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명열칼럼> 배가 고파 죽겠다. 목구멍이 포도청

<김명열칼럼> 배가 고파 죽겠다. 목구멍이 포도청

 

1934년부터 45년까지 뉴욕시장에 3번이나 당선돼 일했던 피오렐로 라과디아 시장이 그전에 법원에서 판사로 일할때의 이야기이다. 어느 가난한 노인 할머니가 빵을 훔친죄로 재판을 받게되었다. “잘못했습니다. 이혼한 딸은 병들어서 아파 누워있고, 손자들은 굶주리고 있어서 어쩔 수 없이 돈은 없고, 그래서 빵을 훔쳤습니다.” 할머니는 울면서 호소했지만, 판사는 벌금 10달러를 내라는 판결을 내렸다. 그리고 그는 이어서 말했다. “우리에게도 노인이 빵을 훔쳐야 하는 도시가 되도록 내버려둔 죄가 있습니다. 저는 10달러를 내겠습니다. 여기 계신 방청객들은 50센트의 벌금을 내십시오.”.

할머니는 판사가 낸 돈으로 벌금을 물고 방청객들이 낸 돈으로 손자들에게 줄 빵을 살줄 수 있었다. 도둑질은 나쁜 일이니 당연히 벌을 받아야한다. 하지만 병석에 누운 딸과 손자들이 굶고 있다면 누구라도 가만히 있을 수는 없었을 것이다. 따라서 판사는 사람들이 할머니를 도울 수 있도록 현명한 판결을 내린 것이다.

우리나라 속담에 “목구멍이 포도청‘이라는 말이 있다. 즉 그 말의 뜻은 먹는 입이 가장 무섭다는 뜻으로, 먹고살기 위해서는 무슨 짓이든 하게 된다는 의미이다. 포도청은 조선시대에 도둑과 같은 범죄자를 잡고 심문하는 일을 맡았던 관청이다. 또 범죄와 화재를 미리 막기 위해 성종 초에 처음으로 설치됐고, 중중때에 포도청이라는 정식 이름을 갖게 되었다. 왕은 서울과 경기를 좌우로 나눠 좌포도청과 우포도청을 뒀으며, 포도청의 우두머리를 포도대장이라고 불렀다. 1894년에 경무청이 생기면서 포도청은 사라지게 되었다. 포도청은 좋은 일로 가는 경우가 별로 없었기 때문에 백성은 포도청을 무섭게 여겼다. 과거 우리나라는 하늘만 쳐다보던 농경시대에 배불리 먹을 수 없었던 탓인지는 모르지만 우리나라에서는 먹는 것과 관련된 속담이 유난히 많다.

“수염이 석자라도 먹어야 산다” 또 “금강산도 식후경”이라고 하였다. 양반이 점잖을 빼더라도 배가고프면 다 헛일이고, 좋은 놀이도 배가 불러야만 비로써 흥이 난다는 뜻일께다. 먹을 때는 개도 안 건드린다 하여 먹는 행위 자체를 소중하게 여기고 있다.

목구멍이 포도청이라는 속담의 원래 뜻은 먹고 살기위해 해서는 안 될 짓까지 할 수 밖에 없다는 것을 의미하는 말로 조선시대에 범죄를 저지른 사람들은 지금의 경찰서에 해당하는 포도청에 잡혀가 갖은 고초를 당했는데, “목구멍이 포도청”의 목구멍은 배고픔을 뜻하는데, 포도청에 잡혀가더라도 먹을 것을 훔쳐 당장의 배고픔을 해결하겠다는 굶주린 백성의 어쩔 수 없었던 선택이었고 먹고살기 위해서라면 체면에 어긋나는 일이나 범죄까지 저지르게 된다는 속담으로 배고픔이 극에 달하면 포도청에 잡혀가 고초를 당하더라도 어떤일이든 못할게 없다는 말에서 유래되었다고 한다.

독일의 철학자이자 시인이었던 괴퇴는 “눈물 젖은 빵을 먹어보지않은 사람은 인생의 참다운 의미를 모른다”라는 명언을 남겼다.

