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리스트 / 탬파거주> | |
사랑에는 세종류의 사랑이 있다고 한다. 이것을 성경에서 찾아보면 세개의 다른 단어로 되어있다. 아가페, 필리아, 에로스. 이 세가지 종류의 사랑이 이 세상에는 존재하고 있다고 한다. 아가페사랑은 하나님께서 인간을 향해 일방적으로 시작하신 신적인 사랑이고, 필리아 사랑은 성의 차별 없이 인간에게 허락된 사랑이므로 이성과 동성 사이에서 우정으로 나타나는 벗(친구)의 사랑이며, 에로스사랑은 이성간에 허락된 성적 사랑이다. 성경적인 측면에서 설명을 한다면, 아가페사랑은 불변하시는 하나님께서 시작하신 사랑이므로 그 무엇도 그 사랑에서 인간을 끊을 수 없고, 필리아 사랑은 성 차별 없이 주어진 사랑이기에 남, 여를 막론하고 우애를 가져야하며, 에로스 사랑은 이성에게만 허락된 사랑이므로 동성연애나 동성결혼은 여기에 해당되지 않고 있을 수도 없는 것이다.
사랑, 그것은 누구나 바라고 원하는 인간만이 소유하고 표현하며 하나님께서 특별히 인간들에게 허락하신 전유물이다. 사랑(Love), 도대체 그 사랑이란 무엇일까? 가장 쉽게 사용되는 정의는 ‘좋아하고 아끼는 마음’이다. 그러나 그것만으로는 불충분하다. 나는 오히려 이렇게 말하고 싶다. 사랑은 마음과 언어와 행동, 이 세가지가 복합적으로 작용하여 상대방을 이타적으로 배려하는 선한감정의 전 인적 섬김이라고……이러한 세가지가 구조적으로나 인격적으로 결합되지 않은 것은 사랑이 아니라고…….좋아하는 것과 사랑하는 것은 분명한 차이를 이룬다. 좋아하는 것은 색깔을 보거나 혹은 외형을 보고 좋아할 수 있다. 그러나 사랑하는 일은 그 세가지를 통해 극명하게 증명된다. 세가지중에서 어느 하나라도 이기적으로 드러나면 그 사랑은 잘못되었거나 식기 시작하는 증거이다. 앞에서도 말했듯이 고대 희랍에서는 이 사랑을 에로스, 스톨게, 필리아, 아가페로 나뉘었다. 다시 말하면 에로스는 감각적인 욕구와 갈망을 가진 열정적인사랑을 뜻한다. 여기에는 육체적인매력의 이끌림이 포함된다. 이 사랑의 열정은 은유적이고 신화적인 ‘사랑의 화살’ ‘사랑의 과녁’으로 묘사되기도 했다. 에로스는 정애(애정과 사랑)에 바탕을 둔 정열적인 사랑인데 비해 스톨게는 혈연관계의 사랑, 아가페는 무조건적인 사랑을 뜻한다. 세상에서는 육체적 에로스 사랑이 고상해보이고 때로는 불꽃이 튀며 광기적인모습을 보이기도 한다. 그러나 끊임없이 망아 황홀 ‘자아를 잃고 사랑에만 빠진다면’ 에로스는 결국 죽음으로 귀결된다. 그 에로스 사랑은 영원할 수 없기 때문이다. 이는 마치 에로스의 철학자 플라톤이 일생동안 진실재와의 만남을 추구한끝에 ‘삶보다 죽음이 바람직하다’는 기묘한 결론에 도달한 것도 이러한 의미일수도 있겠다. 하지만 사람중에 최고의 품위는 아가페사랑이라고 할 수 있다. 이 사랑은 상대방의 외모나 조건들 때문에 흔들리는 사랑이 아니다. 가장 고상하고 가장 고귀하며 가장 고 품격적인 최상위의 사랑이다. 그 어떤 이기심도, 욕심도, 조건도 요구하지 않는 순수한 희생의 사랑이다. 일명 바다같은 사랑, 하늘같은 사랑, 무조건적인사랑, 값없는 사랑으로 알려지고 있다. 아가페사랑이란 인종을초월하고 국가와 민족을 초월한 사랑을 의미하며, 자기 희생적인 사랑이며, 받기를 바라지 않으면서 표현되는 사랑이고, 원칙에 타협하지 않지만 따듯한 사랑이다. 세상에서 보면 많은 종교인들이 이 사랑을 실천한다고 하면서, 그리고 하나님을 섬기고 있고 예수그리스도의 제자라고 공공연히 주장하며 소리높이 외치고 있으면서 행동은 그 반대로 행하여온 것을 역사는 증명하고 있다. 현재의 그리스도교라고 주장하는 많은 종파중에서도 아가페사랑에 어울리지 않는 행동을 서슴없이 저지르고 있는 것을 많이 목격할 수 있다. 참 그리스도 교인이라면 아가페사랑을 말로만 외칠 것이 아니라 하나님과 예수님께서 실천하신 것처럼 행동으로 실천하고 모범을 보여야 할 것이다. 