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명열칼럼> 한국인의 애환이 서린 수제비 이야기

<김명열칼럼> 한국인의 애환이 서린 수제비 이야기

오래전, (아마도 10여년전 한국일보 본지에 “6.25땐 이렇게 먹었어요”)라는 제목아래 한국자유총연맹 주최 6.25체험 시식회라는 사진이 어렴풋이 기억에 떠오른다.

가물가물한 기억을 더듬어 회상해보면, 테이블 위에 수북이 쌓인 찐 감자와 보리개떡, 보리 주먹밥, 그리고 수제비, 밀개떡 등이 전시되었던 것을 기억한다.

‘물에 개서 찐 떡’ 이라는 개떡은 고운 보리겨 가루를 물에 개어서 만든다. 쑥을 쌀가루와 함께 빻아 반죽하여 아이 손바닥만한 크기로 빚어 찜통에 쪄낸 것은 쑥개떡이다. 쌀이 모자랐던 시절, 일반 가정집에서는 수시로 수제비나 국수를 식탁에 올렸고 6.25전쟁 후 미국이 원조한 옥수수로 만든 죽도 그 당시에는 목숨을 연명하기 위한 생명식이었다. 6.25전쟁 직 후, 먹거리가 귀하던 그 시절, 찐 감자와 고구마를 한끼 식사로, 그나마도 없는 가난하고 굶주린 사람들은 돼지감자, 소나무 껍질, 산나물 풀애기, 시래기국 등으로 연명했다.

전쟁의 회오리 바람속에 먹을 것이 없어 아무거나 먹을 것이 되는 것은 모질고 질긴 생명력을 유지하기 위하여 초근목피는 물론 곡류라면 무엇이던지 식재료로 삼아 배고프고 허기진 뱃속을 채우는데 급급하며 힘들고 어려운 고통의 시간 속에, 늘 모자람을 느끼며 궁핍 속에 살았다.

산다는 것과 음식은 불가분의 관계이다. 그래서 우리나라 속담에 먹거리에 대한 것이 많은지도 모른다. ‘미운놈 떡하나 더 준다, 이 설움 저 설움 하지만 배고픈 설움이 제일, 밥은 봄같이 먹고 국은 여름같이 먹고 장은 가을같이 먹고 술은 겨울같이 먹는다 = 밥은 따뜻하게, 국은 뜨겁게, 장은 서늘하게, 술은 차게 마셔야 한다’는 말들이 있다.

나의 어린시절 직접 겪고 느끼고 보아왔던 그 당시 6.25전후에는 정말로 먹을 것이 없었다. 전쟁이 터지는 바람에 농사도 지을 수가 없었고, 설사 농사를 위해 심어놓은 논빼미의 벼들과 기타 콩이나 조 고구마 옥수수 감자 등의 농작물들은 손을 쓸 수가 없어서 모두가 말라죽고 시들어 죽었다. 사정이 이러하다 보니 추수할 곡식이 없고, 그로인해 먹을 양식이 없다보니 끼니를 잇기가 힘들어져 허기져 죽는 사람도 있고, 굶기를 밥 먹듯 했다. 그러한 힘들고 어려운 시기를 맞아 온 국민이 고생할 때 구세주가 나타났다. 바로 그것은 미군들이 굶주린 백성들을 위하여 베풀어준 온정의 선물 구호미였다. 구호미는 대개 쌀알이 기다란 ‘안남미’이었고, 아울러 밀가루였다. 안남미는 한국인들의 식성에 맞지 않아 대부분의 사람들이 안 좋아했지만, 밀가루는 대 환영을 받았다. 그 밀가루로 빵을 만들고 국수도 만들고 개떡도 만들고 수제비도 만들어 먹을수 있었다.

이것들 중에 특히 수제비는 애증이 엇갈리는 음식이다. 가슴을 저미는 것 같은 그리움과 어려웠던 시절 떠올리고 싶지 않은 기억이 동시에 담겨있다.

수제비에는 어머니의 손맛과 고향에 대한 기억, 어린시절의 추억이 한데 어우러져 있다. 된장찌개가 언제든지 다시 돌아가 안기고 싶은 그리움을 자아낸다면 수제비는 마음 시리고 그립지만, 그 당시 많은 사람들이 배고프고 힘들 때 먹었던 연명식으로 어찌 보면 되돌리고 싶지 않은 추억에 잠기게도 한다. 나이들은 장년층 이상에게는 특히 그렇다. 수제비에는 밀반죽을 손으로 뚝뚝 떼어내 끓는 국물에 넣어주던 어머니의 모습이 투영돼 있다. 한국인이 수제비 하면 떠올리는 이미지의 뿌리는 가난이었다.

