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명열칼럼> 나의 주어진 양심과 종교적 신앙 양심
동물은 오직 훈련에 의해서, 본능에 의해서 살아가지만 사람들은 이 세상에 태어날 때 양심을 가지고 태어난다. 인간은 양심을 가지고 스스로 옳고 그른 것을 삶 속에서 판단하게 되며, 또 교육을 통해서 그 양심의 기준은 확실해지며 또 양심의 기준을 강화하게 되어있다.
인간에게는 양심이 있기 때문에 거리끼는 일이 생길 때에는 가책을 받기도 하고 경우에 따라서는 뉘우침을 가질수도 있다. 이렇게 인간은 일반적으로 자기의 삶을 양심의 기준에 맞추려고 노력하고 있다. 일반인들은 특별한 경우가 아니고는 법의 기준에 맞추기 전에 자기 양심에 비추어서 삶을 살아간다.
모든 사람들은 누구나 양심이 있다. 양심은 세상을 올바르게 살아가는 귀중한 잣대이다. 그런데 이 양심보다 귀한 것이 있을까?….. 또 있을 수 있을까? 만약에 있다면 그것은 무엇일까? 그러나 우리는 이러한 문제의 해결을 위하여 양심은 무엇이며 그 작용하는 바가 무엇인가를 물어야 할것 같다.
아직 철이 들지 않은 어린이들은 양심은 가슴에 있는 그 어떤 실체인것 같이 생각할지 모른다. 나쁜짓을 했을 때에는 가슴이 들먹이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소크라테스는 양심은 신의 뜻과 음성을 전해주는 영적인 존재인듯이 높이 평가해주었다. 그러나 오늘은 누구도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 모양이다.
그러다가 최근에 이르러서는 양심은 우리들의 의식 작용의 일부분이며 그 작용을 통하여 선과 악을 구별하는 능력이라고 보고 있다. 선악 의식 또는 도덕의식이 바로 그것이다. 그것을 좀더 적절히 표현한다면 양심은 가치에의 사랑이라고 불러도 좋을지 모르겠다. 항상 값있고 귀한 뜻과 보람을 위하여 피곤함이 없이 비판하며 끝없는 정진을 거듭하는 마음과 능력을 양심이라고 불러도 좋을것 같은 생각이 든다.
그러므로 양심은 항상 두가지 일을 수행해가고 있다. 선악을 구별하여 가르쳐주는 일이며 선에의 길로 우리들을 밀어주는 추진력이다. 따라서 양심을 믿고 양심대로 복종하며 살아가는 사람은 언제든지 악을 버리고 선을 택하며 스스로를 채칙질 하여 보다높은 생활로 이끌어 올라간다. 그러므로 양심보다 귀한것이 없으며 양심보다 높이 볼 것이 없지 않은가. 인간이 소유할 수 있는 최대의 관심은 이 양심에 집중되어야 하며 우리는 항상 양심적인 생활을 하도록 노력하자. 그러나 우리들의 부족한 생각이 바로 여기에 있었던 것이다. 그것은 모든 인간적인 것은 한계가 있으며 인간 그 자체가 유한하듯이 양심도 역시 유한한 존재가 아닌가 하는 의문이다.
가장 고귀한 것도 인간과 더불어 있어서는 반드시 그 어떤 한계에 머무르지 않을수 없기 때문이다.
우리는 흔히 양심은 행복과 만족 그리고 고요한 평화를 가져온다고 믿고 있다. 물론 비양심적인 인간들은 이렇게 고귀한 양심적인 생활이 가져오는 행복과 만족이 얼마나 귀하다는 것을 깨닫지 못할 것이다. 그러나 양심은 그대로 행복과 만족만을 가져오는 것으로 믿어서는 안된다. 양심은 오히려 마음과 정신에 고통과 어려움을 줌으로써 그의 생활보다 더 높은 위치로 끌어올리는 것이다. 그러므로 때로는 비양심적인 사람들이 오히려 마음의 평안을 누릴수 있기도 하다.
철공장에서 철근을 다는 큰 저울에는 상당히 무거운 물건을 얹어 놓아도 별로 반응이 없다. 크고 무거운 짐을 너무 많이 취급해온 저울대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화학실험실이나 제약소에서 쓰는 저울대에는 조그만 종이 한 장, 약 몇 알만 올려놓아도 저울대가 기울어진다. 양심도 질적인 구별없이 그 상태만을 따진다면 그와 같은 것이다. 양심이 무딘 사람은 상당히 큰 잘못을 저지르고도 별로 마음의 가책을 받지 않는다. ‘그것뿐이야, 나보다 몇배나 나쁜 사람이 얼마든지 있는데 뭐’ 라면 그 뿐이다. 그러나 양심이 맑고 깨끗한 사람은 지극히 작은일 하나를 가지고도 오랫동안 정신적 고통을 받아야 한다.
