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명열칼럼>  반성과 사과

<김명열칼럼>  반성과 사과

옛날 나의 국민학교(초등학교) 학생시절, 학교운동장에서 고무줄놀이를 하고 있는 여학생들의 고무줄을 남자 친구들과 함께 칼로 끊어 놓고, 그 끊어진 고무줄에 당황하며 화가 나서 소리치는 여자애들을 뒤로 한채 줄행랑을 치며 낄낄대고 좋아하며 재미있어 한적이 있었다.

그로인해 여자애들은 선생님에게 이러한 상황을 일러바치고, 결과로 우리 개구장이 동료들은 담임선생님에게 회초리로 종아리를 얻어 맏고 다시는 그러한 나쁜 행동을 하지 않겠다는 반성과 아울러 진심어린 반성문을 써서 선생님께 바친적이 있었다.

반성문이란 자신의 행동이나 언행에 대해 잘못이나 부족함을 돌이켜보며 쓰는 글을 말한다. 비슷한 것으로는 사과문이 있다. 특별히 크게 사고를 치거나 잘못이 없는 사람들 중엔 학생들만 쓴다고 착각하는 사람들도 많은데, 당신의 잘못이 그냥 구두로 끝내기가 지나치게 큰 상황이라면 원칙적으로 항상 작성하게 되어있다. 여기에 비례해 원칙론적인 표현으로 반성문을 쓰거나 작성하기전에 인성적 측면에서 본다면 반성이 우선시 돼야 한다고 생각한다. 반성(反省)은 자기의 언행(말과 행동, 과오, 잘못)등의 잘못이나 옳고 그름을 깨닫기 위해 스스로를 돌이켜보는 일, 철학적으로는 의식작용을 자기 내면으로 향하게 하여 스스로를 돌아보는 것을 말한다.

얼마전 일본의 아베총리가 미국을 방문할 당시 미국의 언론매체들은 방미하는 아베총리를 향해 일본군 위안부문제를 비롯한 과거 일제의 식민지배 및 전쟁범죄를 진정으로 반성하고 사과하라는 기사를 크게 올렸다. 이는 아베총리가 아직까지도 식민지배 침략을 공개로 인정하고 명시적으로 사과하는 것을 꺼리고 있다는 관측에서 우러나온 염려의 목소리다. 한편 뉴욕타임스(NYT)는 아베총리가 공개적으로는 전쟁에 대해 반성(remorse)을 표하고 성노예,

위안부문제를 포함해 일본의 침략행위에 대한 과거의 사과를 존중하겠다고 말하고 있지만, 자신의 발언에 ‘모호한 수식어를 덧붙이고 있다’고 지적했다. 그러면서 ‘이는 그가 사과문제를 진지하게 여기지 않고 있으며, 나아가 이를 희석하려 하고 있다는 의심을 사게 한다’고 비판했다. 또한 위싱턴 포스터지는 사설에서 미국인들로서는 일본의 과거사에 대해 진주만과 ‘바탄죽음의 행진’을 기억하고 있지만, 한국과 중국은 일본의 주요한 희생자들이었다고 하고, 또 과거에 대한 거짓말 위에 세워진 미래는 받아들일 수 없으며 적어도 안전하지 않다고 했고 아베총리는 전쟁당시 일본의 극악무도했던 행동에 대해 깨끗이 털어놓고 사과해야한다고 촉구했다. 이어서 선(善)은 편하고 불편하고의 문제일수가 없으며 환상보다 진실이 더 나은 토대라는 사실을 인정해야 한다고 밝혔다.

