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명열칼럼> 마음이 공허롭고 쓸쓸해지는 가을녘의 10월달에……… | |
[2016-10-05, 08:13:41] |
지구가 조금씩 기울어져 햇볕을 받는 일조량이 줄어들면서, 바람이 차가워지면 자꾸 무언가가 그리워진다. 따듯했던 봄날의 햇살, 아름답게 피어나는 새싹과 꽃잎들, 땀 흘려 뜨거워진 몸을 시원한 그늘에서 매미소리 들으며 식혀주든 일들, 그런 것들이 조금 전에 지나온 곳 같은 시간이었는데도 우리는 늘 그 시간들을 그리워하며 이 계절을 보낸다. 누군가가, 또 어떤 시간이, 어느 날의 마음이, 자꾸만 그리워지는 시간, 가을의 중턱에서 그리운 감정의 손을 잡고 저만치서 서서히 우리 곁으로 다가오는 겨울 앞으로 우리는 조금씩 발걸음을 내딛고 있다.
9월이 소리 없이 떠나가고 어느새 10월이 되었다. 10월에는 저 태평양의 바다처럼 마음이 파래지고 깊어지는 시간이다. 지나간 시간들 속에서 나는 어떤 사람이었는지, 그리고 지금 나의 곁에는 어떤 것들이 남아있는지, 길을 걷다가도, 따듯한 차 한 잔을 마시면서도 불현듯 사색하는 시간이 많아지는 이 가을……이러한 감정을 느끼지 못하고 사는 사람들은 그만큼 정서가 메마르고 마음이 공허롭다는 증거이겠다. 사색은 마음을 정화시키고 자기의 현실과 생활들을 반추해볼 수 있는 삶의 찌꺼기들을 걸러 내주는 정화조 역할을 감당해 주고 있다. 생동하고 질펀하게 젊음의 축제를 벌였던 청년의 계절 여름이 떠나가고 지금은 모든 것을 내려놓고 숨을 고르는 계절, 불필요한 감정을 지워버리고 오롯이 내 마음이 하는 소리에 조용히 마음 문을 열고 귀를 기울여 보자. 그것이 지나간 시간에 대한 후회가 됐든 무심코 지나친 인연에 대한 아련함이 됐든 간에, 우리는 그 시간과 인연을 통해 한 뼘쯤 키가 자랐고 성장을 했으리라. 마음과 사고가 성숙해지는 시간, 지금 가을의 중간에서 있는 10월이 우리들에게 주는 선물이다. 조용히 소리 없이 금년에도 다시 찾아온 가을, 잊고 지낸 모든 것들에 대해 따듯한 손길을 내밀어보자. 미쳐 과거에 바쁘고 생각을 못해서 헤아리지 못했던 모든 마음들에게 미안하다고 인사를 하자. 힘들고 아파했던 시간들, 생각하기조차 싫은 상처 난 기억 넘어 우리함께 웃었던 시간들을 추억하며 차가운 바람에 마음을 다치지 않게 옷깃을 단단히 여미고 다음에 찾아오는 겨울 속으로 들어가자. 지금의 시절은 들판의 곡식이 무르익어가는 가을의 한복판이다. 갈색의 대지는 고독과 우수를 느끼게 하고 가을의 스산한 바람에 하나 둘 떨어지는 나뭇잎을 바라보고 있으면 인생의 무상함을 더불어 느끼게 된다. 발목에 덮이는 낙엽을 밟으며 산속 숲속 길을 마냥 혼자서 걸어 보고도 싶다. 그리고 또한 시골의 먼지 나는 비포장도로를 털털거리는 완행버스를 타고 논밭을 가로질러 어디론가 무작정 가서 이 아름다운 가을의 향기를 몸에 잔뜩 묻어 들이고도 싶다. 가을은 진정 저마다의 무딘 감정에 새로움을 불어넣어주는 계절임에는 틀림없다. 낯선 풍경을 찾아 무작정 거리를 떠돌게 하고, 그 누군가를 생각하게하며 사춘기적 감상에 젖어 창가에 우두커니 서서 한없이 공상의 나래를 펴고 황홀한 꿈속에 빠져들게 하는 것도 이 계절, 가을만이 주는 묘한 힘이다. 가을이 점점 그 진한농도를 넓혀가는 이맘때, 시골에서 태어나고 어린 시절을 보낸 나는 이때가 되면 논 가운데 우두커니 서서 벼이삭을 쪼아 먹으려고 날아드는 참새를 쫓기 위해 세워둔 허수아비를 생각하게 된다. 절기상으로 추분을 지나 한로 무렵이면 농부들은 곡식을 수확하느라 눈코 뜰 새 없이 바빠진다. 이런 때에 힘들여 애를 쓰며 가꾼 곡식을 야금야금 훔쳐 먹는 불청객이 있으니 그 녀석들이 바로 참새다. 그 참새들을 쫓기 위해 허수아비를 세우는 농부들의 마음을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도시에서 오랫동안 생활 속에 부대끼며 살아온 도시인들일지라도 이런 허수아비와 참새를 보면 자연스레 농촌의 들녘이 연상될 것이다. 