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명열칼럼> 옛날 내 고향 사랑방 이야기
농번기(農繁期)는 농촌에서 농사철로 바쁘게 돌아가는 시기를 일컫는 말이다. 농번기의 시기는 주로 봄철인 4월부터 가을 추수철인 11월까지 이며 이 시기가 되면 농촌의 농민들은 바쁘게 농사일에 종사하며 밤낮없이 작업에 돌입한다.
봄이 되면 파종을 하여 새싹이 트는 시기이고, 여름철이 되면 농작물이 자라는 시기이기 때문에 이때 들어서 농촌은 바쁘게 움직이게 되는데, 고령화된 농촌의 특성상 군장병이나 농촌소재 학생들이 농번기 농사를 지원해주기도 한다. 때문에 산업화 이전에는 농번기 방학도 있었다. 나의 어린시절 국민학교 다닐 때 보리수확 할 때는 1주일정도 농번기를 돕는 맥추(麥秋)방학이 있고, 가을의 벼 수확 철에는 가을방학이 1주일정도 학생들에게 주어져 바쁜 농촌의 일손을 돕도록 배려했다.
유럽과 미국, 중국에서 9월 학기제를 시행하는 것도 농번기인 여름에는 학생들이 농사일을 도와야 하기 때문에 가을에 새 학년을 시작한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든다. 이렇게 바쁘디 바쁜 농사철이 끝나면 곧바로 농한기(農閑期)가 시작된다. 농한기는 대개 11월말 또는 12월부터 다음해 3월말 까지를 농한기라고 한다. 농한기가 되면 동네사람 남정네들은 긴 겨울밤 따끈하게 불을 지핀 사랑방에 모여앉아 새끼를 꼬고 가마니를 짜며, 때로는 소코뚜레도 만들면서 구수한 옛날이야기며, 세상 돌아가는 이야기들로 밤새는 줄 모르며 이야기의 꽃을 피운다.
이러한 동네 사랑방 말고도, 각 가정 집은 많은 집들이 사랑채를 갖고 있다. 초가삼간일망정 사랑채를 필수적으로 두어온 게 우리 조상들의 과학구조였다. 안채가 안주인의 차지라면 사랑채는 바깥주인 전용의 거처이면서 손님을 대접하는 응접실 구실도 함께 했다. 안채와 동 떨어진 대문 가까운 곳에 있는 사랑채는 마루를 낀 사랑방 하나만 하면 훌륭했다.
사랑방에 부엌이 딸리기도 했지만, 대체로 군불을 땔 수 있는 아궁이만 있었고, 우리 집의 경우 소죽을 끓일 수 있는 커다란 가마솥이 걸려 있었다.
그 가마솥에는 소죽만 끓이는게 아니라 솥을 깨끗이 닦아내고 목욕물을 데워서 광으로 퍼 날라 목욕을 하곤 했다. 또한 사랑방은 나그네를 위한 숙소로 귀한 손님을 맞는 응접실로 구실을 다했다. 먼 길을 가던 나그네가 날이 저물어 하룻밤의 신세를 지는 곳이 사랑방이었다. 돈 보다는 인정을 더 소중하게 생각하던 나의 아버지와 할아버지는, 지나가는 낯선 길손 이라도 어서 들어오라며 얼어붙은 몸을 녹게 아랫목을 양보해 주었고, 생솔가지를 부엌 아궁이 가득히 쳐넣어 군불을 지펴 추위에 얼어있던 몸을 훈훈한 인정과 함께 따뜻하게 녹여 주었다. 그리고 안채의 나의 어머니에게 부탁하여 소찬이지만 정성껏 음식을 준비하여 허기를 면하라고 저녁상을 차려 주기도 했다.