일본은 왜 한국이나 중국 및 동남아 여러 식민지였던 국가들에게 사과를 하지 않는가? 왜 일본은 독일과는 달리 과거의 잘못된 죄악적 역사를 사과하지 않고 뻗대고 있는가? 일본의 문화를 예리하게 분석하여 써낸 루스 베네딕트의 “국가와 칼”에는 이에 대한 단서가 숨어있다. 그에 따르면, 서구는 ‘죄의식의 문화’인 반면 일본은 ‘수치심의 문화’다. 죄의식이란 나의 행위로 인해 타인에게 피해를 줬다는 느낌이다. 타인에게 용서를 구하고 책임을 지고 벌을 받음으로써 죄의식에서 벗어날 수 있다. 진심으로 죄를 뉘우치면 누구나 천당에 갈수 있다는 그리스도교의 교리와 일맥 상통 한다. 반면에 수치심은 자신이 어떤 기준에 못 미치는 존재라는 느낌이다. 부족한 존재라며 스스로를 비하하는 감정이다. 잘못을 뉘우친다고 수치심이 쉽게 사라지지는 않는다. 독일은 잘못에 대한 용서와 회개를 통해 죄의식을 덜어내고자 한다. 그러나 일본은 독일과는 문화가 다르다. 잘못된 역사를 인정하는 순간 깊은 수치심을 느낀다. 문제는 이 수치심을 받아들이는 순간, 일본은 부족한 존재가 되고 만다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더욱더 수치심을 밀어내려고 한다. 이것이 일본이 역사의 잘못을 쉽게 인정하지 못하는 이유다. 역사를 대하는 태도에서 죄의식의 문화가 훨씬 더 강하다. 과거를 반성하며 앞으로 나아갈 수 있기 때문이다. 자기 비하에 빠지지 않기 떄문에 자신의 잘못을 더욱 쉽게 인정할 수 있다. 일본과 독일의 과오는 모든 인간의 본성에 숨어있는 광기를 보여준다. 누구든 남보다 우위의 힘을 가진 상태에서 집단의 광기(狂氣)에 휩싸이면 유대인학살과 같은 큰 죄를 저지를 수 가 있다. 나치 독일의 101경찰 예비대대가 그런 예다. 존경받을만한 중산층 중년 남성들로 구성됐지만, 열정적으로 유대인을 학살했다. 많은 기업이나 유명인들이 사사(社史)나 개인 회고록을 편찬하지만 빛을 못보고 창고에서 썪히고 먼지만 뒤집어쓴다. 이유는 뭘까? 수치심의 문화 때문이다. 그러나 인간은 잘못으로부터 배운다. 자랑스럽기 만한 역사로부터 배우는 것은 많지 않다. 수치심보다는 죄의식이 바람직하다. 한국의 위안부 할머니들은 평생 일본의 진정한 사과를 기다려왔지만 아직까지도 제대로 된 사과를 받지 못했다. 오히려 일본은 끊임없이 과거사를 미화하며 자신들이 저지른 끔찍한 만행과 범죄를 정당화하고 심지어는 피해자에게 책임을 전가시키고 그저 덮으려고만 한다. 같은 전범국이지만 나치 부역자는 아무리 고령의 노인이라도 기어이 법정에 세워 실형을 받게 하는 독일과 정 반대의 모습이다. 독일이 자신들의 과거사에 엄격한 이유는 그렇게 하지 않으면 똑같은 잘못이 되풀이 될 것을 알기 때문이다. 또 그것은 억울하게 희생된 피해자들에 대한 최소한의 도리이다.

1970년 12월7일, 빌리 브란트 서독수상이 폴란드를 방문했을 때의 일이다. 수상이 폴란드에서 제2차 세계대전때 독일의 나치정권에 희생당한 피해자 유태인들의 추모비 앞에서 과거를 반성하고 사과하며 무릎을 꿇은 것이다. 한 나라의 국가원수가 남의 나라에 가서 스스로 무릎을 꿇었다는 것은 세계사적 사건이다. 이 사건은 서독내에서도 즉시 찬,반 양론을 불러일으켰다. 서독의 유력언론지 슈피겔이 당시 실시한 여론조사에서 서독국민의 48%는 브란트수상이 무릎 꿇은일을 ‘너무했다’고 지적했으며 41%는 ‘적절했다’ 그리고 나머지11%는 ‘모르겠다’고 대답했다. 그러나 2년의 세월이 흐르면서 서독국민의 대다수가 브란트수상의 생각에 동조하게 되었고, 1972년 선거에서 브란트수상은 압도적인 대승을 거두었다. 무릎 꿇은 사과(Kniefall)로 상징되는 브란트 수상의 외교정책은 국제사회로부터 신뢰와 지지를 얻는데 성공했다. 신뢰와 지지, 이는 브란트수상의 외교정책을 수월하게 해줄수 있는 수단매체였을 것이다. 이 매체를 형성하기위해서는 과거 독일의 나치스정권이 저지른 범죄와 과오에 대해 진지한 사과와 회개,반성이 필요했고 이 회개와 반성을 전 세계에 보여주기 위해서 브란트수상은 무릎을 꿇었을 것이다.

이와 같은 역사적 사실을 보면서 일본과 독일을 같은 한가지 기준의 잣대를 놓고 재 조명해본다. 일본의 국민들이나 위정자(통치자)가 독일의 국민들을 본받고 브란트수상을 본받는다면 얼마나 좋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과거 일본은 임진왜란을 두번이나 일으켜 조선백성 모두에게 고통과 모욕과 혼란, 살상을 일삼더니 근세에 다시 침략해 36년간을 식민지배를 했다. 수십년 동안을 우리민족의 국가,국토,민족,언어,문화,성명,재산등을 강탈하다가 미국의 원자폭탄을 맞고서야 항복했다. 그들은 말할수 없이 수많은 만행과 범죄, 살상행위를 저질렀으면서도 오늘날까지 반성이나 회개, 진정어린 사과 한마디 없다. 그리고 일본은 최근 침략근성을 부끄럼이나 양심의 제재없이 드러내며 독도를 자기네 땅이라고 억지를 부리고있다. 이러한 현실을 비추어볼 때 한국을 비롯한 아시아국가들은 일본이 과거의 죄악을 반성하거나 사죄함 없이 침략성을 수시로 표출하고 있는 사실에 경각심을 일깨우고 깊이 마음에 새겨야 한다. 그리고 일본은 과거에 자국으로 인하여 피해와 고통을 받은 사람들에게 진심으로 사죄하고 이를 행동으로 실천하여 더 이상 남의나라 영토를 내 땅이라고 주장하는 침략성을 중단할때 세계의 평화에 기여하는 선진국이 될 수 있을 것이다. <칼럼니스트 / 탬파거주> myongyul@gmail.com <11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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