눈물 젖은 빵은 가난이나 고통을 의미한다. 살다보면 즐거울 때보다 힘이 들 때가 더 많다. 고난이나 역경이 닥쳐올 때 어려웠던 시기를 극복한 경험은 삶에 큰 힘이 된다. 어떤 시련도 이겨낼 수 있는 자신감과 용기를 주기 때문이다. 인간에게는 여러 가지 참을 수없는 고통이 너무나 많다. 그중에서 가장 견디기 어려운 고통은 아마도 배고픔이 아닐까 한다. 왜냐하면 배고픈 것은 자신이 고통스러운 것이기도 하지만 옆에 있는 가족이 배고픈 것을 바라보아야 하는 고통이 있기 때문이다. 배고픔은 심지어 죽음과도 이어지는 경우가 많다. 굶어죽다 라는 말이 자연스럽게 이어지는 것도 배고픔의 심각성을 들려주고 있다. 우리나라 속담에는 배고픔과 관련된 것이 여러 가지 있다. 그래서 “사흘 굶어서 남의 집 담을 안 넘는 놈이 없다”의 경우에는, 듣는 사람에 따라서 오해가 발생하는 듯하다. 먹고사는 문제가 가장 중요한 것이기에 사흘을 굶게 되면 도둑질하는 것이 자연스럽다는 표현처럼 보인다. 하지만 이 대목에서 생각해봐야 할 것이 있다. 사흘을 굶었다고 도둑질하는 것이 잘하는 일일까?. 분명 잘못하는 일이다. 그런데 왜 이런 속담을 사용하는 것일까.?

나는 이 속담을 들을 대상이 따로 있다고 생각 한다. 이 속담은 도둑질하는 사람이 들어야 할 이야기가 아니다. 이 속담은 나라를 이끄는 위정자나 지방자치단체장 및 사회의 지도급 인사와 배고픈 사람과 함께 살아가고 있는 사람들이 들어야 하는 이야기다.

사람이 배가고프면 무슨 짓이든 할 수 있다. 이들에게서는 윤리의식을 기대하기 어렵다. 그렇다고 하더라도 남의 물건에 손을 대는 일, 남의 집 담을 넘을 일은 결코 해서는 안 되는 일이다. 그런데 내 아이와 가족들이 굶고 있다면 어떻게 할까?. 아마도 극단의 선택을 하게될 수도 있다. 그런 극단적인 선택은 막아야한다. “가난은 나랏님도 구제 못한다”는 속담도 있다. 이 속담의 뜻을 풀이해 본다면 풀기 어려운 속담이다. 가난을 나랏님도 구제 못하면 누가 한다는 말인가?. 왕도, 대통령도 구하지 못할 가난은 무엇일까?. 홍수나 가뭄, 천재지변의 재앙이 든다면 왕도 어찌할 수 없을지 모른다. 물론 잘 대비하고 사전에 방지할 수 있는 준비를 게을리 하지 말아야겠지만, 왕이 신이 아닌 이상 이것을 막거나 가난을 막기는 힘들 수도 있다. 모든 것을 나라에 의존하고자 하는 것은 아니다. 국정이나 나라의 살림과 국민의 복지를 책임지고 있는 대통령이나 도지사, 군수 등등의 위정자들이 가난을 해결하는데 아무 일도 못한다면 답답할 수밖에 없다.

가난이 든 것 자체는 대통령이나 도지사, 나랏님도 어찌할 수 없을지 모른다. 하지만 백성이 굶지 않도록 노력은 할 수 있을 것이다.

어떤 이는 굶고 있는데, 누구의 배는 부르고 누구의 곳간은 차고 넘쳐서는 안된다. 한쪽에서는 풍악이 울리고 한쪽에서는 곡소리가 나서는 안 된다. 그렇게 보면 우리가 가난을 해결하기 위해서 할 수 있는 일은 참으로 많다. 백성이 사흘 굶어서 남의 집 담을 넘는 나라는 결코 좋은 나라가 아니다. 지금 혹시 나의 주위에 밥을 굶고 있는 나의 이웃이 있는지? 살펴보고, 그러한 사람이 있다면 나에게 있는 것을 나누어 먹고 자선을 베풀며 따듯한 인정속에 살아가는 우리가 되었으면 좋겠다.

<칼럼니스트 / 탬파거주> myongyul@gmail.com <117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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