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명열칼럼> 막걸리 이야기

<칼럼리스트 / 탬파거주>
지난 년 초 주말, 초가을 같은 따사하고 파란하늘만 비치는 Sky Bridge 위에 가서 낚시를 했다. 추운 북쪽지방의 여행객들이 연말 연휴를 맞아 추위와 한파를 피해 따듯한 이곳 플로리다로 많이들 찾아왔다.
여름에는 플로리다가 무척 덥지만 한겨울 5~6개월 동안은 온화한 날씨와 쾌적한 환경으로 이곳으로 여행 오는 사람들이 참으로 많다. 그래서 그런지 낚시터에는 낚시를 좋아하는 사람들이 멀리서부터 많이 와서 낚싯줄을 던져놓고 있다. 내가 낚시를 하는 중에 바로 옆에 있는 사람을 보니 한국 사람이었다.
서로가 인사를 나누고 보니 그들은 멀리 캐나다의 토론토에서 이곳까지 차를 갖고 여행 온 한인부부였다. 추운 곳을 피해 모처럼 이곳까지 여행을 오게 된 동기며 살아가는 생활이야기, 동포사회이야기, 생필품값 이야기 등 이 얘기 저 얘기를 나누며 고기가 입질이 없는 동안 의자에 앉아 휴식을 취하며 서로가 싸 갖고 온 음식을 나누며 정담을 주고받았다. 그런데 그분이 갖고 온 음료수 중에는 막걸리가 눈에 띄었다.
캐나다에 이민 오기 전에 그분은 한국에서 양조장을 경영했다고 한다. 이민을 와서는 토론토에서 세탁업을 하는데, 자기는 남이 만든 화학주인 상업용 술은 사먹지 않고 자기가 직접 자기만의 비법으로 막걸리를 담가 먹는다고 했다. 그러면서 자기의 비법으로 집에서 직접 만든 막걸리를 먹어보라면서 잔을 권한다.
엊그제가 양력설인데 토론토에서 오면서 아이스박스에 막걸리를 먹을 만큼 갖고 왔다며, 예사 술보다는 색다른 맛이 나니 마시라고 권한다. 막걸리를 먹은 지도 오래됐는지라 호기심 반, 시음삼아 한 컵을 마셨다. 조금 전에 내가 잡아 올린 살아 움직이는 도미를 한 마리 회를 떠서 함께 안주로 먹으니 금상첨화로 맛이 기가 막힐 정도로 좋았다. 감미로우면서도 그윽하며 톡 쏘는 듯한 막걸리 맛은 다른 어느 곳에서도 맛볼 수 없는 향기롭고 은은하며 잘 익은 식혜와 포도주를 섞은 듯한 그런 오묘하고 맛있는 천하일미의 막걸리였다.
막걸리는 아주 옛날부터 우리나라 고유의 전통술이며 음료수였다. 곡주가 익어 청주와 술지게미를 나누기 전에 막 거른 술이라고 해서 막걸리라고 부른다.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술로서 삼국사기 기록에도 나와 있다. 고려 때에는 막걸리용 누룩을 배꽃이 필 때에 만든다고 해서 이화주(梨花酒)라는 낭만적인 이름이 붙었고, 이외 맑지 않고 탁하기 때문에 탁주라 부르기도 하며 식량대용, 또는 갈증해소로 농부들이 애용해왔으므로 농주(農酒)라고도 한다. 곡주의 청탁(淸濁)은 숙성주의 여과에 의해서 구별되며 막걸리는 탁하게 양조한 흰백색의 주류로서 좋은 막걸리는 단맛, 신맛, 매운맛, 떫은맛이 잘 어울리고 적당한 감칠맛과 청량감이 있어야한다. 또한 주정도수는 6%로 적당한 도수이어야 하며 영양분이 풍부해야 좋은 막걸리라 할 수 있다. 막걸리에는 우리의 애화노(哀禍勞)와 정이 담겨져 있는 것이다. 막걸리는 스트레스를 풀기 위해 가장 합당한 음료수라 할 수 있는데 그 이유는 첫째 알코올 도수가 적당해 몸에 부담을 주지 않으며 둘째는 사람에게 필요한 여러 가지 영양소를 갖추고 있기 때문이다.
