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은주작가의 삶의 이야기> 공산국가 CUBA를 돌아서……
4월말 이였던가?
남편이 쿠바로 간다고 했다. 의아했다.
쿠바는 공산국가라 미국시민들의 여행이 통제되어 있다고 하는 말을 들어서 공산국가에 대한 두려움이 깊숙이 머릿속에 각인되어 있기 때문이었다.
불현듯, 누구에게서 인가 쿠바는 의사도 넘치고, 약초의 생산지어서 장님의 눈을 뜨게 하는 신기한 약초도 있다 하고, 수양원도 있다는 말이 떠올랐다.
믿기지는 않았지만 오래 동안 녹내장으로 시달림을 받고 있던터라 두려움보다 눈을 고쳐보겠다고 하는 욕심이 일어났다.
생각과 생각에 눈망울만 굴리고 있는 남편이 내 손에 인터넷으로 뽑은 A4 용지를 내밀었다.
Those traveling for activities in support of the Cuban people, such activities as human rights
Organizations, activities designed to promote peaceful transition to democracy, and activities intended to strengthen civil society.
쉽게 말하면 person to person cultural exchange.
‘모처럼 주워진 기회를 놓치지 말고 안전이 보장 되여 있으니 걱정하지 말고, 정치혁명가로 세계 역사의 인물로 동상의 높이가 일위순이라고 하는 Che Guevara와 Nobel 문학상을 탄 어네스트 헤밍웨이(Ernest Hemingway)의 저택과 도서관, 그리고 그의 발자취를 상세히 보게 될 것이라고 흥미까지 일게했다.
혁명가 Che Guevara!(체 게바라) 과연 혁명이란 무엇인가?
80년이라고 하는 긴 세월을 살아오면서 나는 두 번의 전쟁과 한번의 혁명을 겪으면서, 나도 한때 고아 출신의 쪽발이의 딸이라고 사회에서 냉대를 받아가면서 방송실의 한 모퉁이에 앉아 외로움을 삼킬 때 읽은 사회주의 마르크스, 레닌의 감화에 빠져 들기도 했었지만, 난 아직도 사회주의와 공산주의의 다른 대답은 얻을 수가 없었다.
이번 기회에 사회주의와 공산주의는 어떻게 다른지 알고 싶어지기도 했었다.
의식주가 평등하고 자유가 보장되는 평화로운 사회제도를 이루고자하는 논리를 세워, 수많은 생명을 잃어가면서 혁명을 일으켰다고 한들, 단 한 번도 평등한 권리를 누려보지 못한 채, 부귀와 권력에 맛들인 검은 권력의 힘에 눌려 그들이 진정 바라는 평등한 사회는 1세기를 넘지 않았다고 역사는 기록하고 있기에.
문맹을 퇴치시키고 평등한 권리를 누리게 되었다고 하는 쿠바의 혁명!!
The red island floating on the Caribbean Sea
‘카리브 해에 떠 있는 붉은 섬’이라고 부르기도 하는 쿠바!
의사가 넘쳐나고 약초도 넘쳐나 민방치료도 각광을 받고 있다고 하는 쿠바!
망설임을 접고 지난 5월 3일 아침 일찍이 마이애미로 가는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
여기보다는 3시간이 빨라 오후 5시경에 공항에 도착했는데 이름표를 높이 들고 우리를 기다리고 있던 안내원을 따라 승용차를 올라 마이애미 중심가에 있는 Sofitel Hotel에 도착했다.
그곳에서도 우리를 기다리고 있던 안내원이 건네주는 열쇠를 받아 방에 짐을 풀고 아래층 대합실로 갔다.
각자 State Department License를 받고 다른 주에서 온 25명과 함께 호텔 로비에 모여 쿠바에 대한 슬라이드를 보고 이론 교육도 받으면서 우리 일행은 하루 밤을 지내고 다음날 아침 식사를 마치고 ‘cultural exchange'(문화교류)라고 빨간 색깔에 하얀 글씨로 쓴 명찰을 받아 가슴에 달고 쿠바로 행하는 Charter Flights 특별 비행기에 올랐다.
왠지 목이 조여오는 불안과 초조!
