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명열칼럼> 간 큰 남자

<칼럼리스트 / 탬파거주>
얼마 전 나는 시카고에서 오신 손님들과 함께 Key West에 여행가는 길에 점심때가 되어 어느 식당에 들렀다. 식사를 하던 중 나는 집사람에게 커피가 너무 써서 그러니 가까이 있는 설탕그릇을 갖다 달라고 부탁을 했다. 집사람은 일어나서 몇 발자국을 걸어서 카운터에 놓여있는 설탕그릇을 갖다 주었다. 그때 식탁에 둘러앉아 식사를 하던 한분이 “아니 회장님, 그건 웨이츠레스에게 시키시지 왜 사모님께 시킵니까?. 회장님, 참으로 겁도 없고 간도 크시네요.”하고 웃으며 농담을 했다. 요즘 항간에 간 큰 남자 시리즈가 유행한다더니 집사람에게 편의상 부탁을 한 것이 다른 사람들에겐 아내에게 겁도 없이 심부름을 시키는 간 큰 남자로 비쳐졌나보다.
간(肝), 우리 몸에는 다른 기관들도 많은데 왜 하필이면 그 소중한 간을 비유하여 이러쿵저러쿵 농담의 말을 지어내는 것을 보면 동양의학의 사상적 경향 때문이라 생각이 든다. 서양의학과는 달리 과거의 우리나라 한국에서는 동양의학을 중요시했고 인체를 ‘우주의 축소판’으로 보았던 경향이 있다. 즉 의학의 기술보다는 철학을 좀 더 중시해왔던 것이다. 그러므로 동양의학에서는 신체의 어느 부분마다 각 부분이 담당하는 정신적인 어떤 기능이 있다고 보는 현저한 경향이 있는데, 그런 생각의 체계 속에서 보통 간이 사람의 배짱을 담당한다고 보는 모양이다. 그런 연유로 좀 배짱이 두둑하게 밀어붙이는 사람을 흔히 간 큰사람이라고 한다. 이 세상에는 어려운 일이 두 가지가 있다고 한다.
첫 번째가 내 생각을 남의 머리에 넣는 일이고, 두 번째는 남의 돈을 내주머니에 넣는 일이다. 첫 번째 일을 하는 사람을 선생님이라 부르고, 두 번째 일을 하는 사람을 사장님이라 부른다. 그리고 이 어려운 일 두 가지를 한방에 다 하는 사람을 마누라라고 부른다. 그러므로 선생님에게 대드는 것은 배우기 싫은 것이고 사장님에게 대드는 것은 돈 벌기 싫은 것이고 마누라에게 대드는 것은 살기 싫은 것이다.
오늘도 살아남기 위해 몸부림치는 남편들을 위하여 잠시라도 웃으며 희망을 가지라는 의도에서 우스갯말을 써 보고자한다.
현대판 간 큰 남자는 다음과 같다고 한다.(어느 잡지에서 인용)
1) 아내가 곤히 잠들어 있는 집으로 밤늦게 술친구를 데리고 오는 남자.
2) 벌어오는 것도 시원찮으면서 음식 타박하는 남자
3) 벌렁 드러누운 채 이것 가져와라 저것 가져와라 부인에게 시키는 남자
4) 외출한 아내가 밤늦게 돌아올 때까지 밥상을 차려놓지 않은 남자
5) 아내가 때리는데 안 맞겠다고 피하는 남자
6) 아침설거지를 퇴근 후에 하겠다는 남자
7) 화장하고 외출하는데 어디 가느냐고 묻는 남자
이상의 말들은 유머에 불과한 간 큰 남자라는 단어로 표현했지만 실제로는 상당한 우리사회 내면의 가정적 이야기를 소재로 하여 문제점을 내포하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실제적인 면에서 이렇게 억압받고 아내의 눈치를 보며 구속적 입장에서 숨죽이고 사는 남편이란 많지 않으리란 생각이 든다.
다만 여성들의 사회적 지위가 과거보다 상대적으로 높아지면서 여권신장에 위기의식을 느낀 남성들이 가부장제 유지를 위한 바람을 이러한 우스갯소리로 표현한 것이라고 보고 싶다. 여성의 남성화, 남성의 무력화가 세계적인 추세로 떠오르고 있는 요즘 간 큰 남자 시리즈는 한국이나 미국이나 그 추세가 세계적이면서도 예외가 아님을 생생하게 드러내고 있다. 30~40대 가장들 사이에서 아내와 관련해서 떠도는 가장 보편적인 말 가운데 하나는 ‘아내가 남편 알기를 우습게 안다’는 것이다. 페미니즘논의가 우리사회에서 무시할 수 없는 화두의 하나로 떠오르고 미시족이라는 신조어를 만들어내리만큼 여성의 사회진출이 발해진 요즘, 30~40대 이상의 가장들은 의식과 몸의 괴리로 심각한 갈등을 겪고 있다. “부부는 평등하다”라는 변화하는 사회가 요구하는 명제를 의식으로는 받아들이고 있으나 몸은 실제적인 면에서 따라주질 않는다. 가장 변하기 쉬운 것이 의식이라면, 가장 변하기 어려운 것은 몸이라고, 3년 전 내가 산수회를 이끌고 있을 때 회원인 40대 가장인 김모씨가 한말이다.
