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명열칼럼> 생각이 깊어지는 이 계절에……………….
높은 하늘은 파란색물감을 칠해놓은 듯 더욱더 파래지고, 힘에 부친듯 나뭇가지에 매달려서 바람에 떨고 있는 몇잎 남아있지 않은 나뭇잎도 땅위에 떨어져 생을 마감할 날도 멀지않다. 이맘때 내 고향은 멀리 북녘으로부터 날아온 기러기들이 끼룩끼룩 소리를 내며 떼 지어서 남쪽으로 날아갈 것이고, 눈,코 뜰새 없이 바쁜 가을의 일손에 밀려 뒤늦게 타작한 들깨는 깨끗이 물로 씻어 먼지와 흙을 풍구로 불어 씻어낸 뒤 뜨락의 멍석에 펼쳐져 따스한 가을햇볕에 일광욕을 즐길 것이다. 만산홍엽으로 채색된 가을의 산천은 이제 하나둘 그 자취를 감추며 가을의 쓸쓸함과 허전함을 더해줄 것이다. 이럴때는 뻥 뚫린듯이 허전한마음과 가슴을 달래줄 노래, 여수(旅愁)라도 부르며 울적한마음을 달래어보고 싶다. 이 노래의 원 제목은 ‘Dreaming of Home and Mother’인데, 일제 강점기에 우리나라에는 여수라는 곡명으로 전해졌고 중국에는 송별(送別)이라는 곡명으로 불리우고 있다.
밤이 깊어져있다. 지평선너머로 태양이 자취를 감춘지도 어언 7시간이 넘게 지나갔다. 사방은 어둠과 적막속에 길가의 가로등만이 어둠을 밝히며 힘에 겨운 듯 졸면서 서있다. 책을 읽다가 문득 고개를 들어보니 현실이 눈앞으로 다가온다. 온갖 세상의 잡동사니들과 사회적으로 얽혀있는 인간관계, 교회생활, 자식들이 잘되기를 바라는 간절한 마음, 나라걱정, 경제와 민생문제, 등등의 생각이 머리속으로 어수선스럽게 떠오른다.
생각이 깊어지는 계절 이 늦가을에, 우리 곁에 머물고 있는 이 가을은 생각이 많아지는 계절이다. 가을이 사색(思索)의 계절이라는 말에 동의(同意)하는 이는 가을을 타는 사람일게다. 사람은 체험에서 얻은 정보를 근거로 사물을 인지하며 세상을 이해하기 때문에 그렇다. 이러한 가을에, 어느사람은 음악을 들으면 눈물이 난다는 이도 있고, 단풍색깔처럼 곱고 아름답게 늙기를 소망하는 사람도 있다. 이러한 계절이 되면 왠지 더 외로워지고 쓸쓸해지는 사람도 있고, 향기진한 커피한잔을 앞에 놓고 마냥 추상에 잠기는 사람도 있으며, 원인 모를 비애감이나 뚜렷한 대상이 없는 그리움에 잠을 못 이루는 사람도 있다. 그런가하면 댓돌 밑의 귀뜨라미 구슬픈 울음소리에 베개잎을 적시며 창문 틈으로 스며드는 어스름 달빛에 가슴앓이하며 길고 긴 가을밤을 잠못 이루고 지새는 감상적 순수감에 물든 사색파도 있다. 사색의 사전적 의미는 ‘깊이 생각함’이라고 한다. 생각이 깊어지면 왜 외롭고 쓸쓸해지는지는 알 수 없으나, 그렇다면 나이 들어 노년기에 접어든 황혼녘의 인생들은 모두가 일년 사계절 사색의 계절이 되는 셈이다.
사람들은 흔히들 말하기를 우리네 인생은 고해(苦海)라고 말한다. 인생은 고통과 고난과 고생의 3중주가 어우러진 힘들고 고달픈 인생이라고…………..
이 해도 이젠 거의 저물어져 두꺼웠던 달력이 달랑 두장밖에 남지 않았다. 우리가 살아가면서 행복이나 성공같은 삶의 의미를 자문하고 자신을 되돌아보게 하는 계절도 요즈음이다. 철학자 니체는 그의 이론중에 “인생고통”을 중점적으로 많이 이야기했다. 아니 인생의 고통 그 자체보다는 그 고통에 집중하는 인간의 고통을 다루고 있다는 것이 더 올바른 표현일지 모르겠다. 고통의 시작은 각자가 내린 삶의 의미와 목적의 정의에서 시작된다. 욕망으로 점철된 인간이 고통을 느끼는 시점은 일들이 뜻대로 되지 않는 바로 그때이다. 원하는 것이 생기면 당연히 그것을 손에 얻기 위한 집념과 노력들이 뒤따르게 되기 때문이다. 그 모두가 제대로 보상받고 있지 못하다는 생각이 들때 우리는 더한 집착과 고통에 괴로워한다. 입으로는 안락과 편안함을 주장하면서 실은 이러한 결말을 얻을 수밖에 없도록 자신의 삶을 디자인하고 있는 모순된 스스로의 모습을 돌아볼 수 있게 하는 단초를 제공한다는 점에서 니체 철학의 사상적 의미를 찾을 수 있지 않을까 생각된다. 최선의 열심을 다해 살아가고 있는 우리들 인생에게 철학이나 사상은 종종 사치와 허세로 느껴진다. 하지만 평소 향방없이 분주한 삶에 대한 고민이 있었다면, 인간과 삶에 대한 치열한 고민으로 평생을 보낸 인생 선배들이 일기나 에세이집 같은 기록들을 돌아보는 것도 가치있는 일이라고 여겨진다.
