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회칼럼> 목사의 감옥에서 탈옥한 아빠

최래원목사 / 올랜도 선한목자교회 담임
토요일 오전부터 막내와 친구들이 교회 인근 Park에서 청년부 특별활동을 가진다기에 그 전날 함께 답사를 하고, 필요한 것들을 구입한 후 토요일 오전 시간을 막내와 함께 보냈다. 목사에게 있어서 토요일은 그냥 주말이 아니다. 마치 철의 장막과 같은 시간이다. 누가 쳐 넣은 것은 아니지만 스스로 나만의 감옥 속에 갇히는 시간이기도 하다. 혼자만의 철저한 고독과의 싸움이 시작되는 시간이다. 한주간의 긴장감이 최고조로 상승되는 시간이며, 어떤 방해도 받고 싶지 않는 주일을 위한 초긴장의 시간이다.
어떤 목사님은 집에서 아이들 움직이는 소리 하나에도 신경이 날카로워져서 사모님이 아예 토요일이면 아이들을 데리고 밖으로 나가신다고 할 정도다.
사실 토요일은 주일의 성공적 예배를 가름하는 중요한 시간임에는 누가 토를 달 수 없을 것이다. 그래서 가급적 모든 전화도 끊고, 기도와 말씀 준비에만 전념하는 시간이다. 그때가 되면 주일 증후군이 슬며시 나를 찾아온다. 소화도 안 되고, 먹어도 속만 더부룩하다. 그래서 어느 때는 아예 먹는 것을 포기한다. 목사에게 토요일은 죽음을 맞이하는 이의 숭고하고도, 진솔하며, 가장 낮아지는 임종전의 사람과 같다.
정직히 말씀 앞에 앉아 자신을 말씀에 반추하고 회개와 자성과 때론 아! 하는 자괘감에 휩싸이기도 한다. 간혹 말씀 속에서 숨겨진 비밀이라도 발견했다 싶으면 남모를 희열과 손바닥을 치는 감격의 시간도 있지만 그런 경우는 그리 만치 않다.
난 이번 토요일 그 모든 부담감을 뒤로한 체 청년들과 함께 더 정확한 표현은 막내를 위해 Park으로 향했다. 처음엔 반나절만 약속했던 시간이 하루를 전부 허비해 버렸다. 물론 그렇게 시간을 까먹는다는 것이 뭘 의미하는지 알고 있다. 그건 새벽까지 주일 준비를 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과 함께 있고 싶었다. 굳이 말하자면 내 막내딸과 함께 시간을 보내고 싶었다. 이제 3주후면 12년 동안의 학교 교육을 마치게 된다. 큰 아이가 그랬던 것처럼, 둘째가 그랬던 것처럼, 이제 막내가 머지않아 우리의 품을 떠나게 될 것이다. 아니 떠나지 않는다 해도 18살 생일이 되는 그날 부모로부터의 독립을 선포하게 될 것이다. 그날이 그들의 독립기념일인 셈이다.
그렇게 하고 싶었던 것은 나의 소박한 한 가지 바램 때문이다. 그들에게 아빠란 존재가 그들의 기억에 잔잔한 감동으로, 버팀목이 돼주었던 존재로, 자기들을 사랑해주고, 함께 해주었던 아빠로 기억해 주기를 바랬기 때문이다. 이제 막내의 학창시절은 일평생 다시 돌아오지 않을 것이다. 단 한번뿐이다. 그 단 한 번의 기억 속에 아빠가 존재하고 싶었다.
목사란 아이들에게 물려줄 것도, 그들의 앞날에 공헌 한 것도 없지만 한 가지는 그들이 받아야 할 사랑만큼은 풍성하게 채워주고 싶었다. 그들이 받아야 할 인격적 존중과 자식으로서의 가치만큼은 가장 큰 선물로 안겨 주고 싶었다. 그런 생각을 하다가 조금 더 큰 욕심이 생겨버렸다. 내 아이가 아빠를 통해 작지만 하나님 아버지를 보았으면 하는 마음이었다. 목사에겐 너무나 바쁘고 정신없는 고뇌의 시간이지만 아빠에겐 그저 자식과 함께할 수 있어서 더 값지고 보람된 어느 한 토요일의 한가한 오후의 여유로움의 시간일 뿐이다. 아무리 바빠도 그 모든 것을 뒤로한 체 자신을 위해 시간을 내줄 수 있는 아빠가 기대하는 것은 “하나님 아빠가 바로 너희들에게 그런 분이야!” 라는 것을 알려주고 싶은 마음이 생긴 것이다.
그분은 자녀들을 위해 시간을 함께 보내는 것을 결코 미루시거나, 바쁘다는 이유로 약속을 깨트리시거나, 자녀들과 한 번도 함께 시간을 가져본 적이 없다거나, 자녀들이 무엇을 원하는지조차 모르시는 그런 분이 아니시다.
하나님 아빠는 그분의 자녀들과 함께 시간을 보내시기 위해 인류의 가장 중대한 현안을 결정하는 중대한 천상의 회의라 할지라도 뒤로 미루시는 분이시다.
하나님 아빠의 가장 우선적이고, 중요한 일은 그분의 자녀들이다. 그리고 그 자녀들을 위해 시간을 내신다. 바로 이러한 하나님 아빠를 그들이 배울 수 있기를 원했다.
그들이 앞으로 자신의 길을 혼자 걸어 갈 때도, 독립을 선언하고 어엿한 숙녀로 자라 날 때도, 이제 육의 아버지는 그들의 곁에 늘 있지 못하지만 하늘 아버지께서는 항상 그들과 함께 시간을 보내주실 것이고, 함께 놀아 주실 것이며, 파티에도 가주시고, 힘들고 어려울 때 그들의 마음을 토닥거려 주실 것이며, 그들의 눈물을 닦아 주시고 용기를 주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제 아이들과의 시간은 점점 추억이 되어간다. 사진첩에서나 그때의 추억을 기억해 낼 수 있을 정도다. 우리에게 추억이었던 아이들은 이제 자라 그들이 맞닥뜨리는 현실 속에서 살게 될 것이다. 힘들고 어렵고, 포기하고 싶을 때 함께해 주었던 아빠를 기억하고 다시 용기를 내 좌절을 딛고 다시 일어나 줄 수 있다면 나의 삶은 결코 후회 없이 살았다고 자부하게 될 것이다.