근엄한 아버지와 순종하는 어머니가 있는 가부장적 질서에서 자란 한국의 중년 가장들은 몸에 밴 그 관성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한 것이 사실이다. 잡지나 매스컴을 통해 사회적으로 유행되는 이 농담시리즈는 지배와 피지배로 유지되어오던 부부사이의 관계가 크게 흔들리고 있음을 보여준다. 그 흔들림 자체가 남성 가장들에게는 심각한 피해의식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는 것이 현실의 사회현상이다. 지금세대와 사회의 남편들은 아내를 주눅 들게 할만한, 즉 가족보다는 사회를 위해서 일한다는 대의명분을 잃어버렸다. 남성들의 사회활동을 묶던 보편적인 대의명분이 사라진 틈을 채운 것은 무한경쟁뿐이다. 사회가 개인에게 점점 더 많은 것을 요구하는 추세로 바뀌어 가는 속도만큼이나 남자들은 점점 더 왜소해지는 것이다. 가정 내의 부부관계가 한 사회 속에서 남녀의 지위를 검증할 수 있는 표본이라고 본다면, 간 큰 남자 시리즈는 기존의 관계가 무너지는 사회분위기를 잘 반영해 보여주고 있다.
이 농담의 시리즈를 보면 그 농담 속에 담긴 웃음에 우리사회가 ‘가정을 가진 남편들이 어쩔 수 없이 공감한다’는 것을 증명한다. 그러나 그 웃음 속에는 남편의 가부장적 권위를 대신할만한 바람직한 역할은 보이지 않는다. 남성지배 문화에 대한 반란은 시작됐으나 오늘날의 대부분의 남편들은 그 반란 앞에서 대항하지 못하고 피하지도 못한 채 엉거주춤하고 있다.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커져버리거나 혹은 아예 없어져버린 간을 생각하고 있는 것이다.
이젠 부인이 소박맞던 시대는 가고 남편이 내쫓기듯 결별을 요구받는 사례도 적지 않게 나타나고 있다. 세태는 ‘탈 권위’로 달라졌는데 구태적인 입장으로 가부장적 완력을 앞세우고 권위만을 내세우다가 가정에서 소외당하고, 결국 ‘가정 민주화’라는 가족들의 요구에 저항하다 이혼을 강요당하는 경우가 비일비재하다.
특히 요즘사회에서는 아내에게 완력을 시위하거나 다른 여자에게 한눈을 파는 행위는 도저히 용납할 수 없는 범주에 속하며 스스로 무덤을 파는 행위임을 명심해야한다. 최근 한국의 통계청발표에 의하면 얼마 전까지만 해도 이혼부부의 동거기간이 짧을수록 이혼율이 높았지만 지금은 함께 살만큼 살아서 웬만한 갈등을 체념으로 승화시킴으로써 이혼가능성이 현저히 떨어졌다고 판단되는 장년 및 노년층의 이혼이 급증하고 있다고 한다. 황혼이혼을 결행하는데에는 많은 고민과 아픔이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시대는 권위와 완력을 앞세우는 남편의 관성을 용납하지 않고 있다. 이제 결론적으로 말한다면 세상에는 간 큰 사람(남자)이 따로 있는 것은 아니다. 자신의 위치가 어떤 위치이며 주위의 환경이나 자기의 현실을 망각한 채 돈과 명예와 세상의 유혹, 그리고 죄악에 묻혀서 올바른 길을 가지 못하고 사회나 가정에 위배되는 행각을 일삼는 사람이 바로 간 큰사람이다. 아내의 인정과 격려는 남편이 이루려는 꿈을 성취시키는 촉매제이다. 위대한 인물 곁에는 대개 묵묵히 따라주고 격려해주는 아내가 있다. 아내는 남편에게 용기와 희망을 주는 존재이다. 아내의 최대 일은 남편의 자존심을 지켜주는 일이다. 타인의 무시는 무시할 수 있지만 아내의 무시는 무시무시하다. 아내의 진짜가치는 남편의 격려자가 되는 것에 있다. 은밀한 곳에서 남편을 위해 기도하는 아내는 누구보다 귀하고 소중하며 값진 아내이다. 이러한 아내가 있는 가정은 남편들이 간에 대해서 걱정을 하지 않아도 된다.  myongyul@gmail.com <956/121720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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