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명열칼럼> al국에서 이민생활, 힘들었으나 보람도 있었다.
평소 가끔씩 서로 연락을 주고받으며 가깝게 지내는 L씨, 작년에 그는 자기의 친 동생을 시민권자의 형제, 자매 케이스로 미국에 이민을 오도록 주선을 하며 그 동생이 미국에 와서 함께 살기를 바랐으나, 그 동생의 대답인즉 한마디로 “No thankyou=싫다”는 말로 정중하게 거절? 당했다고 한다.
미국에는 L씨의 노모가 계시고 장남인 L씨는 어머니를 정성껏 효심으로 모시며 시카고에서 살고 있는데, 그 어머니 말씀이 자기 죽기 전에 둘째아들이자 막내인 L씨의 동생을 미국에 초청 이민을 해서 가까이서 살기를 원했지만, 서울의 강남 부촌에 살고 있는 둘째 아들은 한국이 좋아서 오지 않겠다고 했단다.
그는 현재 한국의 모 대기업 회사의 임원으로 재직하고 있으며, 강남에는 싯가 30억원이 넘는 고급 아파트를 소유하고 있다고 한다. 좋은 직장에 값비싼 고급 아파트를 갖고 있는 그는 명실공이 한국에서는 부자 그룹에 속해있다. 그러한 그가 그렇게 좋은 직장과 집을 버리고 이민생활이 힘든 이곳 미국에 오는 것은 어불성설 이라는 생각이 든다.
현실적 측면에서 한국에서 웬만큼 잘 살고 있는 사람들은 이곳 미국이 아무리 살기 좋은 나라라고 하더라도 절대로 오지 않는다. 옛날 1960~70년대는 한국사회가 불안정되고 먹고살기도 힘든 상황에서 그곳을 탈피하기 위해서도, 열심히 노력하고 일하면 일한만큼 노력의 댓가가 지불되는 미국으로의 이민을 선호하고, 한때는 붐이 일어나기도 했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꿈과 희망을 안고 American Dream을 이루기 위해 너도 나도 이민행렬에 줄을 서기도 했다. 나 역시 그들 일원의 한 사람으로서 1970년대 중반, 부푼 꿈과 희망속에 미국으로 이민을 왔다. 그 당시 미국으로 이민을 오는 사람은 마치 선택을 받은 사람처럼 한국 사회에서는 선망의 대상이 되기도 했었다.
그 당시의 한국은 외환보유고도 부족하고 나라도 살기가 어려워 미국으로 이민 오는 사람들은 고작 100~300달러에서 많아야 1천달러 정도를 호주머니에 넣고 수만리 타국 땅, 낯설고 물설고 꼬부랑글씨를 쓰는 미국 땅에 마치 홀씨가 바람에 날려 와 박토에 씨를 뿌리고 싹을 틔워 내듯 힘들고 어렵게 갖은 고생과 역경을 감수하며 오직 자식들의 미래를 위해 헌신과 희생을 강요당하며 힘겨운 이민 생활을 이어 갔다.
특히 1960년대와 70년대에 이곳으로 이민을 온 이민 1세대들은 80~90년대 이민을 온 사람들보다 몇배나 더 고달픈 초기 이민생활을 한 미국 이민의 선배들이다. 아마도 지금 한국에 살고 있는 사람들에게 이러한 과정을 겪으며 이곳 미국에 와서 이민생활을 하라고 하면 그것을 감내하며 이곳에 와 살아갈 사람들은 그리 많지 않을 것이란 생각이 든다.