코스모스가 줄지어 피어난 뚝방 아래로 누런 벼이삭이 고개를 숙이고 있는 모습이나, 논 한가운데 사람모양을 한 허수아비가 세워져있는 풍경은 정말로 목가적인 농촌의 정경이 아닐 수 없다. 허수아비의 모양은 다양하지만, 사람이나 동물모양을 하고 논, 밭에 세워져 나락을 먹기 위해 날아드는 새들을 쫓아낸다. 팔을 벌리고 선 사람에서부터 밀짚모자에 장대를 들고 선사람, 솔개나 매를 흉내 낸 모습까지 어찌나 해학적인지 웃음이 절로난다. 이젠 세월이 많이 흐르고 시대가 변하면서 허수아비의 옷매무새도 많이 달라졌다. 청바지를 입는가하면 얼굴에 짙은 화장을 한 허수아비도 눈에 띈다. 그 모습을 보면 사뭇 요염스럽기까지 하다. 이 허수아비는 가을들판의 곡식을 지켜주는 충직하고 익살스러운 존재로 인식되기도 하지만, 경우에 따라서는 좋지 않은 뜻으로 쓰일 때가 더 많다. 행동이 헤프거나 쓸모없는 사람을 우리는 허수아비라고 한다든지, 이해심이 전혀 없는 상대에게 설명하는 일을 (허수아비에게 말하듯 한다)고 하며, 누구라도 꾸미기 나름 이라는 뜻에서 (허수아비에게도 옷)이라한다. 허수아비는 남루한 옷차림 모습에서 오히려 더 우리에게 친근하게 다가온다. 곡식을 빼앗아가는 새들과 맞서 가을들녘을 지켜주던 그 허수아비가 마냥 그리워지는 이 즈음이다. 허수아비하면 참새가 떠오를 만큼 둘은 불가분의 관계이다. 허수아비는 참새로 인하여 그 존재가치를 부여받게 된다. 지금은 이런 모습들이 많이 사라졌지만 예전만하더라도 참새가 많이 날아드는 농촌의 들녘에는 어김없이 허수아비가 서 있곤 했다. 참새는 작고 힘없는 날짐승에 불과하지만, 시골에서는 농한기의 추운 겨울이 되면 초기지붕의 처마 밑에 굴을 만들고 한밤중의 추위와 눈보라를 피해 그 속에서 잠을 자고 있는 참새를 손전등으로 비춰서 손을 넣어 잡아내어 참새구이를 해 먹기도 했다. 세상의 고기 맛이 좋다고 해도 이 세상에서 이 참새구이만큼 맛있는 고기는 아마도 없을듯하다. 이제는 머나먼 옛날얘기로 동화속에서나 나올법한 추억속의 시골농촌 겨울나기 이야기가 됐다. 우리속담에는 참새와 관련된 내용이 많이 나온다. 민첩하고 꾀많은 사람을 일러 (참새 얼려 잡겠다)고하며 말이 많고 몹시 재잘거리는 사람을 (참새사촌)이라고도 한다. 우리 민속에서는 참새를 기쁨의 새로 받아들이고 있다. 참새가 열린 문으로 들어오면 잡지 않는 것이 원칙이다. 잡으면 흉사가 생긴다고 믿기 때문이다. 이는 품안에든 짐승은 죽이지 않는다는 선인들의 너그러운 마음을 말해주며, 새가 집안에 둥지를 틀면 가정에 평안과 기쁨이 온다는 생각에서 비롯된 것이다. 그러나 요즘의 농촌 들녘에서 참새는 점점 그 숫자가 줄어들고 있다. 조류학자들은 그 이유를 농촌의 주택개량으로 인해 볏집 처마 끝의 둥지를 잃었고, 해충방제를 위해 농약이 뿌려지면서 참새의 먹이인 딱정벌레, 나비, 메뚜기, 개구리등의 곤충과 동물들이 부족해졌기 때문이라고 했다. 참새와 허수아비, 가을을 가을답게 하는 정겨운 존재들이다. 깊어가는 가을밤, 귀뚜라미의 구슬픈 울음소리가 가을밤의 적막을 깨운다. 가을밤을 쉽게 잠드는 사람의 영혼은 메마른 영혼이다. 가을 달을 보고도 아무런 느낌이 없는 영혼은 이미 아름다움을 잃은 영혼이다. 어쩌면 인간으로서 느껴야할 삶의 아픔이나 부끄러움을 잃어버린 가엾은 영혼이다. 가을은 거두어들이는 계절이다. 그 혜택을 베풀면서 인간들이 지나치게 탐욕하거나 자만할지 몰라 그것을 방지하기위하여 진한 허무감을 느끼게 하는 정서를 함께 보내준 것이리라. 이제 우리들 일상의생활이 아무리 건조하고 복잡하고 권태로워도 잠시라도 거기에서 벗어나 가득가득 담겨오는 가을하늘의 싱싱한 호흡을 마음껏 내 것으로 하자. 그리하면 이 인생의 어렵고 어리석은 일들은 저절로 사라지리라. <1041>
문필가(탬파거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