조선 초의 명상 정인지는 젖과 막걸리는 생김새가 같다고 하고, 아이들이 젖으로 생명을 키워나가듯이 막걸리는 노인의 젖줄이라고 했다. 정인지를 비롯하여 문호 서거정, 명신 손순효 등은 만년에 막걸리로 밥을 대신했는데 병이 없이 장수했다. 노인의 젖줄이라 함은 비단 영양 보급원일뿐 아니라 무병장수의 비밀을 암시하는 것 이기도하다. 조선조 중엽에 막걸리를 좋아하는 이씨 성의 판서가 있었다. 언젠가 아들들이 “왜 아버님은 좋은 약주나 소주가 있는데 유독 막걸리만을 좋아하십니까?”하고 물었다. 이에 이판서는 소(牛)쓸개 세 개를 구해오라고 했다. 그 한 쓸개주머니에는 소주를 붓고, 다른 한 개의 쓸개주머니에는 약주를, 그리고 나머지 쓸개주머니에는 막걸리를 가득 채우고 처마 밑에 두었다. 며칠이 지난후에 이 쓸개주머니를 열어보니 소주담은 주머니는 구멍이 송송 나있고, 약주담은 주머니는 상해서 얇아져있었다. 그러나 막걸리를 담은 주머니는 오히려 이전보다 두꺼워져있었다.
막걸리에 대한 옛사람들의 막걸리 오덕(五德)에 대한 이야기이다.
1) 취하되 인사불성만큼 취하지 않음이 一德이오.
2) 새참에 마시면 요기 되는 것이 二德이며
3) 힘이 빠졌을 때 기운을 돋우는 것이 三德이다.
4) 안되던 일도 마시고 넌지시 웃으면 되는 것이 四德이며
5) 더불어 마시면 응어리 풀리는 것이 五德이다.
옛날 관가나 향촌에서 큰 한잔 막걸리를 돌려 마심으로써 크고 작은 감정을 풀었던 향음(鄕飮)에서 비롯된 것이 다섯 번째 덕일 것이다. 내 인생의 소중 한사람과 허심탄회하게 마음을 열고 막걸리한잔 나누면 어떨까?
얼마 전에 보냈던 연말연시에는 으레 술자리가 많아지는 시기이다. 음주운전은 절대로 하지 말도록 하며 과음과 폭주 또한 삼가야 할 중요사항이다. 인생이란 어차피 홀로 걸어가는 쓸쓸한 길이라지만 내가 걷는 삶의 길목에서 그래도 평생을 함께 걷고 싶은 사람을 만나고 싶다. 사랑하는 이를 만나기보다는 연인도 아닌 그렇다고 친구도 아닌 그저 편안한 사람을 만나서 막걸리 잔을 마주하고 인생살이 살아가는 이야기들을 격의 없이 나누고 싶다. 고단하고 힘든 날에 마음으로 다가가면 살포시 내 등을 토닥여주는 다정한 사람을 만나고 싶다. 부족한 내가 위로해주기보다는 그의 위로를 더 많이 받아 가끔은 나보다 더 나를 아껴주는 마음이 넓은 그러한 사람을 만나 가끔은 이렇게 술잔을 마주하고 마음의 위로를 받고 싶다. 기도로서도 채워지지 않는 허약한 부분을 어느 한사람의 애틋한 마음을 만나서 기쁜 날 보다는 슬픈 날에 불현듯 막걸리 병을 허리에 차고 찾아가면 보듬어주는 따듯한 사람을 만나고 싶다.
이렇게 평생을 마음으로 만나다가 어느 날 홀연히 바람처럼 사라지는 날, 죽음에 이르러서는 마음이 이별을 못하니 막걸리 잔을 앞에 두고 교배(交盃)를 하며 취하도록 마시다가 그가 죽음에 이르는 날이 먼저라면 꺼이꺼이 울면서 사별가(死別歌)라도 진심으로 불러주고 싶다.
인생의 쓴맛, 단맛 다 겪으며 희노애락의 장단 속에 살만큼 살다가 나이가 지긋해져서 마시는 막걸리한잔은 그리움의 술이고 외로움의 술이며 살고자하는 욕망의술이다. 숨이 목전까지 다가왔을 때 내뱉을 곳을 찾지 못해 감정을 가라앉혀 주는 울분의 술이기도 하다. 암울하고 캄캄한 인생의 굴곡 터널 속에서 길을 찾지 못하고 헤매다가 돌부리에 걸려 털썩 주저앉은 한탄의 술이기도 하다. 가는 세월 잡지 못하고 오는 대로 차곡차곡 싸놓은 인생의 나이테 속에서 못내 마음대로 살아오지 못한 아쉬움이 잠재된 슬픈 눈물의 술이기도 하다. 그러므로 나이가 들어 마시는 이 막걸리한잔은 술이 아니라 그것은 인생을 마시는 것이다.
저물어가는 인생을 재촉하며 새해를 밝히는 눈부신 햇살 속에 아득히 멀리서 봄은 천천히 다가오건만 이제 우리네 힘없고 보통사람들인 서민들의 마음에도 행복이 시작되길 간절히 빌어본다.
올해는 작년보다 나은 잘 살아지는 해로……….
<myongyul@gmail.com>  913/012220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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