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명열기행문 42> 아이티 여행<1>

<김명열기행문 42> 아이티 여행<1>

선내에는 이미 각종 재미있고 즐거운 프로그램으로 짜여지고 기획된 여러 가지의 이벤트들이 수천명(6천5백명)의 손님들을 위하여 준비되고 만들어져서 막을 올릴 준비를 하고 있었다. 여행객들은 누구나 자기가 원하고 보고 싶은 프로그램을 선택하여 그것을 시행하는 쇼 무대 룸을 찾아가 보고 즐기면 된다. 모든 것은 역시 무료다. 이미 크루즈회사에 지불한 여행 경비 속에는 이러한 모든 프로그램들이 포함되어있어, 여행객들은 그저 재미있고 즐겁게 즐기기만 하면 된다.

우리들 일행은 어느 가수들이 라이브 쇼로 열창하는 음악 감상실을 찾아 노래를 듣고 차를 마시며 편안한 시간을 보냈다. 음악 감상이 끝나고 나와서 시원한 음료수를 들며 칼칼해진 목구멍을 씻어 냈다. 오랜만에 만난 반가운 사람들은 상대의 말이 끝나면 서로가 이어가며 정담을 나눴다. 그러다보니 밤이 깊어지고 시계의 바늘은 자정이 가까운 시간을 향해 가고 있었다.

모두가 자리를 털고 일어나 정해진 룸, 각자의 숙소로 향했다. 즐거운 여행, 내일을 기약하며 잠자리에 들었다. 아침에 일찍 일어나 눈을 떠보니 새벽 5시다. 잠을 충분히 못자서 그런지 몸이 찌뿌드드하고 머리가 무겁다. 창밖을 내다보니 커다란 배는 요동을 치며 아직도 검푸른 바닷물을 가르며 섬나라 아이티를 향하여 힘차게 달려가고 있었다. 오전 6시30분경이면 여행의 첫 목적지이자 기항지인 아이티 섬에 도착한다고 안내방송이 나오고 있다. 간단한 맨손체조로 몸을 풀고 샤워를 마치고 나오니 저만치 아이티 섬의 해안이 눈에 들어온다. 말로만 들어왔던 섬나라 아이티, 세계적으로 최빈국중의 하나인 아이티 섬이 가까이 다가오자 호기심과 궁금증이 머릿속으로 떠오른다. 몇년전에 다니는 교회에서 선교팀을 조직해 이곳에 선교활동을 하러 여러 사람들이 온 적이 있었다. 그 당시 나는 개인사정으로 함께 참여하지 못했으나 나의 집사람은 선교팀 일행에 동참했다. 그곳에 가서보니 사람들의 생활은 너무 가난하고 불쌍해보였다고 한다. 선교대상중의 하나가 어느 고아원이었는데, 그 고아원을 방문한 나의 집사람은 그곳의 실정과 아이들의 참담한 생활상을 보고 그만 왈칵 눈물을 흘리며 울고 말았다고 한다.

아이티, 카리브해의 이스파니올라 섬의 서쪽부분에 있는 국가이다. 서쪽은 카리브해를 마주하고, 동쪽은 도미니카공화국이 위치하고 있다. 아이티는 앞에서도 잠깐 언급했듯이 세계 최빈국중의 하나이며 현재는 일부국가와 유엔 평화유지군의 지원을 받고 있다. 수도는 포르토 프랭스이다. 공용어는 아이티어와 프랑스어로 섞여져 사용하고 있다. 1492년 크리스토퍼 콜럼버스가 이스파니 올라 섬을 발견한 이래, 섬의 원주민이던 타이노족과 아라와칸족 등 토착민들이 학살과 질병으로 인해 몰살당하자 아프리카에서 흑인 노예들을 데려와 일을 하게 하였으며, 이들이 현 아이티인들의 선조이다. 토착민들은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처음에는 에스파냐의 식민지였으나 나중에 프랑스가 차지하였다. 섬의 서쪽을 프랑스가 1659년 이후 서서히 점령했지만, 쇠퇴의 길에 서있던 스페인은 그것을 막을 여력이 없었고 1697년 ‘라이스윅조약’으로 섬의 서쪽 3분의 1은 프랑스령이 되었다. 이 부분이 현재 아이티의 국토가 되었다. 프랑스는 이곳을 프랑스령 생도맹그(Sant-Domingue)라고 불렀다.

1804년 1월1일 전 노예이자 혁명가 투생 루베르튀르는 그가 이끄는 군대들로 스페인과 영국군을 물리치고 그가 주도한 흑인노예들의 혁명으로 프랑스로부터 독립을 쟁취하게 되었다. 제1차 세계대전의 틈을 이용해 침공해온 미국에 의해 1915년~1934년까지 미국에 점령된 적도 있었다.

