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명열칼럼> 우리들 인생 삶의 보람

<김명열칼럼> 우리들 인생 삶의 보람

 

“요즘은 영 살맛이 안납니다. 일을 하고 집에 들어가 봤자 자식들은 컴퓨터 앞이나 스마트폰을 끼고 앉아 제 애비가 들어와도 코빼기 하나 안 비치지요, 마누라는 TV드라마 보느라고 정신이 빠져 사람이 들어온줄도 모르고 쳐다보지도 않습니다. 이런걸 보면 도무지 내가 왜 사는지 알 수 없을 때가 많고 아버지로서, 남편으로서, 무기력함 때문에 많이 힘이 듭니다. 어떻게 해야 좋을지 모르겠습니다”

이 말은 내가 잘 알고지내는 40대 중반의 어느 지인의 말이다. 이러한 마음의 심리상태를 심리학자 빅터 프랭클은 “실존적 공허, 실존적 좌절”이라고 표현했다. 그리고 이런 상태는 상당히 위험한것이라고 경고하기도 했다. 그런데 빅터 프랭클은 사람들이 이러한 좌절감과 공허감에 빠지는 것이 사실은 ‘우리가 인생에 거는 기대감 때문’이라고 말한다. 즉 내 인생이 나에게 무엇을 해줄 것인가를 기대하다가 좌절감에 빠진다는 것이다. 그래서 빅터 프랭클은 좌절감에 빠진사람이 그 감정에서 빠져 나오려면 인생에 대한 원망을 할 게 아니라 자신이 할 수 있는 보람 있는 일을 찾아서 나서야한다고 했다.

큰것이 아니고 아주 작은 것 일지라도 무엇인가 내가 마음을 다하여 돌볼 수 있는 대상을 만나야 마음이 행복해지고 살고 싶은 욕구가 생겨나는 것이다.

얼마전 탬파 다운타운 근처에서 있었던 이야기다. 공원 옆의 벤치에서 30대의 어느 젊은 노숙자 청년이 햄버거를 사와서 자기는 먹지 않고 끌고 다니는 개에게 열심히 먹이며 물을 따라주는 모습을 보았다. 가까이 가서 나는 그에게 물었다. “노숙자 생활도 힘들텐데 어떻게 힘들게 개를 기르느냐”고 물었다. 그랬더니 그의 대답의 말, “내가 현재 나의 삶을 유지하는 이유는 이 개 때문”이라고 말했다. 자기가 돌볼 대상이 있을 때 사람은 좌절감에 빠지지 않는다는 빅터 프랭클의 말을 입증이라도 하듯, 그는 돈이 생기면 자기의 먹을 것보다 개에게 먹일 것을 먼저 사는 성의를 보인다. 비록 노숙자의 신분이고 희망이 없어 보이는 현실을 살아가고 있지만, 그는 애완견을 키우는 보람에 살맛을 찾은 것이다. 이처럼 인생에서 보람을 느낄 수 있는 무엇인가를 갖는 것은 내 인생을 의미 있고 살맛나게 만드는데 참으로 중요한 의미가 있다. 그런 의미에서 러시아의 대 문호 도스트 에프스키는 “내가 두려워하는 것은 내가 받는 괴로움에서 보람을 찾을 수 있는가 없는가 하는 것이다”라고 실토하기도 했다. 인생을 신명나게 사는 사람들을 보면 무엇인가 보람된 일을 하는 사람들임을 우리는 잘 알고 있다. 그런 사람들이 이구동성으로 하는 말은, 죽고 싶고 허무한 마음이 들 때 그 생각의 벽을 무너뜨리고 새로운 창조욕구를 불러일으키는 어떤 경구를 마음안에서 되새긴다는 것이다.

