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명열칼럼> 바보들의 행진

<칼럼리스트 / 탬파거주>
이 세상에서 제일가는 바보는 누구일까? 과거, 바보 미생의 믿음과 약속에 대하여 몇 년 전에 글을 써 올린 적이 있다. 세상의 3대 바보를 미생지신(尾生之信), 각주구검(刻舟求劍), 연목구어(緣木求漁)에 나오는 남자라고 한다. 이것은 고사 성어에 나오는 말이지만 우리 모두가 의미 깊게 음미해볼 필요가 있는 말들이다.
먼저 미생지신, 즉 미생의 믿음이라는 뜻이다. 미생이라는 남자는 사랑하는 여인을 다리아래서 만나기로 했다. 약속대로 정한시간에 그 장소, 다리 아래서 연인을 기다렸으나 그 여인은 오지를 않는다. 장대비가 쏟아지고 장마가 져서 다리 밑에서 기다리는 미생의 다리, 허리, 가슴, 목까지 물이 차오르는데 사랑하는 여인은 오지를 않는다. 그러나 미생은 자리를 떠날 수 없었다. 연인과의 약속을 지키기 위해서다. 결국 미생은 물에 잠겨 떠내려가 익사하고 만다. 다음은 각주구검의 남자에 대한 얘기다.
배를 타고 가다가 칼을 바다에 빠뜨린 한 남자가 있었다. 급히 칼을 건져보려 했지만 실패하고 만다. 그 남자는 품에서 다른 칼을 꺼내어 배위에 무언가 새기고 있다. 즉 칼을 빠뜨린 지점을 기억해 두기 위하여 표시로서 칼로 배 위에다가 새겨둔다. 그러나 배는 이미 칼을 빠뜨린 지점을 멀리 떠나왔고, 배위에 아무리 잃어버린 지점을 새겨놓은들 소용없는 짓이다. 마지막 연목구어에는 제나라의 선왕과 맹자가 나온다.
다른 나라를 쳐서 영토를 넓히려는 선왕에게 맹자는 말한다. “이와 같은 욕심을 추구한다면 나무에 올라가 물고기를 구하는 것과 같습니다” 선왕은 묻는다. 맹자는 답한다. “나무에 올라가서 물고기를 구하는 것은 물고기를 얻지 못하더라도 재앙이 없지만 이와 같은 욕심을 추구한다면 마음과 힘을 다해서 하더라도 후일에는 반드시 재앙이 있을 것입니다”
오지 않는 여자를 기다리는 남자, 바다 물에 칼을 빠뜨리고 배에 잃어버린 지점을 새기는 남자, 나무에 올라가 물고기를 잡으려하는 남자, 이들은 공통점이 있다. 하나같이 뭔가를 구하려했던 사람이다. 그리고 무모했다. 한마디로 현대말로치자면 바보짓을 한 것이다. 바보란 지능이 떨어져 정상적으로 판단하지 못하는 사람이고, 못나고 어리석은 사람을 얕잡거나 욕으로 일컫는 말이기도 하다. 다시 말하면 각주구검이란 미련해서 융통성이 없다는 뜻이고 객관성이 없어 외곬으로 나가며 임기응변을 모르는 고집불통이다. 시세의 추이도 모르고 눈앞에 보이는 것만을 고집하는 사람이 이 부류에 속한다. 연목구어 역시 머리가 단순한사람이 도저히 불가능한 것을 헛되게 애쓰며 무익한일을 굳이 하려고 한다는 뜻으로 수중로월(水中撈月=물속에서 달을찾다), 해저로침(海底撈針=바다 밑에서 바늘을 건진다)라는 말과 같이 쓰인다. 미생지신 역시 융통성이 없이 약속만을 굳게 지키는 것을 이르는 말로 어리석음을 뜻한다.