어쩌다 손님이 드는 날이면 아버지가 계신 사랑채는 이방 손님과 더불어 두런두런 이야기 꽃을 피우며 밤새 석유등잔불이 오래도록 켜져 있었다. 나의 생각과 추억으로는 울 아버지는 나이 45세가 되시면서 노인대접? 을 받고 사랑채로 거처를 옮기셨다. 전에는 사랑채를 별채라고 불렀으며 별채에는 안방과 윗방에 누나와 형님이 사용했고, 이후 아버지가 사랑채를 쓰면서 누나와 형은 윗방과 건너방으로 거처를 옮겼다. 나의 아버지가 별채를 독차지 하시면서 이때부터 사랑채 라고 부르게 되었다. 아버지가 사랑채를 쓰시면서, 쫓겨난 것인지, 스스로 택한 것인지는 모르겠으나 사랑채로 거처를 옮김으로서 없었던 위엄도 갖추어졌고, 담뱃대도 곰방대에서 장죽으로 한자정도 늘렸다. 그리고 이웃 사람들도 어머니에게 아버지를 칭할때 ‘바깥양반’에서 ‘사랑방 양반’으로 바뀌어 부르게 되었다.
사랑방에는 질화로가 있어서 겨우내 빨간불이 붙어있었고, 심심한 아버지는 동네 친구들을 불러 바둑이나 장기를 두고, 어머니가 햅쌀로 빚어 만든 쌀 막걸리나 동동주를 들며 술추렴을 하기도 했다. 이상은 우리집 사랑방에 얽힌 이야기를 했는데, 이번에는 동네 사랑방 이야기로 옮겨 가겠다.
동네의 사랑방중 넓은 방이 있는 곳은 젊은이(총각)들의 놀이터로서 화투나 골패를 치기도 했고, 가마니와 새끼를 꼬면서 라디오에서 흘러나오는 유행가나 연속극, 드라마에 귀를 귀울이기도 했다. 1050년대 중반 경 나의 어린 시절 고향마을 사랑방 풍경 이야기를 설명하고 있는데, 그때 그 시절에는 라디오도 귀해서 동네에서 라디오를 갖고 있는 집이 50여 가구 중 서너집에 불과했다.
그 당시에 유행하던 대중가요는, 엽전 열닷냥(한복남), 백마야 우지마라(명국환), 처녀 뱃사공(황정자), 단장의 미아리고개(이해연), 앵두나무 처녀(김정애) 등등, 많은 유행가들이 있었다. 그중에 특히 대중들에게 많은 인기를 끈 노래 중의 하나가 앵두나무 처녀였다. 너나 할것없이 술판이 벌어지면 젓가락 장단에 어깨춤을 추며 신나게 불렀던 노래다. 이 노래가 유행되던 시절, 한국 역사의 통증과 눈물, 많은 처녀, 총각의 이산이 이 나라 산업화의 시작이 되기도 했다.
‘앵두나무 처녀’ 노래는 한국전쟁(6.25전쟁) 휴전 2년 뒤인 1955년에 만들어 졌고 이듬해인 1956년에 음반으로 만들어져 김정애라는 가수가 노래를 불러 대 히트를 친 유행가다. 김정애는 예명이고 본명은 김정순 씨로 1935년 상명여고를 졸업한 엘리트 가수였다. 그러나 그녀는 1987년 7월22일 53세 나이로 간경화로 세상을 떠났다. 그녀는 이렇게 한 많은 이 세상을 떠났으나 그 당시(1956년 이후) 앵두꽃이 핀 봄날, 봄을 맞은 처녀들은 설레는 가슴을 억제 안고 우물가에 모여앉아 쑥덕거리며 도시로 튈 궁리를 한다. 물동이를 주며 물을 길어오라는 엄마의 심부름은 잊어버리고, 물동이를 팽개치고, 오늘 밭매기에 쓸 호미자루 까지 내 던져버렸다. 찾아갈 이도, 반겨줄 사람도 없는 서울이란 도시를 향해 동네 처녀들이 집단 가출을 한 것이다. 밤이 되어 바쁜 하루의 농사일을 마치고 동네 사랑방에 모여든 총각들은 동네 사는 신부감들이 서울로 무작정 상경해 실종된 사실을 알고 아연실색, 석유등잔불 곁에 모여앉아 턱을 괴고 땅이 꺼져라 한숨만 푹푹 내 쉰다. 올 가을엔 장가간다고 철석같이 믿고 있었는데, 닭 쫓던 개가 지붕 쳐다보는 격이 되었다.