세상 사람들은 누구나 행복하게 살기를 바라며 원하고 있다. 그러나 설사 자기에게 그 행복이 주어졌다고 하더라도 삶의 보람이나 진정한 가치를 느끼기는 쉽지 않다. 우리들의 일상생활에 있어 행복이라는 단어 뒤에는 반드시 삶의 보람이라는 것이 따른다. 그래서 사람들은 누구나 삶의 보람을 찾고 있다. 그러나 삶의 보람은 그 종류도 수없이 많지만 현실적인 생활면에서 그것을 찾다보면 형태 역시 다양하다. 또한 철학적 측면에서 설명을 드린다면 소유의 세계에서가 아니라 존재의 세계에서 삶의 보람을 찾고 지녀야 한다고 하겠다. 인간은 밥만 먹고 일만하는 동물이 아니다. 거기에는 필수적으로 사랑이 따른다. 사랑이 내재된 모든 일에는 삶의보람도 따르게 마련이다. 사랑이 없는 생은 결코 행복한 생이 아니다. 사랑으로서 이루어진 행복속에 삶의 보람이라는 결실을 얻을 수 있는것이다. 사랑과 보람은 삶의 보람을 찾는 열쇠다. 사랑하는 기쁨과 사랑을 받는 보람을 가질 때 우리는 세상에 인간으로서 태어난 것을 감사드리고 싶고 축복받고 싶어진다. 건강해서 일하는 기쁨은 행복에 없지 못할 요소다. 일은 우리에게 의욕을 주고 건강을 주며 삶의 보람을 선물한다. 온 정열을 다 쏟아서 무언가에 열심히 할 수 있는 일을 발견한 사람은 세상에서 다시없는 행복한 사람이며 삶의 보람을 찾는 개척자이다. 별도의 얘기인데, 내가 태어나고 자란 나의 고향땅에 참으로 거룩한 삶을 살다가 하늘나라로 올라간 사람이 있다. 여기에 소개하는 그 사람은 실제로 있었던 실화의 주인공이며 연세가 많이 드신 나의 이웃어른들과 친구로 지내신 분이시기도 하다.

일제 강점기에 징용에 끌려가 강제노역에 시달리다 만신창이가 된 최귀동씨는 1945년 8월15일 해방을 맞아 그의 고향인 충북 음성군 금왕면으로 돌아왔다.

그러나 예전에 살던 집은 사라졌고, 흩어진 가족들은 찾을 길이 없었다. 가족을 만나려던 희망마저 물거품이 되었고, 병든 몸으로 고통스러운 나날을 버티며 지내던 그는 끝내 자살을 결심하고 무극천 다리 밑으로 내려갔다. 그런데 죽을 결심을 하고 찾아간 무극천 냇가 다리밑에는 거동조차 할 수 없는 걸인들이 여럿이 거적을 치고 누워있었다. 그들 중에 누군가가 힘없는 목소리로 “여보시오, 당신은 걸을 수 있군요. 우리는 걸어 다닐 수가 없어요. 배고픈 우리들을 위해 밥좀 얻어다 주시구료” 하며 간절하게 호소를 해왔다. 차마 거역할 수 없는 호소에 그는 여기저기 다니며 밥을 얻어다가 걸인들을 먹여 살려야 했다. 자살을 결심했을 때 그의 삶은 희망이 없었다. 그러나 그는 얻어먹을 수 있는 능력만 있어도 그것은 은총이라는 진리를 깨달았고, 걸을 수조차 없는 걸인들을 위해 밥을 얻어다 먹이는 것이 마침내 삶의 보람이고 희망이 되었다. 최귀동씨는 자신이 보살피던 걸인이 죽으면 산비탈 양지바른 곳에 묻어주었고, 새로운 걸인이 들어오면 따듯하게 맞아주었다. 이렇게 헌신적인 삶을 30여년간 이어오던중 그는 1976년 카톨릭 무극성당에 부임해온 오웅진신부를 만나 카톨릭에 입문했다. 이후 1986년에는 불우한 사람들을 위한 사랑의 실천으로 한국 카톨릭 사랑부문 대상을 받았다. 그는 부상으로 받은 상금을 오갈 곳 없는 노인들을 위해 모두 내놓았으며, 그의 감동적인 삶이 알려지면서 사회 각계에서 들어온 성금 12억원으로 무의탁, 오갈곳이 없는 이들을 위한 요양원을 건립하였다. 최귀동씨는 1990년 세상을 떠나 충청북도 음성의 꽃동네입구에 묻혔고, 사회 각처에서 들어온 조의금으로 비석과 동상도 세워졌다. 그는 무극천 다리밑에서 만난 걸인들의 하소연을 무시해버리지 않고 받아들여서 삶의 목적을 정립한 이후 거룩한 삶을 살기 시작한 것이다.