이민 1세들은 말도 통하지 않는 이국땅에서 오로지 자식들 교육과 먹고 살기 위해서 투잡, 쓰리잡을 뛰어가며, 고작 잠은 2~3시간 눈을 붙이는 등 마는 등, 눈을 감았다 뜨는 빠른 시간속에 몸이 부서져라 열심히 열심이 노력하고 일만 하였다. 밤과 낮이 바뀐 삶을 살며 자녀를 부양하고, 이 땅에서 태어나고 자라며 교육을 받은 주류사회 사람들에 비하여 출발은 아주 미약했지만, 몇십년이 흐른 오늘날에는 대부분의 한국인들은 미국 땅에 뿌리를 깊게 내리고, 성공하고 잘된 자녀들의 자랑스런 삶을 보람으로 삼으며 그러한 성취 뒤에 숨겨진 눈물과 애환을 목구멍 깊숙이 넘기고 있다.
이어서 오늘은 한국인들의 미국 이민역사에 대해서도 추가로 설명을 드리고자 한다.
36년간의 일제 식민지를 벗어나 해방이 된 것은 1945년 8월15일이었다.
그 후 어수선한 한국사회가 요동치며 흘러가고 있을때, 1950년 6월25일 북한의 김일성이 남한(대한민국)을 불법 남침하게 된다. 광복 이후, 미군정과 6.25전쟁을 겪으면서 우리나라에는 약 4만명의 주한 미군이 주둔하게 된다. 주한미군은 많은 수의 우리나라 여성들과 결혼을 하였는데, 이에 따라 많은 한인여성들이 남편과 함께 미국으로 이주 하였다. 사실 미국으로의 이민은 주한 미군과의 관계속에서 시작되었다. 당시의 한국사회는 국제 결혼에 대한 편견이 심했기 때문에 많은 한인 여성들이 남편과 함께 미국으로 이주하였다.
1950년부터 1964년 까지 약 6천여명의 여성이 미군의 배우자로서 미국으로 건너왔다. 또한 1950년부터 2000년까지 미군의 배우자로서 이민을 온 한인여성은 10만여명에 달했다. 1950년대에는 전체 한국인 이민자의 36%를, 1960년대에는 42%를 차지할 정도로 중요한 집단이었다. 아울러 6.25전쟁으로 많은 전쟁고아와 혼혈아들이 생겨나자 한국정부는 1954년 해외입양 사업을 시작했다. 또한 해방 후 1965년 까지 6천명 가량의 유학생이 미국으로 와서 공부를 했다. 3년여동안 지속된 6.25전쟁은 우리나라 국민들에게 큰 상처를 남겼다. 가족을 잃은 아이들은 입양되기도 했지만, 대부분 동냥을 하거나 먹거리를 찾아 거리를 떠돌아 다녔다. 이러한 전쟁고아를 해결하기 위해, 미국의 원조로 어린이 보호시설이 운영되기도 했다.
이때 한국정부가 해외입양사업을 시작했고, 1950~1960년대에는 고아들이 주로 입양되었다. 1970년대부터는 고아들보다 미혼모 아이들이 많이 입양되기 시작했다. 1954년 이후 2002년 말까지 해외로 입양된 아이들은 약 15만명으로 추산되며, 이중 약 10만명이 미국가정에 입양되었다.
이 시기에 한인 이민의 또 다른 흐름은 유학생들이다. 해방후 1965년 까지 약 6000명가량의 유학생이 미국으로 유학 왔다. 하지만 적지않은 수의 학생들이 학위를 취득한 후 미국에 눌러앉거나 끝내 학위를 취득하지 못하고 미국에 정착하기도 했다.
이들은 미군과 결혼한 한인여성들과 마찬가지로 1965년 미국으로의 이민 문호가 개방되었을 때 가족들을 초청할 수 있는 연쇄 이민의 기틀을 마련했다.
1924년 동양인 이민 금지법령이 선포된 후 줄어들었던 미국행은 1965년 새로운 이민법이 발표되자 활발하게 진행되기 시작했다. 1965년 이후 미국으로 이민 온 한인들의 계층은 중산층 출신이 참으로 많았다. 1965년 이민 개정법이 발표되자 민족별 쿼터제가 폐지되었고 아메리칸 드림을 꿈꾸며 한인들이 대거 미국으로 이주하게 된다.