지금이면 몰라도 1956년대의 서울이란 곳이 무지랭이 촌것 들이 뛰어들어 살아 내기엔 녹록한 곳이 아니었다. 너무나 힘겹고 몰인정 하고 거친 곳이었다. 모두들 제대로 먹고 살게 없어서 환장하던 시절이었다. 결국 순진한 시골내기 촌 처녀가 내동댕이 쳐 진자리가 ‘에레나’란 흔한 이름 달고 니나노집(술집)에서 작부 노릇하는 곳이다. 졸지에 신부감을 잃은 복돌이 총각은 묻고 물어 천신만고 끝에 에레나를 찾아냈다. ‘이딴짓 할려고 니 서울 올라왔나? 응?’ 눈물 펑펑 쏟는 금순이 손잡고 다시 고향 가는 하행선 열차를 탔다.
한 커플은 이렇게 우여곡절 끝에 고향마을로 되돌아 왔지만, 이쁜이와 삼룡이 커플은 영원히 만나지 못했다. 서로 다른 서울에서 식당 일을 하는 이쁜이와 지게꾼으로 언덕을 오르는 삼룡이는, 결국에는 대한민국 경제의 중심에 남아, 전후 잿더미 경제를 일으키는 기적의 주역들이 된다.
나의 어렸던 시절 학교에 오가면서 동무들과 합창하며 소리높이 불렀던 그 시절 그 노래가 그리워진다. 앵두나무 우물가에 동네처녀 바람났네 / 물동이 호미자루 나도 몰래 내 던지고 / 말만 들은 서울로 누굴 찾아서 / 이쁜이도 금순이도 단봇짐을 쌌다네. / 석유등잔 사랑방에 동네총각 맥 풀렸네 / 올 가을 풍년가에 장가들라 하였건만 / 신부감이 서울로 도망갔으니 / 복돌이도 삼룡이도 단봇짐을 쌌다네. 서울이라 요술쟁이 찾아갈곳 못 되더라 / 새빨간 그 입술에 웃음파는 에레나야 / 헛고생을 말고서 고향에 가자 / 달래주는 복돌이에 금순이는 울었네.
가사에 나오는 단봇짐은 요즘엔 잘 쓰지 않는 말이다. 단보(單褓)에 싼 짐이 단봇짐인데 단보는 홑겹의 보자기나 한 덩어리로 싼 보자기 짐을 말한다. 거기엔 무거운 것을 넣을 수 없고 많이도 넣을 수가 없다. 그러다보니 당장에 필요한 것만 넣어서 꾸릴 수밖에 없다. 사실은 가지고 갈 것조차 별로 없건만, 그래도 야반도주 하는 처녀들이니, 뭘 넣고 가야 할지를 고민깨나 했을 것이다. 그녀들은 그렇게 서울로 줄행랑을 치고 있을 때, 아무것도 모르고 동네 사랑방에 모여 잡담이나 하고, 누구네집 닭이나 훔쳐와(서리 해와) 막걸리와 곁들여 거나하게 걸칠 생각만 하던 동네 총각들은 아닌 밤중에 날 벼락을 맞은 꼴이 됐다.
겨울이 저물어 가는 이맘 때, 그 옛날 나의 고향에서는 사랑방에 모여 동네사람들이 애환을 나누고 농사일을 의논하고 새끼 꼬고, 가마니 짜며 끈끈한 인간관계를 이어 가는 장소였다. 그 당시 어린시절의 사랑방은 잊을수 없는 추억이고 정(情)이었다.
이제는 사랑방은 사라지고 마을회관에 노인정이 들어서 어르신들의 놀이터가 되었다.
유년 시절 고향마을 사랑방 풍경은 사라졌지만 우리동네 고향냄새, 할아버지, 아버지 담배냄새, 일꾼들의 땀 냄새와 구수한 옛날이야기, 가마솥에 쇠죽 끓이는 냄새가 아직도 가슴깊이 서려있다. 사랑방은 나의 어린시절 추억의 산실이었고, 그 정겨운 이름 때문에 오랜 세월이 흘러간 지금도 가슴속에서 사랑방 이란 구수하고 흙냄새 물씬 풍겨나는 그 단어를 잊지 못하고 있다.
한잔의 동동주에 고향의 얼이 담겨 있는 듯, 그 얼을 마시고 취하고 픈 마음들이 어찌 동동주에만 취하고 싶을까. 우리네 고향마을 사랑방 모습에 향수(鄕愁)에 젖어 옛 시절을 잠시 뒤돌아 본다. 문학 작가 / 탬파거주 myongyul@gmail.com.> 1434/2024121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