이 세상을 보면 바보는 얼마 없고 모두가 똑똑하고 현명한 사람들만 살고 있는 것 같다. 정치인들의 경우를 봐도 너는 틀렸고 바보 같은데 나만 옳고 나만 똑똑하단다. 국민들 역시 너는 틀렸고 나만 옳다고 한다. 노동자도, 사업주도, 여당도, 야당도, 이웃도, 친구도, 교사도, 학부모도, 모두가 보면 너는 바보 같고 우둔하며 나만 똑똑하다고 한다. 지금의 우리사회는 모두가 똑똑한 사람만 있고 바보는 없다. 그렇다면 나만이라도 바보가 되면 세상을 좀 더 편하게 살수가 있지 않을까? 생각도해 본다.
여기에 어느 바보목사님의 생애를 이야기해드리겠다. 그 목사님은 참으로 바보처럼 세상을 살다가 가셨다. 가장 좋은 옷을 입을 수 있었는데도 그는 바보처럼 좋은 옷 대신에 소매가 닳아빠진 남루한 옷을 입었고, 멋지고 고급스런 차대신 버스를 타거나 남의 차를 빌려 타곤 했다. 하나뿐인 아들에게 큰 교회를 대물림해주라는 많은 사람들의 권유를 뿌리치고 바보같이 사랑하는 외아들을 먼 외국으로 쫓아내다시피 했다.
새까만 후배목사들이 통일운동에 앞장선다면서 북녘 땅을 제집 드나들듯이 마음대로 들락거릴 때도 그 목사님은 참으로 바보처럼 ‘저 많은 실향민들이 고향엘 가지 못하는데 나 혼자만 가겠는가?’라면서 끝내 자기가 태어나고 자란 고향, 북녘 땅을 한 번도 밟아보지 못하고 세상을 떠나셨다.
사자 후 같은 명 설교도, 가슴을 쥐어뜯게 하는 감동적인 웅변도 할 줄 몰랐던 그는 그저 바보처럼 자신의 몸으로, 자신의 손과 발로, 그리고 자신이 겪은 삶과 애환을 설교하고 선포했을 뿐이다. 좋은 소식을 전하는 자의 아름다운 입이 아니라 좋은 소식을 전하는 자의 아름다운 발을 가졌던 이 바보 같은 목사님의 이름은 한경직 목사님이었다. 예수님의 생애를 본받아 그 목사님은 참으로 바보처럼 세상을 살다가 가셨다.
예수님 역시 참으로 바보처럼 진실 되게, 바보처럼 검소하게, 바보처럼 남과 죄인과 가난하고 병든 자, 그리고 세상 모든 사람들을 위하여, 바보처럼 순종하며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심으로 바보처럼 그들 모두를 용서하셨다. 이세상의 인류역사를 통틀어 가장 역사에 남을 지상 최고의 바보는 예수님뿐이며, 그분은 이 세상에서 가장 거룩하고 위대하시며 훌륭하신 바보였다.
나는 가끔 이 세상을 바보같이 사는 것이 더 현명하게 사는 법이 아닌가 생각을 해 본다. 눈앞의 한 푼과 욕심에 절절하며 마음 졸이면 삶이 너무나 각박해지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누구나 위에 서길 원하고 언제나 위를 향한 일념으로 세상을 살고 있다. 그러나 위를 오르기란 너무나 어렵고 아래 또한 내려가기가 힘이 든다. 그렇다고 중간에서도 살지 못하는 번뇌가 뇌와 가슴을 조인다. 모두들 난리치며 위를 향할 때 나만이라도 마음 편히 갖고 내려가서 살아보자. 그래서 작은 세상의 주춧돌처럼 살아가자. 세상의 모든 것은 결국 어떠한 마음으로 거기에 서있느냐가 중요한 문제이다.
바보처럼 그냥 그렇게 살자. 똑똑한 바보들보다는 바보 같은 바보가 나은 것이기에……………!   myongyul@gmail.com <961/012820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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