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명열칼럼> 정서가 메마른 세상.
우리들이 살고있는 현대의 도시생활은 곧 단절(斷絶)의 생활정서(情緖)라고 단정하는 사람도 있다. 그 이유는 현대 도시에는 사람은 많은데 친구가 없으며 집은 많은데 이웃이 없다는 이야기다. 친구의 기준이나 이웃의 개념을 어떻게 정하고 하는 말인지를 잘 알 수가 없는 일이어서 그 정도의 이야기로는 긍정도 부정도 할 수 가없다.
그러나 오늘의 도시 생활은 옛날의 시골생활에서 볼수 있었던 그러한 친구와 이웃을 기대하기가 어렵게 된 것만은 틀림 없는 현실이다.
옛날의 시골에는 어려운 친구를 위하여 대신 부역(賦役)을 하여주는 사람도 있었고 어쩌다 팥죽이라도 한번 끓이게 되면 담 넘어 이웃과 나누어 먹던 그런 인정도 있었다. 그리고 어느 한 집에 경사가 있으면 그것은 곧 동네 경사이고, 한 사람의 슬픔은 곧 온 동네의 애사(哀史)가 되었다.
그래서 좋은 일은 즐거운 마음으로 언짢은 일은 측은한 마음으로 서로 돕고 아꼈다. 그러다보니 이웃은 사촌이요, 친구는 형제라, 이런 곳에서는 꼭 가까운 육친이나 일가가 없다고 하여도 외롭지 않게 살아 갈 수가 있었다. 그야말로 단절된 인 우일가(隣友一家)라 하여도 과언이 아니었다. 그러나 오늘의 도시 정서는 그렇지가 않다. 곳곳에 이웃은 있어도 담을 넘나드는 인정이 없고 날마다 만나는 사람은 많아도 어려움을 의논할 수 있는 친구는 드물다. 그러기 때문에 현대 도시에서의 이웃은 다만 동일 구역내에 있는 가정일 뿐이며 친구라고 하여도 그것은 이해를 쫓아 모였다 흩어졌다 할 뿐, 상부상조 하는 우정은 그리 흔하지가 않다는 것이다.
나살기도 바쁜 세상에 내 집에서 내가 살고, 내 것 갖고 내가 먹고, 내가 입고 내가 쓰면 그만이지 언제 이웃찾고 친구 찾고 하랴 하는 것이 현대 도시에서 사는 대부분 사람들의 사고라고 하겠다. 그러나 자연 이웃을 생각한다거나 다른 사람을 돕는다거나 하는 일은 기대하기가 어렵게 돼 버린것은 당연한 사실이 되고 만다.
인류의 문명이 여러가지 분야에서 고도로 발달한 오늘날에 와서 우리 인간들의 생활이 다분히 편리하게 된 것은 틀림없는 사실이다. 훌륭한 과학기술은 인간생활을 여러모로 안정되고 풍족하게 하여주고 있다. 그리고 이런 혜택은 도시일수록 더 빨리 많이 받고 있으며 도시생활은 확실히 그런 혜택을 더 받고 있어서 많은 사람들로부터 동경의 대상이 되고있다. 시대적 조류가 이렇게 됨에 따라 사람들은 대대로 물려온 아름다운 시골 산천을 등지고 도시로 모여들게 되었고, 그렇게 하여서 도시로 나온 대부분 사람은 도시생활에서 보람을 느끼면서 살게 되었다.
이런 현상이 전철 후 감(前轍 後 鑑)이 되어 도시로 밀려오는 인파는 더욱 늘어나게 되어서 이제 어떤 도시는 더 늘어날수 없을만큼의 큰 도시로 늘어나고 그런 현상은 또 그런 대형 도시의 주변에 새로운 위성도시와 군을 늘어나게 하여 너무나 많은 사람들 가운데서 살게된 도시인은 이제 사람을 지겨워 할 만큼 사람이 많은 것에 질리고 있는 현실이다.