양심은 악을 고발하고 책망해줌으로써 우리들의 생활과 마음의 위치를 높여주는데 그 본래의 책임이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양심에 관하여 이보다 더 중대한 또 하나의 잘못된 판단을 내려서는 안된다. 그것은 양심이 우리들의 인간성과 영혼을 구원해주지는 못한다는 사실이다. 즉 양심은 도덕과 윤리 문제에 있어 최고 최후의 심판 이 기는 하나 그 인간의 구원과 영원한 문제의 해결을 줄 수는 없다는 것이다. 우리들의 양심은 무엇보다도 귀하다. 그러나 양심의 죄를 씻어주며 무거운 죄책에 허덕이고 있는 인생의 짐을 풀어주는 것은 아니다. 영원에의 기대와 구원에의 가능성은 양심의 문제를 넘어서 있는 보다 높은 과제인 것이다. 그 때문에 모든 종교가들은 양심보다 귀한 신앙을 말한다.
인간이 도덕적인 문제로 끝난다면 양심은 무엇보다도 귀하다. 그러나 인간이 종교적인 기대를 가진다면 신앙은 양심보다 더 귀한 것이 될 것이다. 양심을 버리는 것이 아니라 양심에 빛을 주면 구원을 약속하는 것이 신앙인 때문이다.
‘물은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하심으로 말미암아 이제 너희를 구하는 표니 곧 세례라. 육체의 더러운 것을 제하여 버림이 아니요, 오직 선한 양심이 하나님을 향하여 찾아가는 것이라. 벧전 3:21’
진정으로 바로 살기를 원하고 인간답게 살기를 원하는 사람은 어쩔 수 없이 하나님의 기준이 무엇인가? 거기에 관심을 기울일 수밖에 없다. 그래서 인간 양심보다 한 단계 올라가서 인간의 삶의 기준이 되는 것을 우리가 일반적으로 말하면 종교적 양심이라고 하는 것이고, 성경에서 말씀하신 그대로 하면 이것이 하나님의 양심이다.
인간의 양심은 시대와 상황에 따라 변하니까 신은 어떤 양심을 가지고 우리에게 어떻게 살기를 원하는 가에 대하여 관심을 갖게 되었고, 그래서 인간은 종교 양심을 가지게 되었다. 그 기준을 신에게 두기를 원하게 된 것이다. 이렇게 하나님의 양심을 내가 내 삶의 양심으로 받아들일 때 그것을 바로 신앙 양심이라고 한다.
양심,그리고 종교적인 신앙적 양심, 이러한 양심들은 우리 인간들에게 절대적으로 필요하다. 그 이유는 선하고 올바르게 살며, 질서있고 정의로운 세상과 사회를 이룩하고 이어가기 위해서다.
그러나 기득권자들에 의해 정해지고 강요되는 도덕과 윤리, 그리고 인간의 양심이 올바른 삶의 기준이 될까? 삼강오륜의 윤리와 도덕적 가치는 이미 땅바닥에 떨어진지 오래되었고, 소를 훔친 도둑놈의 양심이 바늘을 훔친 좀 도둑의 양심을 힐란하고 있다. 인간들은 복지사회의 안정과 관리를 위해 법을 만들지만, 화인(뜻 풀이= 성경말씀, 딤전 4:2 자기 양심이 화인 맞아서 외식함으로 거짓말 하는 자들이라. 화인의 뜻 ~ 이 단어의 어원을 찾아 올라가면 뜨거운 열 도장을 찍는 다는 의미의 언어로 나온다. 뜨거운 쇠로 사람을 지지는 무서운 고문들이 자행되었던 일들이 과거엔 많았었다. 지져진 곳은 감각을 느끼지 못하게 하듯이, 옳지 못한 행동을 하여도 더 이상 죄책감을 느끼지 못할 정도로 양심이 무감각한 상태를 가리키는 말이다) 맞은 양심은 법치를 피하는데 빠르고, 자유를 외치지만 한편으로는 방종을 일삼으며, 의를 원한다면서 악행을 저지르는 일에 주저하지를 않는다. 그래서 의인같은 죄인이 죄인같은 의인을 죽여 온 것이 우리네 인간들이 저질러 놓은 피의 역사인가 보다. 문학 작가 / 탬파거주 myongyul@gmail.com.> 1435/2024121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