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명열칼럼> 봄의 꽃, 튤립을 보며……………..

<김명열칼럼> 봄의 꽃, 튤립을 보며……………..

입에는 빨간 립스틱을 바르고, 목에는 노란스카프를 감아 걸고, 하이얀 브라우스에 보라색 하이힐 구두를 신은 어여쁜 아가씨가 화사한 봄 햇살 아래 자태를 뽐내며 저만치서 걸어가고 있다. 물감을 칠한 듯 파아란 하늘아래 나른한 봄볕을 받아 빨간빛 기와지붕위에서는 아지랑이가 아롱 아롱 거리며 춤을 추고 있다.
각종 봄꽃들이 심어진 꽃밭, 튤립 꽃 농장에서는 제철을 만난 튤립이 형형색색의 빛깔을 자랑하며 손님들의 발길을 유혹하고 있다. 매년 봄 이맘때는 전국의 이곳저곳에서는 아름답게 피어난 튤립 꽃 축제가 한창 벌어져 있겠고, 그 튤립의 유혹에 빠져 발길을 멈추고 그 아름다움에 도취되어 술취한 기분처럼 환상과 몽롱한 정신속에 엔돌핀을 전신에 피워내고 있는 상춘객들도 참으로 많이 있으리란 생각이 든다.
중세 유럽을 배경으로 한 동화 한편을 들려드리겠다.
어느 어여쁜 처녀가 있었다. 혼기가 찬 이 처녀에게 이곳저곳에서 청혼이 들어오기 시작했다. 예쁜 처녀의 소문을 듣고 어느 날 이 나라의 황태자가 찾아와 “당신이 나와 결혼해주면 찬란한 왕관이 당신의 것이 됩니다” 하고 말했다. 이어 그 당시 유럽에서 선망과 존경의 대상이었던 기사(騎士) 한 사람이 찾아와 ‘당신이 나와 결혼해주면 우리 가문에서 가보(家寶)로 내려오는 이 검(Sword)이 당신것이 됩니다”라고 말했다. 그다음에 또 어느 부잣집 재산가 상인의 아들이 나타나 “당신이 나와 결혼하면 우리집 지하실에 있는 금괴가 당신 것이 됩니다” 라고 말했다. 처녀가 생각하고 보기를, 모두가 좋아 보여 결정을 내리지 못한채 시간만 끌었고, 이에 구혼자들은 화를 내며 모두가 떠나갔다. 상심한 처녀는 이내 병이 들어 눕게 되었고 한동안 심하게 앓다가 끝내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그 후 처녀가 죽고 그녀가 묻힌 무덤 위에서는 한송이 예쁜 꽃이 피어났다. 꽃봉오리는 황태자의 왕관을 닮았고, 잎은 기사의 검을, 그리고 뿌리는 부자 상인의 금괴를 닮은 튤립 꽃이었다.
세상에는 정말 아름다운 꽃들이 많이 있다. 그리고 이 꽃들에는 각각의 꽃말들이 들어있는 경우가 많이 있다. 이른 봄인 최근, 요즘 들어서 우리 곁에 다가와서 선보이는 꽃은 꽃샘추위를 견디고 이겨내 피어낸 튤립이 단연 인기가 높고 관심거리이다. 이 튤립은 대표적으로 색깔이 네가지로, 빨강, 노랑, 하dis, 보라색이 있는데, 이 각각의 색깔마다 의미하고 있는 꽃말이 있으며 그 꽃말이 모두 다르다. 대개의 꽃말들을 보면 고백하기 좋은 꽃말이 있는가 하면 조금은 좋지 않고 언짢은 꽃말을 가진 꽃들도 있다. 그 꽃이 예쁘게 생겼다고 해서 아무 꽃이나 선물하게 되면 그 꽃말을 보고 크게 후회할 수도 있으니 주의가 요청된다.
최근 어느 신문에 게재된 기사를 보니, 예전만큼 꽃 선물을 하는 사람들이 많지 않다고 한다. 그리고 심지어 어느 여자들은 꽃 선물을 받는 것을 질색하는 여자들도 있다고 하니 의외라는 생각이 든다. 한편으로는 이해도 되는데, 요즘 현대여성들은 정말로 너무나 바쁘게 지내고 있는데 꽃 선물을 받아도 관리하기도 불편한 그러한 현실적인 문제도 있기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
참고로 여기서 튤립의 꽃말에 대하여 소개해드리겠다. 빨간색튤립은 사랑의 고백, 사랑의 표현이고 노란색튤립은 바라볼 수 없는 사랑, 헛된 사랑이고 흰색튤립은 실연, 보라색튤립은 영원한 사랑이다. 여기서 보면 빨간색과 보라색은 아주 로맨틱한 꽃말로서 사랑하는 사람에게 전해주기 좋은 꽃인 것 같다. 그리고 노란색튤립은 바라볼 수 없는 사랑, 어떻게 본다면 안 좋은 뜻으로 해석될 수 있다. 그렇지만 좋은 쪽으로 해석하자면 바라볼 수 없기에 다가가야 하는 사랑이라는 말이 아닌가 생각도 든다. 그리고 흰색튤립의 실연 꽃말에서, 흰색이 가지는 대부분의 의미는 고귀함과 관련된 것이라고 본다.