영국 문화원에서 세계 102개 비 영어권 국가 4만 명을 대상으로 이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영어단어를 앙케이트로 조사했더니 가장 아름다운 영어단어로 ‘Mother(어머니)’ 가 뽑혔다고 합니다. 두 번째 아름다운 영어단어가 ‘Father(아버지)’같았으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마는 Father가 아니고 ‘Passion(정열)’ 이었고, 세 번째는 ‘Smile(웃음)’, 네 번째는 ‘Love(사랑)’이 뽑혔습니다. 안타깝게도 Father는 다섯 번째도 열 번째도 없었다고 합니다. 10위는Tranquility(평온)이었고, 20위는 Rainbow(무지개) 50위는 Kangaroo(캥거루)
정말 충격적인 사실은 Father(아버지)는 단어가 캥거루 보다 못하다는 것입니다. 더 놀라 운 것은 Father(아버지)라는 단어는 70번째에도 들지 않았다고 합니다.

아버지는 큰 일이 나면 자기 먼저 살겠다고 먼저 도망갑니다. 그리고 살았다 싶으면 그때 가족을 찾고 걱정을 합니다. 반면 어머니는 자신은 죽어도 자녀들과 가족을 먼저 살리고 봅니다. 어느 날 간밤에 헛간에 불이 나서 나가보니 수탉들은 다들 밖으로 뛰쳐나왔는데 병아리를 품은 어미 닭은 까맣게 타 죽고 어미 품속의 병아리는 살아남았다고 합니다.
물론 어머니의 존재를 무엇으로 그 순위를 매기겠습니까? 그 사실은 만고불변의 사실 입니다. 그런데 왜 아버지란 존재는 모든 사람들에게 잊혀진 단어로 남겨졌을까요? 사람 들 속에 아버지는 어떤 존재이며, 어떤 단어로 연상될까요? 상처, 아픔, 가족을 버리고 떠나버린 자, 자기 살겠다고 어린 병아리들 버리고 도망간 존재?
그래서 어쩌면 세상은 진짜 아버지를 잃어버리고 살고 있는지도 모른다. 아니 아버지를 생각하고, 기억하고 싶어 하지도 않는 그런 존재가 되었다. 그것이 세상이 하나님 아버지를 필요로 하지 않는 이유며, 기억하고 싶지 않는 이유이자, 아버지의 존재를 애써 지워버리려고 하고 있는 모습이다.
우리에겐 아버지가 필요합니다. 자녀들의 곁에서 떠나버린 아버지를 다시 자녀들의 곁으로 오게 해야 하고, 어떤 이유에서든지 아버지의 곁을 떠나버린 자녀들을 다시 아버지 곁으로 오게 해야 한다. 어머니가 희생의 본이라면 아버지는 친밀감을 배우게 해주는 이름이다. 아버지는 건강하고 좋은 관계 맺는 것을 배우게 해 준다.

목사란 이름을 벗고 막내딸의 아빠로 존재했던 토요일, 그날 난 성경에서 배울 수 없었던 진짜 아버지 됨이 무엇인지를 깨닫게 되었다. 그날 난 아이들과 함께 했던 바로 그곳에서 그 주일에 전해야 할 말씀을 배웠다. 내가 스스로 만든 토요일의 감옥에서 탈옥해 자유롭고, 환하고, 신나게 웃고, 뛰놀고, 맛있는 것 먹으면서 가장 자유로운 탈옥수가 될 수 있었다. 딸아이의 아빠로서의 시간을 통해 난 하나님 아빠와 더 친밀하고 친근감 있는 시간을 맛볼 수 있었던 시간이었다. 목사의 감옥에서 탈옥한 아빠가 한번 되어보세요? 얻는 게 참 많습니다. <974/050520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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