍도야 우지마라’의 노래를 부르면서 목에 메어 노래를 못 부르기는 젊었을 때 이후 이번이 처음이다. 노래방에 누가 가자고 할까봐 겁이 난다.
<myongyul@gmail.com> 876/042420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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