그러니 언제 이웃을 생각하고 친구를 돕고 할 겨를이 있겠는가? 더구나 다른 사람의 빈곤이나 건강, 그리고 문맹을 거들떠 보기나 할수 있을 것인가? 무지와 질병과 기아, 그리고 편협과 같은 암흑만이 인간 세계에 남아나도 거기에 생각을 돌리지 못하는 도시인들의 인정이 메마른 생활에서 우리는 무엇을 기대할 수 있을 것인가?
이런 현상이 바로 오늘날의 사회를 분열시키는 양극화와 이기주의적 요인이 되는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하게 될 때가 많다. 이웃을 이해할 줄 모르는 사람들은 다만 자기 이익만을 추구할 뿐이다. 이렇게 자기의 소망만이 있고 다른 이에 대한 이해가 없는 사회는 다만 경쟁만 있을 뿐이다.
오늘날의 도시생활이 따뜻한 이웃이 없다고 하는 것도 생각해보면 도시생활을 하는 우리 자신이 전혀 다른 사람을 생각하려고 하지 않는데서 온 자연적 귀결에 지나지 않는 것이다. 전 세계 인류의 3분의 2에 해당하는 많은 사람들이 편협과 기아와 질병과 문맹으로 말미암아 인간다운 대접을 받지못하고 무수한 고통을 받고 살고 있다는 것을 인식할 때 이런 도시인들의 생활방식과 인정 어린 의식이 점차 개선되어 갔으면 하는 바람이다.
꽃을 보고 아름답다고 느끼지 못하는 사람은 감정이 메마른 사람이다. 사랑을 받고 있으면서도 행복한 감정을 느끼지 못하거나, 기뻐할 일이 생겨도 기쁜줄 모른다면 정서적으로 문제가 있는 사람이다. 친구가 불행한 일을 당하면 함께 걱정하고, 기쁜 일을 만나면 함께 기뻐할 줄 아는 게 사람의 도리다. 그런데 세상이 이상하게 돌아가고 있다. 친구나 이웃에 좋은 일이 생기고 사업이 번창해 잘 살게 되면 축하해주고 함께 기뻐하는게 정상인데, 함께 축하해주고 기뻐해주지 못하고 시기 질투 한다면 이는 정상적인 사람의 감정이라고 할 수 있을까?
정서(情緖)란 사람의 마음에 일어나는 여러가지 감정 ,혹은 감정을 일으키는 기분이 나 분위기를 일컫는 말이다. 이러한 정서는 비교적 강하게 단시간 동안 계속되는 감정으로 희노애락, 애증, 공포, 쾌고(快苦)등과 같은 감정이다. 그런데 이러한 정서가 어떻게 성숙하고 발달할까? 정서란 경험을 통해 얻어지는 감정이다. 그런데 경험을 빼앗아버리면 성숙하고 다듬어져야 할 정서가 메마르고 삭막해지는게 정상이다.
지금 세상에 보면 가정이나 학교조차 아이들의 정서 교육을 외면하고 있다. 기쁠 때는 기뻐하고, 슬플 때는 슬퍼할 줄 알고, 감사하고 만족하고 행복해 하고 사랑하고….
이런 감정이나 정서를 가꾸고 다듬어야 할 책임이 있는 교육을 포기하고 있는 것이다.
우리 말 속담에, ‘낚시는 하되 그물질을 안 하며, 자는 새에 주살을 쏘지 않는다’라는 말이 있다. 우리는 흔히 인정이 각박한 요즈음의 세태를 향해 정서가 메마른 세상이라 하고, 같은 뜻으로 자기만을 생각하고 남을 돌아보지 않는 극도의 이기적인 사람에 대해서는 피도 눈물도 없는 사람이라고 말한다. “정서가 메마른 세상” 이라고 할 때의 정서는 인간의 정서중에 주로 희비애락을 뜻하고 피도 눈물도 없는 사람이라고 할 때도 피는 애정을, 눈물은 슬픔을 뜻하는 것으로 결국 정서가 메말랐다는 말은 인간 생활에 있어 상호간에 슬픔과 애정(사랑)을 경우나 처지에 맞게 서로 나누고 공감할 줄 모른다는 뜻이라 하겠다.