힘들고 배고팠던 시절의 상징이다. 한국전쟁, 6.25를 전후해 먹을 것이 없었을 때 끼니를 잇게 해준 음식이 수제비다. 어머니, 아버지, 할머니, 할아버지는 구호 원조물자로 들어온 밀가루를 반죽해 끓인 수제비로 힘든 시기를 넘겼다. 그래서 배고픈 시절을 직접 겪지 않은 세대에게도 수제비는 마음 찡한 추억이 서린 음식이다.

그러한 추억속의 수제비를 오랜만에 지난 6월5일 수요일, 오전 수요예배가 끝난 후 맛있게 먹을 수 있었다. 교회에서 봉사도 많이 하고 성가대에서 아름다운 목소리로 하나님께 찬양을 올리는 전춘자 집사님은 가끔씩 교인들을 위해 음식도 손수 만들어 대접을 해 주는데, 이번에는 직접 수제비를 맛있게 끓여서 전 교인들을 대접해 주었다. 호박과 감자를 썰어 넣고 뜨거운 국물속에 손으로 뚝뚝 떼어 넣은 수제비국은 담백하면서도 맛이 너무나 좋았다. 밖의 온도가 화씨 90여도를 오르내리는 무더운 날씨속에 땀을 흘리며, 뜨거운 국물을 후후 불며 먹는 수제비는 목구멍 속으로 게눈 감추듯이 사라지면서 긴 여운을 남기며 목안에 가득히 구수하고 담백한 맛을 안겨주었다. 이렇게 맛좋은 수제비를 대접해준 전집사님과 수고하신 여러분들의 손길과 수고에 감사를 드리면서, 덕분에 오랫만에 그리운 추억의 수제비 맛을 볼 수 있었다.

옛날 어린 시절 나의 어머니께서 만들어주신 수제비는 세상의 어떤 음식보다 맛이 좋았다. 이러한 어머니의 손맛, 그 수제비 맛을 잊지 못해 서울로 유학을 와 공부를 하면서 가끔씩 사 먹은 적이 있다. 찬바람이 쌩쌩 세차게 불며, 볼따구가 얼어붙을 정도로 추운겨울 어느날, 나는 그 맛있는 수제비를 먹기 위해 종로3가에서 전차를 내렸다. 1962년, 그해는 박정희소장이 5.16군사혁명(또는 쿠테타)을 일으킨 다음해였다. 그 당시에는 서울이나 시골이나 사람들은 먹을 것이 넉넉지 않아서 많은 사람들이 가난과 굶주림에 고생하고 있었다.

그 시절, 종로3가 탑골공원 옆 골목에는 수제비만 전문으로 만들어 파는 식당이 있었다. 겉보기에는 허스름해 보이는 선술집 비슷한 모양의 점포(식당)였는데, ‘뚝배기 보다는 장맛’이라고 수제비 맛이 너무 좋아서 많은 사람들이 그 집을 방문했고, 유명인사들도 찾아와 수제비를 먹고 가곤 했다. 나 역시 학교를 갔다 오다 그 수제비를 먹기 위해 단성사 극장 앞 종로3가역에서 전차를 내려 한참을 걸어서 그 집에 갔다. 7~8평 되는 식당내에는 식탁과 의자가 빼꼭히 촘촘히 놓여있다. 그만큼 사람들이 많이와서 식사를 하기 때문에 이렇게 의자와 테이블을 빈틈없이 채워 넣고 있는데, 항상 손님들이 많아서 점심때나 저녁때는 밖에서 줄서서 기다릴 정도였다.

수제비라고 해야 고작 호박과 감자 몇조각 넣은 것이 전부인데, 국물 맛은 아무도 흉내 내고 따라갈 수 없는 천하일미 였다. 멸치를 넣어 우려낸 국물에 다시마 몇 조각이 둥둥 떠다니고, 그 국물에 수제비를 넣어 끓여낸 그 수제비는 값도 저렴하여 한 그릇에 5원(그당시 전차요금은 2원, 창경원 입장료 10원) 이어서 많은 사람들이 큰 부담 없이 사 먹을 수가 있었다.

옛날 시골의 고향에서, 한여름 햇볕이 너무 따갑고 땀도 많이 흘려 입맛이 없을때 대청마루에 온 가족이 모여앉아, 엄마가 멸치, 애호박, 감자, 대파등을 듬뿍 넣고 손으로 반죽된 수제비를 뚝뚝 끊어 끓는 물에 넣어 끓여나온 수제비를 맛있게 먹던 추억이 떠오른다. 요즘처럼 무더운 여름철, 더운 여름에 뜨거운 수제비를 먹으면 더 더울것 같지만, 이마에 송글송글 맺힌 땀을 훔치며 먹으면 개운하고 오히려 시원해져 이열치열(以熱治熱) 이라는 말이 있듯이 열은 열로 다스리며 한껏 그리움과 추억의 맛이 담긴 수제비를 먹어보는 것도 좋으리란 생각이 든다.

<문학 작가 / 탬파거주 myongyul@gmail.com.> 1411/202406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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