실연이라는 것은 결국 ‘혼자 남게 되었다’라는 의미이기 때문에 자신 혼자서 우뚝 서있는 그런 느낌을 주는 것 같다. 이 아름다운 봄에, 사랑하는 사람에게 튤립을 선물하고 싶다면 빨간색과 보라색 튤립을 선물하는 것이 좋을 것 같다.
튤립 꽃은 봄철에 피어난 어느 꽃들보다 더 화려하고 강렬한 자태를 뽐낸다. 그런데 이 튤립은 꽃이 진후 여름이 되기 전에 알뿌리를 캐두었다가 11월경 다시 심어야하는 번거로움이 있다. 만약 그대로 흙에 묻어두면 여름을 견뎌내지 못해서인지 점차 그 숫자가 줄어들기 때문에 매년 연례행사처럼 해야 한다.
저렇게 아름답게 피어나 화단과 정원, 꽃밭에서 뭍사람들의 시선을 독점하고 있는 저 튤립들도 부지런한 농부들의 손길이 수십번을 거쳐 땀과 노력의 결정체로 만들어진 선물이라고 보고 싶다. 세상의 많은 시인이나 문학가들은 꽃을 보고 시를 쓰고 글도 창작했다.
지금 내가 쓰고 있는 글의 대상으로 하고 있는 튤립은 참으로 아름답다. 왜 그럴까? 거기에는 어떠한 목적을 띈 개념성이 들어있지 않기 때문이다. 뚝배기나 주전자 냄비 같은 우리가 쓰고 있는 실용적인 도구들은 아름답지가 않다. 왜 그럴까? 거기에는 목적의 개념이 들어있기 때문이다. 한송이의 튤립이 아름다운 것은 거기에 아무런 객관적인 목적이 없기 떄문이다.
그러니까 우리가 보는 대상은 목적이 있으면 아름답지 않고 목적이 없을 때 아름답다. 튤립이 아름답다고 말할 때 우리는 그 내용의 아름다움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튤립에 관해 모든 것을 철저히 알고 있는 식물학자가 있다 해도 그가 튤립에 대해 단 한가지 모르는 것이 있으니, 그것은 튤립의 아름다움에 대해서이다.
그가 만일 튤립의 아름다움에 매료되어 그윽한 눈길로 튤립을 바라본다면 그 순간 그는 식물학자이기를 그치고 미학자가 되는 것이다. 아직 튤립을 본적이 없는 어린아이가 유치원에서부터 그리기 시작하는 예쁜 튤립 꽃봉오리는 그 형태의 완벽성이 우리를 매혹시키는 것이지, 그것에 대한 식물학적 지식이 우리의 미감을
자극하는 것은 아니다.
우리가 뭔가를 아름답다고 생각하는 것은 그것의 형식에 대해서이지 그것의 내용에 대해서가 아니다. 유려한 곡선이 팽팽한 긴장감으로 조여져 있는 튤립꽃봉오리의 형태는 너무나 완벽하며 도저히 믿기지 않는다. 이 꽃을 보는 사람이 신앙인이라면 신의 뜻에 맞게 만들어졌다고 생각할 것이고, 냉정한 인문학자라면 자신의 주관적 인식능력에 딱 맞게 만들어졌다고 생각할 것이다. 보는 이의 관점과 사고의 차이에서 미의 수평적 잣대가 기울어지고 또한 올라간다. 튤립 꽃이 지고 봄이 다 지나가기 전에 튤립 농장이나 화원에 들러 꽃을 구경하고 한 단의 튤립 꽃이라도 사다가 집안에 꽂아두던지 화분에 담아 창문가에 놓아두고 아침저녁으로 그 꽃을 감상하는 것도 정서적으로나 심적인 평안을 얻기 위하여 좋은 방법이라는 생각이 든다.
이 찬란하고 아름다운 봄에 아름다운 튤립을 보며, 세상을 튤립처럼 아름답게 모든 사람들이 살아갔으면 좋겠다. <칼럼니스트 / 탬파거주> myongyul@gmail.com <11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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