정서를 유교에서는 칠정(七情)이라 하여 희(喜), 노(怒), 哀(애), 구(懼), 또는 락(樂), 오(惡), 욕(慾)을, 불가에서는 희, 노, 우(憂), 구, 애, 증(憎), 욕을 논하여 왔으며 현대의 심리학이나 정신분석학에서는 보다 논리적이고 체계적인 이론의 정립하에 흥분, 쾌(快), 락, 희, 애정, 불쾌, 노, 혐오, 구, 질투와 정서의 부적응 증 등으로 보다 세분화해서 논하고 있다. 이처럼 인간의 정서를 봄에는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다소의 차이는 있으나 대동소이함을 볼수 있다. 이는 결국 정상적인 사람은 누구나 이 7~10정(정서 부적응 증을 제외한)의 정서를 갖고 있으며 또 이것을 상황과 처지와 시기에 맞게 적절히 발하는 것이 정상적인 사람이요, 나아가 바람직하고 이상적인 사람이라 하겠다. 일찍이 동양사상을 지배해온 중용에서도 희노애락이 아직 발하지 않은 것을 중(中)이라 하고, 발해서 모두 절도에 맞는 것을 화(和)라 하니 중은 천하의 근본이요 화는 천하의 도(道)다 라고 하였다.
이렇게 보면 정서가 메말랐다, 피도 눈물도 없다라고 개탄하는 것은 정서를 올바르게 행하지 못하고 나의 기쁨은 자랑스럽고 남의 기쁨은 내 알바 아니며, 불의에 대한 의리의 분노가 아닌 자기 불만에 대한 원망의 노함을, 나의 슬픔은 분하고 억울함 인데 남의 슬픔은 당연 함으로, 인간의 도리에 어긋남에 대한 두려움보다 자신의 이익과 안일에 대한 두려움을, 나를 사랑함에는 양보없이 적극적이나 남을 사랑함에는 소극적 무관심으로, 사람의 도리에 벗어난 행위를 미워하는 것이 아니라 사욕을 충족하는데 방해가 됨을 미워하며, 선을 행하고 공변된 일을하고자 함이 아니고 사욕을 충족시키기 위한 욕망으로 가득 찬, 즉 정서의 바람이 절도에 맞지 않기 때문이라 하겠다.
물론 사회인들 전체가 다 그렇다는 것이 아니라 그러한 경향으로 도도히 흐르고 있는 세력이 있어 미래가 염려가 되어 뜻있는 사람들이 하는 고언이다.
이와 같은 부정적 정서의 발현은 아마도 물질만능의 물신주의에 익숙한 천박한 물질만족의 쾌락주의와 전체 속에, 내가 아닌 나 다음에 전체라는 왜곡된 이기주의에서 발생된 탐욕과 가진자와 못가진자, 사용자와 고용자, 기득권자와 대기자, 구세대와 신세대 등으로 사회가 극도로 대립된 양극화 현상에서 파생한 적대감의 불행한 사회의 탁류현상이 아닌가 생각된다.
이 같은 현상이 일어나게 된 1차적인 책임은 어찌되었건 국가(정부)와 사회 지도층이 책임져야 할 것이다. 황하는 맑아질 수 없다는 백년하청(百年河淸)의 말이 있기는 하나, 우리 하천(사회)의 탁류는 자정능력에 의해서도 맑은 물이 되어 회복될 수도 있다.
그렇게 되면 기쁨과 슬픔을 함께 나누고 불의에 분노하며, 악을 미워하고 사회가 탁해짐을 염려하며 모든 일에 사랑을 베풀기를 노력하는 올바른 정서를 가진 사람들이 많아 질 것이니, 그렇다 보면 여기가 사람살기 좋은 유토피아가 아니겠는가? 사람들의 정서가 풍부해지면 우리들의 사회는 더욱 풍요로워지고 사랑이 넘치는 복지사회가 이루어 질 것이 자명하다. 나만 생각하고 챙기는 이기주의자가 아니라 남을 먼저 생각하고 자선을 베푸는 이타주의자가 되길 우리 모두가 노력한다면 우리들의 사회는 보다 아름답고 살기좋은, 정서가 메마르지 않는 풍요로운 사회가 될 것이다. 문학 작가 / 탬파거주 myongyul@gmail.com.> 1432/2024112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