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명열칼럼> 백수의 인생 이야기.

<김명열칼럼> 백수의 인생 이야기.

하루는 휴식을 취하고, 또 하루는 쉬고, 다음 하루는 놀고…. 이것은 어느 백수선생(?)의 매일매일의 일과표다. 매일 매일을 쉬고 놀고 먹고 휴식을 취하다보니 바쁘디 바쁜 나날을 보낸다고 너스레를 떤다. 이상의 이야기는 하는 일 없이 매일 매일을 무료하게 시간을 보내고 있는 어느 룸펜(Lumpen, 직업없는 사람이라는 뜻의 독일어다) , 소위 말하는 잉여인간(비속어)의 일상이다. 사회에서 어떤 역할도 맡지 못하고 누구도 필요로 하지 않는 남아있는 인간을 의미하는 말로 잉여인간이라고 하는데, 그와 비슷한 말로 하루종일 집(방구석)안에서 죽치고 앉아서 직업 없이 지내고있는 사람을 룸펜이라고도 한다.

룸펜보다 약간 급수를 높여서 부르는 사람을 우리는 흔히들 백수라고 한다.

나 역시 엄밀히 본다면 백수다. 현업에서 손을 떼고 은퇴를 하여 직업없이 집에서 쉬고 있으니 남들이 보기에 틀림없이 백수다. 그리고 또한 남들이 보기에 틀림없는 백수로 보이는 것은 검은머리가 없어지고 머리 거의 대부분이 흰 머리로 채워져 있으니 백수(白首)라고 할 수 있겠다.

“화백(화려한 백수)으로 지내고 있습니다” 몇년전 내가 회장을 맡고 있었던 모 한인단체에서 함께 취미생활을 했던 어느 회원께서 나에게 “회장님 요즘 어떻게 지내고 계십니까?”라고 문의한 안부 인사에 대한 답변이다. 백수생활을 한지가 꽤나 여러해가 지났건만 아직은 건강상으로나 심리적으로, 그리고 경제적으로 그리 큰 문제가 없으니 화백이라고 자칭 말을 할 만하다. 얼마 전 한인동포들을 위한 커다란 행사를 주관하면서 나의글을 애독하시는 어느 독자분께서 “작가님 명함 있으면 한장 주세요” 하며 손을 내밀었는데, 나는 나 자신을 알릴 명함이 없는게 백수의 비애라고 하겠다.

은퇴를 하기 전에는 000단체 회장, joo A 언론사 고정 필진, KT신문사 칼럼리스트, 문학작가 김 아무개 등등 명함의 종류도 몇개가 되었는데, 이젠 백수가 되고 보니 나 자신을 알릴 직함이 없는게 곤혹스러울 때가 있다. 다만 은퇴 후에는 본보 플로리다 코리아에 10여년동안 정기적인 칼럼을 연재하는 글을 써 올리는 일로 바쁘게 지내다보니 현직의 연장선상 같아서 낯설지 않다.

그러나 요즘은 나에게는 아무런 명함도 없다. 은퇴 후 백수로 지내다보니 명함이 없는 것이 오히려 자연스럽고 편하다. 왜냐하면 백수는 얼굴이 명함이기에……… 세상이 다양해지면서 자신의 활동에 직함을 붙이는 ‘나홀로 명함’이 부쩍 늘어나는 추세다. 대부분 소속없이 활동하는 전문분야다. 여러 가지 문제 연구소장, 경영연구소장, 등 이렇게 직함으로 저술과 강연활동을 펼치는 명사도 있다. 애주가 직함으로 술 관련 칼럼을 쓰는이도 있어 이색적이다. 언론사 여행 담당기자 출신들이 즐겨 쓰는 나홀로 명함의 직함은 ‘여행작가’이다. 전문성과 다양한 정보, 생생한 사진으로 두각을 드러낸다. 예전에 한국에서 어느 사람을 만났는데 건네주는 명함을 보니 ‘대한민국 보통사람 김아무개’란 명함을 새긴 호방하고, 어찌보면 영혼이 순수한 사람을 만난 적도 있었다. 이렇게 대부분의 사람들은 직업적으로 필요해 나홀로 명함을 만드는 이들과는 달리, 자신을 드러내고 싶어 안달하는 식자층과 노인층도 많은 편이다. 현시욕에 사로잡혀 자신을 알아주지 않으면 안절부절 못하는 ‘관심병 환자’ 수준이다.