안내원의 말에 의하면 수천년전의 쿠바는 원주민과 타이드족이 농경을 영위하고 살고 있었다고 한다.
15세기에 크리스토퍼 콜럼버스가 쿠바에 건너 온 이후 스페인이 원주민들의 뿌리를 멸종시킨 후 백인과 16세기 초에 아프리카에서 1백만명에 달하는 흑인 노예들을 데려와 suger cane(사탕수수)의 이권과 세계 최고품이라고 하는‘아바다 시가’(담배)의 상권을 독점하고 흑인들이 정착지를 이루면서 황금만능주의를 부추기는 스페인들의 노동 착취와 억압 속에 근 400년 동안 스페인의 식민지로 살아 왔다고 했다.
쿠바의 역사는 인터넷이나 탁상을 통하여 잘 알려져 있어 지면 관계로 생략하고 사탕수수와 아바나 시가(담배)의 주 된 경제권이 부를 축적한 권력에 가리어져 있다고 한다.
우리일행은 쿠바의 수도인 하바나에 있는 쿠바의 관문이라고 하는 Revolution Square(혁명광장)에 도착하여 하늘이라도 찌를 듯, 우뚝 서 있는 체 게바라의 동상과 고층 건물들의 벽마다 펄럭이는 체 게바라 초상화들을 둘러보았다.(1091호)
과연 체 게바라(Che Guevara)는 어떤 인물이었을까?
1828년 6월 14일, 아르헨티나가 고향인 어머니와 영국인 아버지 Ireland 혈통의 중산층 가정에서 다섯 남매 중 장남으로 태어나 ‘Venus Island’ 의과대학을 졸업하고 오토바이를 타고 페루, 에콰도르, 페루, 코스타리카, 니쿠아라가, 온두라스, 엘살바도르 등으로 문둥병 환자들을 돌보며 무전여행을 즐기다가 과테말라에 머물러 문둥병 환자를 치료하는 중 반정부운동권에 가담했던 죄로 숙청당하여 과테말라에서 살고 있는 여성운동가 ‘일다 가데아’를 만나 사회주의에 빨려 들어 결혼하여 2남 2녀를 두었다고 한다.
그럼에도 선천적인 혁명가의 기질로 태어나서인지 혁명선두에 나서 1959년 1월 1일 쿠바의 혁명을 일으켰고 끝내는 쿠바의 제 2인자의 자리까지 박차고 ‘이제 내가 쿠바를 위해 할 일은 없다’고 하는 쪽지 한 장을 남기고 볼리비아 정부를 돕기 위해 바리엔 토스 정권을 상대로 게릴라전을 벌렸다가 1967년 10월 9일 볼리비아 정부군에게 사로잡혀 39살의 젊은 나이로 총살당했다고 한다.
그 후 볼리비아 정부가 30년 만에 혁명을 달성시키자, 체 게바의 전사통지를 세계 언론에 의해 발표되긴 했었으나 시체의 행방을 찾지 못하던 중, 30년이 지난 후, 성자의 모습을 닮은 것 같은 체 게바라의 시체를 볼리비아에서 발굴하여 그 시체는 쿠바로 옮겨져 세계의 자랑스러운 혁명가로 추앙되어, 일대를 열거해 놓은 무덤과 곳곳에 크고 작은 동상이 세워져있어 지금도 동상 앞에 꽃다발을 놓고 가는 행렬이 이어지고 있다고 했다.
이로서 쿠바 정부는 빈부의 차이를 근절하기위해 개인의 자산을 국유화 시켰는데 스페인들은 물론, 쿠바의 검은 손들도 집을 버리고 마이애미를 중심으로 플로리다로 망명을 했다고 한다.
말로만 들었던 쿠바의 공산권!
고궁처럼 화려한 운치를 겸한 스페인들의 집들은 물론, 미쳐 망명을 하지 못한 관료들의 저택, 그들의 혈족이 5명 이상 남게 되었을 때는 정부가 사드려 국유화시켰고 세 사람 이하 일 때는 아파트로 보내 살게 했으며 이 또한 국유화시켰다.
