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명열칼럼> 꽃피는 춘 3월 봄에……….!
겨울의 끝자락이 2월이라면 봄의 시작은 3월이라고 볼수 있다.
우리말의 봄은 영어로 스프링(Spring) 이다. 봄이 되면 온갖 초식물들이 새싹을 틔우며 땅위로 용수철처럼 쏙쏙 돋아나는 새싹을 보면서 이 스프링이라는 단어가 봄에 참 잘 어울린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우리나라 말인 봄은 영어의 스프링보다 봄이란 계절을 더욱 포괄적으로 잘 표현하고 있다. ‘봄’이란 명사는 동사인 ‘보다’의 명사형으로 해석하면 매우 그럴듯한 표현이 된다.
추운겨울의 동토(凍土)속에 온갖 이파리와 녹색의 푸르름이 자취를 감추고 보이지 않던 것들이 봄이 되어 우리들의 눈에 포착되는 생명체가 한,둘이 아니다. 용수철처럼 돋아나는 새싹들뿐만 아니라 봄이면 새롭게 보이는 생명체들을 원없이 볼 수 있는 것이다. 땅 위에 바짝 엎드린 들꽃들 중에서도 봄에 피어나는 꽃은 더욱 소중하고 아름답다. 이러한 관점에서 봄은 다분히 시각적이다.
따뜻함이 간절해질 때가 되면 어김없이 찾아오는 봄은 피부에 느껴지는 부드러움이기도 하다. 봄이 한창 무르익어서 아카시아 꽃향기가 주위를 감싸는 때가 되면 봄은 후각을 통해 우리 몸속으로 들어온다.
1년은 4계절로 한마디가 된다. 이러한 4계절은 그 계절마다 특색이 있고 그에 따르는 교훈도 있다. 봄 하면 제일먼저 떠오르는 것이 따뜻함이다. 따뜻함은 춥지도, 그렇다고 더운 것도 아니다. 우리들이 살아가는데 가장 적합한 기온을 말한다. 마치 부드러운 햇빛에 모든 만물이 생기를 찾고 미소를 머금는 듯한 기온을 말한다. 겨울은 너무 춥고 여름은 너무 덥다. 그래서 사람들은 봄을 좋아한다. 따뜻함은 인간이나 짐승이나 초식물들도 모두가 좋아하고 생장조건으로서는 가장 적합한 기온을 뜻한다.
이러한 원리는 특히 우리들 인간사회에도 적용된다. 따뜻한 사람은 주위 사람과 이웃에게 관심을 갖는다. 만나면 칭찬하고 격려해주며 힘든 사람에겐 위로를 건넨다. 좋은 일이 생기면 진심으로 축하하고 함께 나누며 어려운 일에는 물심양면으로 숨어서 돕는다. 따뜻한 사람이 가는 곳에는 항상 생기와 활력이 넘친다. 무미건조하던 조직이 살아 움직이고 싸움박질 하던 곳에 평화가 자리 잡으며, 돈이 없어 아무 일도 못하던 곳에 돈이 돈다.
세상에 찬 사람도 있다. 인정도 사랑도 없고, 오직 자기 자신만 위해 산다.
또 반대로 너무 뜨거운 사람도 있다. 정이 지나쳐서 남의 일에 하나하나 묻고 간섭하는 사람들 말이다. 너무 차거나 너무 뜨거운 사람은 옆의 사람을 피곤하게 만든다. 우리 곁에 다가와 나래를 펴고 있는 이 따뜻한 봄은 말한다. 온화하고 따뜻한 사람이 되라고…….. 따뜻함의 대명사인 봄은 좋은 일을 시작하는 계절이다. 여름과 가을, 겨울도 봄부터 시작된다. 꽃을 심는것도, 나무를 옮기는 것도 봄에 한다. 농부가 가을의 추수를 내다보면서 밭을 갈고, 씨 뿌리는 것도 봄이다. 사랑도 언제나 하는 것이지만 봄의 사랑이 가장 강력하다는 이론이다. 곤충이나 동물도 봄에 짝짓기를 많이 한다.