이러한 아가페사랑이 실천될 때 비로서 스토르게적인 가족 간의 사랑도 빛을 발하게 될 것이고, 필리아적인 우정과 애정도 더욱 확산되고 빛날 것이며 이성간의 에로스한 사랑도 순수하고 아름답게 정착될 것이라 생각이 든다. 사랑은 인생의 태양이다. 우리가 산다는 것은 즉 사랑하는 것이다. 우리는 살면서 사랑하고 사랑하면서 산다. 사랑은 인생의 주성분이다. 우리의 몸은 70%가 물이듯이 인간의 주성분은 사랑이다. 사랑은 인간생활의 중심 원리이고 근본가치이다. 사랑이 없는 인생을 생각해보자. 그것은 빛이 없는 태양과 같고 꽃이 없는 화원과 같다. 하나에서 하나를 빼면 무가 되듯이 우리의 인생에서 사랑을 뺀다면 빈껍데기 인생이 되고 만다. 사랑은 인간이 찾는 단어중에서 가장 위대한 단어이다. 우리가 살아가는데 인생의 불행은 대부분 두가지의 결핍에서 생겨난다. 첫째는 물질의 결핍에서 오고, 둘째는 사랑의 결핍이다. 돈과 물질이 없을때 우리는 고통을 느낀다. 우리의 생활에 사랑이 고갈되었을 때 우리는 참기 어려운 허무감과 고독감과 절망감을 느낀다. 사랑이 충만한 가정, 사랑이 가득찬 인간관계, 사랑이 넘치는 직장, 사랑이 흐르는 사회, 이것이 행복이고 희열이며 만족이다. 사랑은 인간의 최대의 힘이고 최고의 덕이며 최상의 보배인 것이다. 동서고금의 위대한 스승들이 한결같이 사랑과 자비와 인을 강조한 것은 결코 우연한 일이 아니다. 흔히들 기독교는 사랑의종교이고 불교는 자비의종교라고 말한다. 기독교에서 강조하는 아가페 ‘사랑’과 불교에서 강조하는 ‘자비’의 차이와 또한 이 두개념의 공통점을 설명해본다면, 공통점이란 자기사랑이 아닌 철저한 이타성과 사랑에 대한 무조건성과 무제한성, 그리고 힘의 강렬함으로 요약할 수 있다. 차이가 있다면 기독교의사랑은 하나님의 본성과 그리스도의 마음에 근거하고, 불교의 자비는 불타의 마음과 깨달음의 지혜에 기초하고 있다. 그러면 하나님 및 그리스도의 마음과 불타의 마음은 어떤 마음이며 어떻게 다른가? 하나님의 마음은 만인을 구원하시려는 무한한 아가페적 사랑의 마음이며, 예수그리스도의 마음은 모든 사람을 구원의 길로 인도하기위해 자신의 생명까지 주는 자기 희생적 사랑의 마음이고, 불타의 마음은 색계(현상세계)와 공계(본질세계)의 동일성, 즉 불이(Non difference)의 진리인 ‘연기의 법칙’을 간파한 무한한 지혜로부터 나오는 마음으로서, 모든 사람을 고통으로부터 제도(구원의 길)로 인도하려는 마음을 말한다. 이상과 같은 설명에서 우리는 기독교의사랑(아가페적사랑)인 하나님(그리스도)의 마음과 불교의 자비와 불타의 마음은 다같이 (세상의 모든 사람들을 구원의 길로 인도하려는 마음)이란 외연적인 공통점(유사성)이 있음을 발견할 수 있다. 아기페 사랑은 세상적인시각에서 볼 때 손해 보는 사랑이다. 우리에게 복음을 전해준 언더우드목사나 아펜젤라 목사는 우리민족을 위해 아가페사랑을 실천한분들이다. 1백여년전 언더우드목사가 고생을 하며 우리나라에 복음을 전하고 있을때, 멀리 미국에 있는 형으로부터 편지가 왔다. 그의 형 존언더우드는 타자기 회사를 만들어 사업이 크게 번창하던 때였다. 편지의 내용은 미국으로 돌아와서 형의 일을 도와달라는 것이었다. 고생스런 선교사역을 그만두고 미국으로 돌아가면 그에게는 풍요롭게 부자생활을 할 수 있는 삶이 기다리고 있었다. 그러나 그는 미국으로 가지 않았다. 세속적으로 볼 때 그는 큰 손해를 보았다. 그러나 그는 진정으로 우리 민족을 사랑하였고 ‘희생적인 아가페사랑’의 삶을 살았던 것이다. 1902년 아펜젤라 목사님을 태우고 목포를 향해 가던 작은 배는 군산앞바다에서 다른 배와 충돌했다. 그는 충분히 살아날 수 있었으나 어린 여자아이를 구하려 침몰하는 배로 뛰어들었다가 다시 나오지 못하였다. 예수님께서 ‘사람이 친구를 위하여 자기목숨을 바치면 이보다 더 큰 사랑이 없다’고 말씀하셨다. (요15:13) 아펜젤러목사님은 이 말씀을 실천한 사랑의 화신(천사)이셨다. myongyul@gmail.com <1031 / 07202016>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