어두움과 적막감이 친구로 어우러져 고독감을 잉태해주는 고즈넉한 밤이다. 키다리처럼 뻗치고 서있는 정원수 가지 사이로 푸르스름한 달빛이 비집고 들어선다. 이렇게 사방이 고요와 검은 휘장으로 둘러싸여있는 이슥한 밤이면 불빛을 벗으로 삼아 책을 읽기가 딱 좋은 밤이기도 하다. 온통 편리와 속도감으로 결성된 문명의 이기들은 현대인들에게 독서라는 단어를 차단시키는 보이지 않는 장벽을 쳐놓고 있다. 문명의 물결이 흘러든 곳에는 어느곳 어느 장소이건 간에 어김없이 스마트폰이 삶의 방식을 뒤흔들고 있다. 바야흐로 인간들은 무서운 속도로 스마트폰에 영혼을 점령당해 노예가 되어가는 중이다. 손가락 끝의 미세한 열기만 닿으면 모든 것을 다 가르쳐주는 이기(利器)에 인간만의 특권인 사고 능력을 빼앗기고 있다. 인간이 동물과 다른점이 무엇인가?. 옳고 그름, 지양해야 하는 것과 추구해야 하는 것을 판단할 수 있는 능력이 아닌가. 그것은 육체와 정신의 참 행복을 위한 에너지를 균형있게 사용할 수 있는 지혜와 다르지 않다. 이러한 인간의 특권을 뺏기지 않으려면 독서를 해야 한다. 그리고 사색을 해야한다. 독서는 시간상 여건상 직접 경험해보지 못한 많은 것 들을 접하게 해준다. 사색은 단편적이고 편중된 사고체계를 종합적이고 균형적으로 개선시켜준다. 이는 물질문명에 저당 잡혀있는 우리에게 삶의 질을 높여준다. 이 좋은 계절에 우리는 독서를 하고 사색도 하자. 아무도 빼앗을 수 없는 것들로 우리의 보석함을 채우자. 눈부신 저 가을하늘처럼 나의 삶이 빛날것이다.
어느 사상가의 말처럼 우리가 산다는 것처럼 어려운 명제는 없는 것 같다. 또 우리가 몸뚱아리를 가지고 있다는 것이 최대의 난제가 아닐 수 없다. 사람의 일생은 평생을 이 몸 치닥거리에 정신없이 바쁘고 헤메이다 보면 어느새 늙고 병이 들어 죽음을 앞두는 것 같다. 어차피 우리네 인생이란 내가 얻었던 것을 하나 하나 잃어가는 과정이니 말이다. 한문으로 쓰여진 인생(人生)을 한번 생각해본다. 서로 기대어(人) 소(牛)가 외나무다리(一)를 걷는 현상이니 얼마나 정신을 바짝 차리고 살아야하는 삶인가?.
지성이면 감천이라고 우리들의 삶 자체가 온 심혈과 정성, 노력을 다 기울여야 뜻한 바를 이룰 수 있지, 적당히 얼렁뚱땅 요행을 바랄수는 없는 우리네 인생이다. 그런데 문제는 매사에 집중하고 정성을 기울이며 사는데 그 목표가 돈이냐, 출세냐, 명예냐, 그것을 어디에 두고 사느냐가 문제이다. 사람을 평가하는데 생전의 평가와 사후의 역사적 평가는 대개 그 판단 기준이 다르다. 생전의 평가는 소유에 의한 평가, 소속(지위)에의한 평가, 능력에의한 평가로 가름되지만, 사후에는 재산과 지위와 재능은 평가기준에서 멀어지고 오로지 그 사람의 마음, 인격, 그리고 어떠한 인생관을 가지고 세상을 위해 헌신했는가, 하는 정신으로 판가름 난다. 나 자신을 버리는 것과 위대함은 비례하는 것이다. 그러고 보니 물질은 유한(순간)이고 정신은 영원한 것 같다. 짐승은 죽어서 가죽을 남기고 사람은 죽어서 이름(정신)을 남긴다고 하더니 인생의 목표가 물질적 가치를 초월한 정신적 가치로 고차원적인 승화가 절실한 것 같다.
가을이 깊어가는 계절, 우리는 철학을 떠나서 인간이 존재할 수 없음을 절감한다. 우리의 사고를 생각 없는 갈대에서 생각하는 갈대로 돌려 세워야하는 계절이다. 나의 인생 삶에 대해 깊이 생각에 잠겨보는 것도 좋은 때이며 계절인 것 같다. 오늘 같은 깊은밤, 호젓이 앉아 나 자신과 나의 인생을 생각해보자……… <칼럼니스트 / 탬파거주> myongyul@gmail.com <114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