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명열칼럼> 애수(哀愁)의 계절

<김명열칼럼> 애수(哀愁)의 계절

청산(靑山)은 어찌하여 만고(萬古)에 푸르며 유수(流水)는 어찌하여 서야(書夜)에 긋지않고 우리도 그치지 말고 만고상청(萬古常靑) 하리라고, 읊은 퇴계 이황의 시조를 연상하여 삶의 의미를 생각해 본다.

이러한 만추의 계절인 가을에는 애수(哀愁)를 느끼고 명상하는 것으로 알고 있다.

모든 계절이 다 나름대로 매력을 지니고 있다지만 가을이 풍요로운 계절이라 해서 저절로 풍요로워지는 것은 스스로 가을빛에 물들고 스스로 높고 푸르른 하늘처럼 마음을 정갈하게 다듬어야 한다. 가을을 가을답게 살아가는 일은 가을에 걸맞게 살아가는 몸짓일 것이다.

어둠은 빛으로 풀고 마음은 사랑으로 풀어야 한다. 삶이 비록 힘겨워도 가슴에는 넉넉한 마음을 담아야 한다. 심원(心願)한 풍광속에 자리한 심산유곡을 찾아 때묻은 영혼을 씻고자 하는 사람들, 거기에는 영적인 안식과 평화가 깃들어 있다.

몇주전 10여일 동안 심산유곡, 깊은 산속을 거닐며 많은 것을 생각하고 사색하고 상념속에 젖으며 애수에 젖었었다. 11월을 마지막 깃 점으로 가을은 소리없이 떠나갔다. 플로리다의 12월 하늘은 더욱 높아졌고 구름은 한층 가볍게 새털처럼 우주에 퍼진다. 아침 해가 떠오르는 여명에나 해가 지는 석양에 신비하게 열리는 빛의 스펙트럼은 황홀한 우주 쇼다. 한편의 말없는 드라마가 매일매일 우리 앞에서 펼쳐진다. 그런데 도심속에 살고 있는 우리는 이 황홀경을 얼마나 인식하며 살아가는가.

아스팔트,시멘트,철골,유리,석면,쇠창살 등으로 대변되는 도시의 삶은 하늘조차 바라보기 어렵게 한다. 고개만 들면 다닥다닥 붙어있는 이웃집들의 지붕과 고층빌딩 숲이 시야를 가린다. 밤하늘의 별을 보기 힘든 것은 어마어마한 원전에서 뿜어 나오는 전기라는, 그 힘에 발광하는 가로등의 뒤로 사라졌기 때문이다. 도시인인 현대인들은 현대문명 이라는 섬에 갇혀버린 것은 아닐까. 햇볕, 물, 공기 같은 생명의 본질까지 언젠가는 인공물로 대체될지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

이러한 계절에는 한번쯤은 이런 고뇌에 빠져볼만 하다. “인간은 과연 무엇으로 사는가?” 톨스토이가 이 제목으로 고뇌한 적이 있지만, 사실 인류의 가장 원초적 질문이다. 인간은 과연 무엇으로 사는가. 망가넬리 라는 이태리 작가는 이런 문구를 남겼다. (세상에 기아로 죽어가는 아이가 있는 한, 문학을 한다는 것은 죄악이다) 그렇다. 이 장엄하도록 푸르른 하늘이 펼쳐지는 이러한 계절에 이런 질문을 해보지 않는다면 분명 죄악일 것이다. 인간은 과연 무엇으로 사는가. 이 질문은 우리를 숙연하게 한다.

나는 과연 무엇으로 사는가. 특히 어둠이 깔린 고즈넉한 초겨울 밤은 외로움과 고독을 가슴속 깊이 불러온다. 이러한 낮보다 밤이 훨씬 더 길어진 고독의 밤, 하나님 앞에 홀로 선 단독자, 광대무변한 우주 안에 먼지보다 작은 미물로 있는 나는 과연 누구인가. 지진이나 폭풍이 일어 나를 삼킨다 한들 누가 나를 건져낼 수 있을까. 쓰나미나 회오리바람(토네이도) 속에 밀려가는 나뭇가지보다 힘없는 나를 이 땅에서 기억이나 한단 말인가.

그런데 나를 안다고 말씀하시는 분이 계시다. 그는 과연 누구신가? 이렇게 우리 영혼에 속삭이는 당신은 도대체 누구십니까? “네가 모태에서 조성되기 전에 너를 알았고, 너를 지었고, 너를 이 세상에 보냈다. 나는 너의 모든 것이고 너는 내 것이다”.

바울 사도는 아라비아 사막으로 갔다. 사막 교부들도 사막으로 갔다. 많은 신앙의 선배들이 안락한 도시를 떠나, 풍요로운 집을 떠나 산으로, 들로, 사막으로 갔다. 사막은 고독의 땅, 오로지 하나님 앞에 서기 위해. 그 분께 묻고 또 묻기 위해, 기도만이 풀 수 없는 질문을 그분께 올릴 수 있기에 사막으로 갔다. 고독은 가을의 선물이다. 고독하지 않은 사람은 결코 생의 본질을 들여다볼 수 없다. 하나님 앞에서 진지하게 홀로 되어보지 못한 이는 결코 삶의 의미에 다가갈 수 없다. 가을엔 고독해야 한다. 고독 속에 길이 있다. 평화의 길이 있다. 외로움은 혼자일 때 나타나는 게 보통이다. 그러나 혼자라고 해서 반드시 외로운 것은 아니다. 혼자라는 것과 외로움은 다르다. 외로움이 타인으로부터 고립된 기분으로 인한 우울함이라면, 고독은 바로 그 고립된 기분을 즐기는 것에 가깝다. 외로움은 사회적 배제와 공허함으로 인한 부정적 상태지만 고독은 그것으로 인한 즐거움이다.