허명(虛名)뿐인 직함이라도 만들어 자신을 과시해야 직성이 풀리는 ‘일그러진 영웅들’이 활개치는 모습을 보노라면 참으로 딱하고 측은하다. 특히 000단체회장 이라는 명함을 새겨 넣고 자기만족에 취해있는 소위 껍데기회장(감투나 명예를 위해 미쳐있는 사람)도 한인사회에 돋보기를 들이대고 보면 의외로 많다.

회원이라고는 한명도 없고, 아무것도 하는 일도 없는데 이름은 거창하게 ooo회장이다. 그래서 이런 사람을 보고 뒷전에서 손가락질하고 흉을 보는데도 정작 본인은 그것도 모르고 또라이가 되어 철판 깔고 다닌다.

지금세상을 흔히들 백수(白手) 양산 시대라고 한다. 이 말은 오래 사는 세상을 일컫는 말이 아니다. 99세를 의미하는 백수(白壽)가 아니고 맨손이란 뜻의 백수(白手)다. 보통 맨손 맨주먹을 이야기할 때 적수공권(赤手空拳)이라는 표현을 사용하나 직업이 없는 사람을 두고 우리는 맨손의 백수라 부른다. 나이가 차 정년에 도달하면 누구나 백수의 생활로 돌아간다. 과거보다 건강하고 오래 사는 세상이 되면서 요즘은 놀고먹는 사람들이 천지다. 노인인구의 증가가 가져온 새로운 사회변화다. 소득수준의 향상으로 그들의 생활도 비교적 윤택해졌고, 많은 사람이 개인별 편차는 있지만 사회보장연금(소시얼 연금)등 각종 연금으로 노후생활을 영위한다.

‘백수가 과로사한다’는 말도 정년으로 인한 은퇴인구의 급증이 만들어낸 신조어이다. 은퇴자는 퇴직하고 나서도 출근할 때처럼 잘 지내고 있다는 비유와 뜻으로 많이 사용한다. 은퇴후 허전해진 마음을 달래주려는 배려의 뜻으로 주고받는 말이다. 때가되면 누구나 백수로 돌아가야 하지만 한참 일해야 할 나이에 백수가 된다면 누가 봐도 딱한 노릇이다. 당사자의 답답한 심정이야 물론이거니와 백수가 된 자식을 바라봐야 하는 부모의 심정은 오죽할까 싶다. 사람은 나이에 맞게 때가되면 각자의 위치에서 제 일을 해야 사람의 도리도 하는 법이다. 어쩔수 없는 환경과 현실속에 비록 백수가 되었다 하더라도 마누라까지 포기한 불쌍한 백수가 되지는 말자. 퇴직 후 처음 얼마동안은 매우 바쁘다. 부부여행도 가고, 퇴직한 친구들과 취미활동도 도모하고, 동창회에도 얼굴을 내민다. 각종 의무감에서 해방된, 자유로움을 느끼면서 나름대로 자신이 꿈꾸던 이상적인 삶으로의 접근을 시도한다. 하지만 곧 대부분 무료하게 하루하루를 보내는 (백수)대열에 합류한다. 왜 일까? 백수가 과로사 한다. 퇴직(은퇴)한지 얼마 안되는 사람이라면 이 말에 크게 공감할 것이다.

‘어떻게 회사 다닐 때보다 더 바쁘다’고 푸념을 늘어놓는 사람도 적지 않다. 그런데 얼마 지나지 않아서 그 바쁜 일상이 직장 생활할 때의 바쁜 생활과 큰 차이가 있음을 알게 될 것이다. 직장생활 때는 그렇게 열심히 살다보면 무언가 성과가 보이고 금전적인 보상도 있었다. 하지만 퇴직(은퇴)후엔 보상은 커녕 지출만 생긴다. 삶의 만족감이 높아지기는 커녕 오히려 공허감만 남기기도 한다.