1970년 초 이후, 연 3만명 가량의 한인이 미국으로 이민을 가게 된다. 한인 이민의 정점을 이룬 1985년과 1987년 사이에 연 35000여명의 한인이 이민을 와서 한국은 멕시코와 필리핀 다음으로 미국에 이민을 많이 간 3대 이민국이 되었다. 하지만 한인이민은 1987년 약 38800명으로 정점을 이루다가 1998년 약 13700명으로 최저 수준까지 떨어졌다.
한국에서 대학을 졸업한 지식층이며 중산층이었던 한인 이민자들은 미국에서 언어적 장벽과 미국 교육과의 차이 탓에 미국의 주류사회로 편입되지 못하자 자영업을 통해 경제적 지반을 다져나갔다. 제한된 자본과 사업기술 때문에 당시 재미 한인들은 시카고의 남쪽, 뉴욕의 브루클린뿐만 아니라 특히 LA의 사우스 센트럴 같은 저소득층 흑인이 사는 지역에서 장사를 했다. 1997년 말 한국의 외환위기로 국내의 고용 불안정이 심화되고 일자리를 잃거나 고용에 불안감을 느낀 30~40대는 미국과 캐나다로 이민을 떠났다.
2000년에 접어들면서 한인이민은 이전보다 더 나은 삶을 위해 이주하였고 이 시기부터 자녀들의 미래를 위해 자신들의 삶을 희생하는 경향이 나타났다. 최근들어 재외동포재단의 자료에 의하면 미주한인 이민자 수는 260여만명으로, 혼혈가족과 합치면 그 수는 더욱 많을 것으로 추정된다.
우리는 생활의 나무에서 보람의 열매를 따려는 인생의 농부다.
모든 사람들은 인생을 보람있게 살기를 원한다. 보람있는 하루가 모여서 보람있는 한달이 되고, 보람있는 한달이 모여서 한해가 되며, 보람있는 한해가 모여서 보람있는 일생이 된다. 보람이 행복의 핵심 원리다. 행복한 사람이란 자기 생활에서 보람을 느끼는 사람이고 불행한 사람이란 자기 생활에서 아무런 보람도 느끼지 못하는 사람이다. 짠 맛이 소금의 주성분을 이루듯이 보람이 행복의 주 성분을 구성한다. 그렇다면 보람이란 무엇일까? 어떤 가치 있는 일, 어떤 의미가 있는 일, 어떤 좋은 일을 했을때에 마음속에 느껴지는 흐뭇한 정신적 만족감이다.
고생 끝에 낙이 온다는 말이 있듯이, 미국 이곳으로 이민 온 많은 한인이민 1세들이 이제는 일선에서 은퇴하여 보람의 열매를 맛보고 있다. 과거 힘들고 어려웠던 고달픈 이민생활이 오늘날 그것이 밑거름이 되어 자식들이 잘되고 성공한 것을 보노라면 공연히 기분이 좋아지고 흐뭇해진다. 힘들고 어려울 때는 한때 이민 온 것을 후회도 했지만, 꿋꿋이 견디고 인내하며 자식들을 위한 헌신과 희생이 헛되지 않고 오늘날의 결실을 안겨준 것에 커다란 보람을 느끼며 하나님께 감사를 드리고 있다. 물론 이민 온 모든 사람들이 다 꼭 이러한 보람과 만족을 느끼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그들의 소수보다 더 많은 다수가 이민의 보람을 느끼며 나도 무엇인가 내 힘으로 가치있는 일을 이루어 놓았다는 성취의 기쁨과 능력의 자신을 가지며 땀흘리고 수고하며 거두어들인 인생의 열매에 결코 미국의 이민생활이 헛되지 않았음을 새삼 인식하며 하나님께 감사의 기도를 올리고 있다.
<문학 작가 / 탬파거주 myongyul@gmail.com.> 1417/2024080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