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원동칼럼> 6월이면 생각나는 그때 그 사람들

<김원동칼럼> 6월이면 생각나는 그때 그 사람들

6월이면 생각나는 두 사람의 여인이 있다.
살기가 힘들어서 더러는 자식들의 장래를 위해서, 이런저런 이유로 떠나야 했던 그런 이민자들이 아니다.
그 땅을 조국으로 생각하고 더 이상 버티기에는 사람으로 할 짓이 아니라는 생각에서 독한 맘먹고, 태어난 땅을 등지고 떠난 두 여인의 이야기다. 두 사람 다 6월에 떠난 사람들이기에 그렇다.

1999년 6월 어느 날이다.
책임 있는 인솔교사들은(나돌던 소문대로) 인근 다른 리조트에서 고스톱으로 즐기는 사이 아무것도 모르는 천진난만한 유치원생 어린이 19명은 잿더미 속에 한줌의 재로 변했다. 인명경시 풍조가 빚은 참화였던 “씨랜드 화제사건”이다. 그 희생자 어린이 중 한 명의 어머니는 왕년의 국가대표 구기 종목의 선수로써 올림픽 메달리스트이기도 했다.
그녀는 어린 자식의 장례식이 끝나자 바로 이민 봇짐을 쌌다. 그리고 호주 행 비행기 탑승을 앞둔 김포공항 출국장에서 기자회견을 했다.
“어린이들의 생명을 이렇게 무시하는 나라에서는 살 수 없다 남은 하나의 자식을 위해서라도 이 땅은 떠나야겠기에 이민을 결심했다”는 그의 끝말이 듣는 이의 가슴을 찡하게 했다.
“저는 대한민국에서 받은 모든 상패와 메달, 그리고 국민훈장까지 미련 없이 반납하고(버리고) 간다”며 목메어 말끝을 못 맺던 그 여인 말이다.

그리고 2002년 6월에 터진 소위 제2연평해전이다. 그러고 보니 어느새 만 10년전의 일이다. 그래서 당시 북괴에 의한 참수리호 침몰과 함께 희생된 함장 윤영화 소령을 위시해 6명의 해군 희생장병들의 넋을 이제라도 기려야 한다는 올해 6월을 맞아 그 목소리가 높다.
총책임을 져야 할 DJ는 이미 딴 세상사람 되었으니 별 수 없다. 그러나 햇볕 정책에 미쳐 날뛰던 그 당시 김대중 김정일 양 김씨의 눈치를 보느라 북의 기습에 대응은 고사하고 경고사격까지 못하게 했던 살아있는 사람들(군 요직에 있는 현직 고위장성들)은 군법에 의해 응징해야 한다는 소리다.
손발이 꽁꽁 묶인 상태에서 김정일에게 6명의 산목숨을 그대로 바치게 한 김대중과 김정일에 부화뇌동한 당시의 군지휘부 라인은 처벌해야 한다는 때늦었지만 우러나오는 진한 목소리다. 그로 인해 조국을 등진 또 한사람의 여인의 이야기로 슬픈 “6월의 노래”는 이어진다.

당시 그들 희생 장병을 위한 추도식에는 양 김 씨의 비위를 건드리기 싫어 국무총리를 비롯해 국방장관 합참의장 그 모두가 참석을 기피했다. 그리고 당연히 참석해야할 대통령은 장례식 당일 한일 월드컵 축구 관람차 장례식을 외면하고 일본으로 떠났다.
바로 대통령의 황당한 그 역겨운 모습을 보고 희생자 중에 한사람인 한상국 중사의 부인 또한 장례식 직후 미국이민(난민)길에 오른다며 김포공항에서 했던 말이다.
“국가를 위해 목숨 바친 군인 전사자의 예우가 이 모양인 나라에서 자식 키울 수가 없다”며 뉴욕 행 비행기에 올랐다.

미국은 62년이 흐른 지금도 한국동란 중 산화한 자국병사들의 잔해를 찾기 위해 끝없는 노력을 하고 있다.
그래서 너무나 부끄러웠지만 참고 견디던 국민들 앞에 때늦은 희소식이나마 뒤늦게 날라 왔다.
늦었지만 그래도 다행이다. 10년 만에 그들 희생자 6명의 이름을 6척의 해군소유 고속함에 각각 붙였다는 반가운 소식도 10년만의 6월을 맞는 호국의 달 말미를 장식했다.
군인은 자기보다 조국을 위해 목숨을 바친다.
군인은 그것을 명예로 안다.
그래서 6월이면 생각나는 조국을 등지고 떠난 그 때 그 사람들과 모윤숙의 시(詩) “국군은 죽어서 말한다”가 함께 떠 오른다. 그녀의 시구(詩句) 한 구절을 여기 옮기며 글을 맺는다.

“바람이여 이름 모를 새들이여 고생하는 나라의 동포들을 만나거든 부디 일러다오, 나를 위해 울지 말고 조국을 위해 울어달라고, 저 가볍게 날아다니는 봄나라 새여 혹시 네가 날아다니는 어느 창가에서 내 사랑하는 소녀를 만나거든 나를 그리워 울지 말고 조국을 위해 울어 달라고 일러 다오.” <837/06272012>

To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