쿠바의 면적 : 110,860km²
인구 : 11,210,064명
종교 : 기독교
교통 : 무료
의료 : 무상 (12년 기한에 외과와 내과, 수술 집도를 다 마쳐야 의사 자격 획득)
교육 : 유치원에서부터 대학원과 특수 과정, 영어는 필수과목
교복 : 쿠바 학생교복은 유치원부터 대학원까지. 유치원은 빨간색에 하얀 타이, 중학교는 푸른색에 하얀 타이, 고등학교는 고동색에 하얀 타이, 학원생은 검은 바지에 하얀 타이로 통일되어 있어 쿠바의 어느 곳을 가나 몇 학년인지를 알아보기도 쉬고 대물림을 받게 되어 경제적인 부담도 적다.
특이했던 예술교육
연극, 화가, 오케스트라 등의 예술문화는 예술의 창조지라고 하는 소련과 같은 수준이라고 했으며 이 모든 것이 무상으로 배우며,
식생활 : 정부에서 모든 국민에게 일정액으로 주는 30페소(30달러)로 생활비를, Ration Book에 의하여 일인당 쌀 5파운드, 설탕, 우유, 계란, 야채 등…
한정된 배급받은 식량으로 살아서인지 쿠바의 시민들은 남녀노소를 불구하고 몸이 말라보이긴 했지만, 눈빛이 총총했고 화색도 좋아 건강해 보였다. 또한 동작들도 민첩하고 친절하고.
체 게바라에 대한 존경과 민족애가 강해 보였으며 두 나라가 서로 자유로이 오고 갈 수 있는 날이 하루속히 이루어지기를 바란다고 우리들을 향해 웰컴! 웰컴! 하면서 손을 흔들며 반겨주는 모습에서 왠지 코허리가 시큰거려지기도 했다.
다음 행선지는 쿠바를 대표하는 작가며 정치가로 세계적인 명성이 높았던 호세 마르티(Jose Marti)의 무덤으로 발길을 옮겼다.
그는 스페인 정권을 타도하고자 지하조직을 만들어 모금 운동을 벌이다가 3일 만에 스페인 정부에 의해 1898년에 사살되었다.
사람은 죽어서 이름을 남긴다고 했던가?
무덤이라기보다는 가지가지 모양으로 대리석을 깎아 만들어 놓은 궁전에 있는 대리석을 깎아 만들어 놓은 궁전에 있는 대리석의 조각공연과도 같이 찬란했고 하루에 2시간마다 무덤(Tomb)앞에서 열리는 다섯 명의 여군 사열식도 경이로웠다.
그 다음날의 행선지는 쿠바의 황금산맥이라고 하는 사탕 수수밭 견학!!!
끝이 보이지 않는 설탕 숫밭! 흰설탕과 흑설탕의 제조과정을 보았고, 칼날보다 더 예리한 수수 대에 찔려 펑펑 피를 쏟으면서도 비명소리도 지르지 못하고, 모진 채찍에 쓰러져 간 흑인 노예들의 참혹상.
작년이었던가? 아카데미 작품상과 주연상을 휩쓸었다고 하는 “12 years of slavery(노예 12년)”의 영화장면보다 더 비참한 것 같아 가슴이 아팠다.
그 다음 날은 200년 전부터 대물림을 받아 운영하고 있다고 하는 가지각색 다양한 색깔의 벽지는 물론, 명함 제작과 크고 작은 편지봉투에 이르는 종이를 만들어 유럽등지에 무역을 하고 있다고 하면서 제작과정을 시범해 보이는 인쇄소를 비롯한 고적탐방, 농경지, 다양한 음악회, 천년이 넘었다고 하는 울창한 나무와 나무들, 처음 보는 꽃과 꽃들의 향연!.
대리석으로 만든 스페인 왕족과 관료들의 동상들이 정교하게 서있는 선조들의 공원무덤과 1,250 에이커에 학교와 교회, 아이들의 놀이터를 비롯한 공공시설을 갖추고 대대손손이 그 울타리 속에서 살고 있다고 하는 카스트로 집안의 역사의 현장도 견학했는데 혁명군에 가담했던 카스트로가 스스로 정부에 바쳐 국유화가 되어져 문화유산으로 보존되어있다고 했다. <작가/칼럼니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