몇년전에 시카고에서 있었던 이야기다. 그때 나는 모 사회단체의 회장을 역임하고 있었는데, 하루는 수많은 회원들이 경청하고 있는 가운데 “무엇이 진짜 삶인가?”라는 주제로 교양강의를 하며 회원들에게 질문을 던졌다. 어떤 사람은 “산다는 것은 삶에서 최고의 것들을 즐기는 것”을 의미한다고 말했고, 또 어느 사람은 “재미있게 지내면서 모든 괴로움을 가급적 멀리 피하며 사는 것”이 진짜 좋은 삶 이라고 답했다. 2백여명의 회원들중에 많은 사람들이 각자의 생각과 의견을 피력했는데, 그중에 한 회원이 “모든 물질적인 것들이 삶의 가치를 높여주기는 하지만, 참된 삶은 그보다, 파악할 수 없는 것들 즉 상자안에 들어가지 않으며, 달력위에 표시할 수 없는 다른 어떤 것들을 포함하는 것 같다”고 고백 했을때 모두의 마음은 숙연해졌다. 그렇다면 우리가 생각하는 ‘참된 삶’이란 무엇일까? 나의 생각으로는 참된 삶에는 적어도 다음과 같은 요소들이 반드시 포함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첫째로, 참된 삶에는 의미가 필요하다. 둘째로, 참된 삶에는 적당한 노동과 노력, 즉 일이 필요하다. 셋째, 참된 삶에는 사랑(박애정신과 아가페적 사랑)이 필요하다. 넷째, 참된 삶이란, 주는 것(온정을 베푸는 것)을 의미한다. 사도행전 20장35절의 성경말씀에도 “주는 것이 받는 것보다 복이 있다”고 기록되어있다. 이기적인 사고는 받는 것에 집중 한다. 그러나 물질적인 것이든, 시간이나 에너지나 혹은 잘 들어주는 귀나, 친절한 말이든지 간에 상관없이, 우리는 무엇인가를 다른 사람에게 줄때, 오히려 무엇인가를 얻게된다. 이것은 상대방으로부터 직접 무엇인가를 얻는다는 얘기가 아니다. 주는 마음(행위)를 통해 우리 안에서 자생적으로 생겨나는 긍정적이고 행복한 감정을 일컫는 것이다.

그것은 흔히 ‘기쁨이나 보람’이라는 말로 표현되는데 인생이 가장 풍요로운 삶을 살 수 있는 비결이야말로 바로 이렇게 주는 삶, 베푸는 삶, 나누는 삶인 것이다. “가난한 사람에게 은혜를 베푸는 사람은 복이 있는 사람”이라고 기록한 성경, 잠언의 말씀은 진정으로 복을 받는 길은 바로 “베풀고 사랑을 나누고 주는 것”에 있다는 진리를 가르쳐주고 있다.

예수님께서 탄생하신 이 기쁘고 거룩하며 복된 성탄의 계절에 나의고향 어르신이신 최귀동씨같은 의롭고 선한사람이 세상에 많이 태어났으면 좋겠다. 하나님(예수님)의 삶을 본받는 사람 같은 사람이…………………..<칼럼니스트 / 탬파거주> myongyul@gmail.com <11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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