2010년 1월31일 오후 4시53분경에 카리브해의 섬나라 아이티에서 진도 7.3의 강력한 지진이 발생했다. 아이티의 수도인 포르토프랭스 인근 지표면으로부터 13Km깊이에서 발생했다. 이 지진으로 인해 피해를 입은 인구가 아이티전체 인구의 3분의1인 3백만명에 이르렀다고 한다. 사망자수는 22만명이 넘었고 부상자수 역시 30만명에 달했다. 중부아메리카 섬의 나라 아이티, 이 지역은 두개의 서로 다른 지각판이 충돌하는 지점이다. 북쪽에는 북아메리카 판이, 남쪽에는 카리브 판이 수평으로 엇갈리면서 10년에 20Cm씩 이동하며 서로 충돌하고 있었다. 150년 동안 거대한 두 지각판이 3m 정도 움직이면서 쌓인 엄청난 에너지가 이번의 지진으로 한꺼번에 분출이 된 것으로 전문가들은 분석하고 있다. 이러한 뜻하지 못한 자연재해인 지진의 대 참사로 인하여 많은 사람들이 가족을 잃었고 인명피해가 발생했으며 더불어 부모를 잃은 고아들도 수없이 많이 생겨나게 되었다. 거리 곳곳은 집과 가족을 잃은 이재민들로 넘쳐났고 먹을 것이 없어서 굶어죽는 사례까지 발생했다. 부모와 가족을 잃은 어린아이들 역시 이 범주 내에서 자유로울 수가 없었다. 너무나 많이 발생한 고아들로 인하여 기존 고아원의 시설과 능력으로는 이 아이들을 받아들이고 보호할 엄두조차 낼 수 없었다. 국제적인 구호와 도움의 손길이 있었지만 너무나 엄청난 피해와 재앙 앞에서는 속수무책일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지원이나 구호, 도움이 아예 없는 것보다는 나았다. 이후 꾸준한 국제기구의 여러 자선단체와 적십자사, 종교기관, 의료단체 등의 관심과 도움, 지원 속에 재해의 아픔과 상처는 차츰차츰 아물어지고 회복되었다.

몇년전에 내가 다니는 교회에서는 목사님을 비롯한 여러명의 신도들이 뜻을 모아 선교지원팀을 조직하여 아이티를 방문하였다. 무너져버린 곳곳의 지진피해와 상처의 폐허들이 아직도 곳곳에 산재해있는 상황에서, 무엇을 어떻게 먼저 손을 써야하는지 망설여지기까지 했다. 그곳에 상주하여 선교사업을 펼치고 있는 어느 선교사님의 안내를 받아 구호품을 전달하고 고아원도 방문했다. 고아원에 들어가 보니 아이들은 개, 돼지, 짐승처럼 아무 곳이나 땅바닥에서 잠을 잤고, 입을 옷도 넉넉지 못해 벗고 있는 아이들도 눈에 많이 띄었다. 먹을 것도 충분치 않다보니 제대로 음식을 먹지 못한 아이들이 허기지고 지쳐버린 허약한 몸으로 휑하게 처진 눈초리로 방문객의 선교팀들을 물끄러미 응시하고 있었다. 제대로 된 화장실도 없어서 아이들은 노변의 땅바닥에 아무렇게나 용변을 보고 있었다. 더군다나 고아원의 건물은 벽은 있으나 지붕은 한쪽 켠에 덩그라니 너덜너덜 구멍이 뚫린채 바람결에 흔들리고 있었다. 비가 오면 아이들은 한쪽구석에 쭈그리고 앉아서 비를 맞으며 날밤을 새야하는 고생스러운 환경 속에 힘든 생활을 영위하고 있었다. 처참함, 참담함, 불쌍함, 안타까움 등등의 애처롭고 비애로운 수식어의 단어들이 총 망라되어 한꺼번에 머릿속으로 떠오르

는 그러한 목불인견의 가련하고 불쌍한 장면들이었다. 그곳을 방문한 선교팀들은 적은 도움이지만 그곳에도 도움의 손길을 전하고 떨어지지 않는 발걸음을 되돌렸다. 그 이후 그곳의 선교팀의 일원으로 그곳을 다녀온 나의 집사람은 집으로 돌아와서 눈물을 글썽이며 그곳의 참상을 나에게 전해주었다. 그러면서 이렇게 미국 땅에서 잘 먹고 편안히 살고 있는 우리들이 너무나 그들을 보기에 죄스럽고 미안하다며 그들(고아원의 어린이들)을 위하여 우리부부가 무언가를 하여야 한다는 하나님의 사명감 같은 것을 느끼게 되었다. <다음호에 계속> myongyul@gmail.com / 칼럼리스트 / 탬파거주 <107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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