사람마다 내리는 답은 다를수밖에 없는 질문이지만, 나는 인생을 살면서 만족스럽고 보람을 매 순간마다 느낄 수 있도록 살아간다면 그걸로 충분하다고 믿고 있다. 이러한 만족과 보람을 느끼는 삶은 어느 시간에만 가능한 것도 아니고, 자신이 어떻게 사느냐에 따라서 인생의 시기와 무관하게 누릴 수 있는 가치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당연히 백수로 살아가는 기간도 내 삶의 한 부분이기에 우리는 만족하고 또 보람을 느끼며 살아갈수 있다. 여기에 어떤 특별한 방법이 있는 것은 아니다. 만족과 보람은 주관적인 성격도 가지고 있기에, 자신이 가장 만족하는 것을 매일 살아가면서 조금씩 해 나가는 것이 좋을 것이다.

가령 나의 경우엔 아침 일찍 일어나는 것에서 굉장한 보람을 느낀다. 일단 아침에 일찍 일어나게 되면 아무래도 하루를 더 충실하게 쓸 수 있고, 오늘은 어제보다 더 많고 다양한 것들을 해 볼 수 있다는 생각이 들어서일 것이다. 그래서 그런지 일어나는 시간과 잠드는 시간이 빨라지고 있다. 요즘은 밤10시가되면 잠이 들고 아침 6시쯤에는 일어나는 생활에 익숙해져 있다. 아침에 일어나면 제일먼저 하나님께 기도를 드리고, 간단한 몸운동(맨손 체조)으로 몸을 풀고, 잠시후 6시30분부터 시작하는 새벽예배

를 온라인으로 들으며 예배를 드린다. 이후 뜨거운 커피를 마시며 TV에서 나오는 뉴스를 시청하고, 아침식사 후에는 책을 읽고, 명상에 잠기기도 한다. 그리고 신문에 기고할 글의 원고를 쓰기도 한다.

다람쥐 쳇바퀴 돌듯 매일매일이 비슷하고 같은 일상이지만 그 속에서 나는 삶의 보람을 느끼고 행복을 느끼며, 이렇게 복된 삶을 주신 하나님께 매번 감사하는 마음으로 살고 있다. 이것이 평범한 삶의 일상이다. 아마도 보통 사람들의 일상이 다 이러할듯 싶다.

글을 쓰기란 정말로 어렵고 힘이 든다. 그러나 나는 그렇게 어렵고 힘든 글을 쓰는 것이 나를 가치 있게 만들어주는 하나의 목적이고, 삶의 보람을 영글게 해주는 밑거름이 된다. 나는 틈틈이 글을 쓰면서 내 삶의 한편에 보람이 쌓여가고 무언가 보이지 않게 무엇이 채워진다는 가슴 뿌듯한 기분을 느낄 때가 많이 있다. 그러나 어쩌면 수많은 분들이 읽고 있는 이 글에 “여러분들의 만족과 보람을 주는 일을 하면 행복합니다”라고 이야기를 마무리 하는 것은 하나마나 한 이야기라는 생각이 든다. 허지만 이따금은 글을 읽는 독자분들께서 다른 사람의 경험과 생각이 담긴 설명을 읽어보면서 자신의 생각을 바꾸거나 혹은 기존의 생각에 대한 믿음을 더욱 강하게 만드는데 글의 핵심적인 요소가 들어있다고 나는 생각을 한다. 그렇다면 나의 글쓰기가 특히 백수로 살아가는 어떤 분의 삶에 만족과 보람을 느낄 수 있는 계기가 될 수 있다면 나 역시 상당한 보람을 느낄 수 있을 것이다.

끝으로 우리는 다양한 환경속에서 백수생활을 시작하게 되었을 것이지만, 그럼에도 현실에 만족하고 무엇인가 자신만의 일을 한다는 것 자체가 지금의 삶에 만족과 보람을 더 해줄 가능성이 높다는 것이 나의 생각이다. 뭔가 일을 통해 기억이 쌓이고, 새로운 경험이 채워지고, 더해서 마음과 기분의 보람이 얻어진다면 나름대로의 백수생활도 그다지 나쁘다고 보지는 않는다.

<문학 작가 김명열 / 탬파거주 myongyul@gmail.com.> 1307/202204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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