다른 사람의 비위를 맞출 필요도 없이 오롯이 나에게만 집중하는 데에서 비롯되는 즐거움이다. 사람들과 부대낄 필요도 없고, 인간관계에서의 피부로 부터 벗어나서 자기 자신을 돌아볼수 있으며 자기 성장을 할 수 있는 긍정적이고 건강한 상태이다. 정신적 고통이 아니라 과도한 자극을 피하게 하는 정신적 자유와 해방인 것이다.

사람과의 관계는 중요하다. 그러나 늘 타인과 함께 북적거리는 삶에 지나치게 익숙해지고 있는것은 아닌지…… 그래서 인간관계에 연연하게 되고, 여기 저기 연락하고 소모적인 만남이라도 하려고 애쓰는 것은 아닌가. 이렇게 외로움에서 벗어나려고 안간힘을 쓰지 말고 차라리 고독을 즐겨보면 어떨까?….. 오로지 나에게만 충실할수 있는 나만의 시간, 내가 하고 싶은 게 뭔지를 파악하고, 방해받지 않고 즐기는 시간, 이런 고독의 시간이 늘어날수록 타인에게 소모하는 에너지를 내게 집중시킬 수 있고, 실적도 더 높일 수가 있다. 그래, 이 외로운 만추의 계절, 나에 대한 재충전을 기약하는 고독감을 실컷 즐겨보자.

마음과 가슴속 까지 붉게 물들여놓았던 가을은 떠나갔다. 온 산과 들에 아름답게 채색을 하며 곱게 물들었던 단풍들도 하나 둘 수액이 말라 떨어져 가고 있다. 단풍은 비 바람,뜨거운 햇볕을 견뎌낸 나무의 유채화다. 생채기가 깊을수록 그 빛깔은 농염하다. 알록달록 치장한 옷차림은 종점을 향한 내면의 소리이고, 부끄럼 없이 살았다는 충만의 표정일 테다. 같은 수종도 단풍색이 다른걸 보면 같은 듯 다르게 제 길을 걸었다는 자세가 아니랴… 이별의 서시를 끼적이다 미완으로 툭 떨어지는 나뭇잎을 보면, 우리의 생을 겹쳐 읽게 한다. 이미 세상을 달리한 낙엽들이 모여 외로움을 터는 듯하다.

심심한 바람이 그네를 태우면 바스락 웃음을 터뜨린다. 훗날 나도 그런 웃음을 지을 수 있으면 좋으련만……. 길가 가로수(참나무) 도토리나무 에서 떨어져 쌓여있는 낙엽들은 세월에 삭으며 거름으로 돌아갈 것이다. 인간이 떠날 때 면 무엇이 남을까. 영혼이 떠난 육체는 사물화 될 뿐이다. 자신이 살았던 삶의 흔적들을 묘비나 누군가의 가슴에 새긴 들 영원할 순 없다. 그건 지나친 욕심, 결국은 무(無)로 돌아가야 한다. 흔들리는 갈대처럼 이내 마음이 변한다. 지구상에 종적을 남긴 건 신의 축복이었다는 자만의 유언 한마디 남기고 떠나가는 것이 인생의 전부를 대변하는 듯하다.

키다리 소나무와 팜추리가 섞여 어우러져 그늘을 만들어, 산책로를 오가는 사람들에게 땀을 식혀주던 그 숲길의 오솔길 자갈밭 돌 틈에서 자라는 잡초를 볼 때면, 삶은 조건이 아니라 자세란 말이 떠오른다. 짓밟히면서도 꽃을 피워 핑계의 가식을 벗겨낸다. 존재 자체로 존재한다.

자연의 길은 배척이 아니라 수용이다. 뭐든 간에 다 품는다. 인간만 아옹다옹 종 주먹을 추켜세우고 휘두른다. 인격이 휘발된 소음들이 거리를 메우는 시절이 되었다. 올바르고 선한 제대로 된 인격을 갖춘 사람을 만나기가 힘든 세상이 되었다. 사리사욕과 이기심에 취한 눈망울들을 경계해야 한다. 자기중심, 기만이 아니라 진실의 깃발을 들어야 하는 때가 아마도 지금인가 보다.

가을이 깊어갈수록 외로움과 고독이 깊어가는 건 우리가 가진 욕심이 끝이 없기 때문일 것이다. 나 하나만의 사랑이 갖는 외로움과 고독 때문에 가을이 깊어갈 수록 우리 마음이 공허해진다면 이제부터는 함께 나누는 사랑으로 가을의 풍요함을 마음속에 갈무리하고 싶은 마음 가득하다. 쪽빛 하늘 끝에 달린 붉고 붉은 감들이 주는 늦가을 정취를 깊도록 즐기고, 볼을 스치는 새벽 찬 공기로 지친 마음을 다시 갈무리 해야겠다. 그리하여 나를 잊고 너를 잊으며 우리를 생각하는 마음을 가을 빛깔로 가득 빚어서 늦서리 속에 익어가는 황금빛 잔치를 겨울이 찾아오는 이 길목에서 마냥 즐기고 싶다. <문학 작가 김명열 / 탬파거주 myongyul@gmail.com.> 1386/202312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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