사람들도 봄에 결혼을 많이 한다. 성경말씀 전도서 에도 천하에 모든 만사가 기회가 있다고 기록되어 있다. “심을 때가 있고 심은 것을 뽑을 때가 있으며 돌을 던질 때가 있고 돌을 거둘 때가 있다“등, 즉 봄은 좋은 일, 선한일을 시작하는 계절이다. 아무 일도 하지 아니하고 어떤 기대를 하는 것은 바보중의 상 바보이다.
지금 우리들이 살고 있는 플로리다는 3월을 맞아 온갖 종류의 꽃들이 피어나고 있다. 마치 꽃 잔치를 벌이기라도 할 듯, 세상이 황홀한 꽃물결 속에 아름다운 향기와 화사한 꽃잎들의 향연에 정신조차 술에 취한 듯 몽롱해지기도 한다. 삭막한 도시의 거리와 공원, 숲길에는 꿈결처럼 곱디고운 봄꽃이 피어오르고 있다. 허전해 보였던 아파트 뜰에도 봄이 찾아왔다. 바람이 안개를 흩뿌려 이슬비라도 내리려는 듯 봄의 촉촉한 기운이 물씬 풍긴다. 집 앞 도로 가로수인 옥트리 가지에 연초록 기운이 움트고 있는 어린 나뭇잎들은 햇병아리의 솜털처럼 보드랍고 앙징스럽다. 이름 모를 새 한마리가 꽁지를 깝신거리며 포르륵 나무 사이를 옮겨 다니고 있다.
봄은 여자들이 가장 좋아하는 계절이라고 하는데, 나 역시 봄이 좋다. 아마도 나에게 남은 일생 중에 활짝 피어난 봄 같은 시간은 그리 많지 않다는 것을 깨닫기 때문일 것이다. 산책로 길가에 피어난 들꽃과 꽃나무에 피어난 꽃을 보며 이렇게 연한 꽃이 어떻게 저 딱딱한 나뭇가지를 뚫고 나오는 걸까. 한송이 꽃을 피워내기 위해 겨우내 거센 눈보라와 꽃샘추위를 온몸으로 받으며 견디어 냈을 자연의 신비로움에 숙연한 기분이 들었다. 어디선가 선들바람이 살랑 살랑 불어오자 꽃 이파리가 바람에 날려 떨어져 내린다. 지는 꽃송이의 모습은 애잔해 보였다. 피어 있을 땐 피어 아름답지만 떠나갈 땐 말없이 지는 꽃들의 삶이 우리들 인생과 다를 바가 없다. 매일 피어나고 지는 꽃처럼 우리네 삶도 그러하리라.
사실 우리의 주위엔 돈으로 살수 없는 소중한 것들이 너무나 많다. 온 도시를 휘황하게 물들이며 피어나는 봄꽃들의 향연과 낙화(落花), 아침잠을 깨우며 지저귀는 새들의 노래 소리, 초봄의 싱그런 빗줄기, 이러한 아름다움을 어찌 돈으로 환산할 수 있을까. 봄의 풍경을 보며 새로운 교훈을 얻는다. 아직도 이 세상에는 내가 사랑해야 할 것들이 얼마나 많은지, 내가 모르는 가치가 얼마나 많으며, 내가 모르는 아름다움이 얼마나 많은지. 소중한 자연의 가치로 인해 삶을 사랑하는 또 다른 지혜를 배워본다.
고(故) 이당 안병욱 선생님은 <봄의 예찬>에서 “봄처녀가 생명의 젖가슴을 갖고 부드러운 희열의 미소를 지으면서 우리의 문을 두드린다” 고 봄의 생명성과 기쁨을 찬미했다. 그렇다! 봄은 말만 들어도 우리의 마음을 생명수 흐르는 아름다운 초원으로 초대한다. 인간은 잃어버린 청춘을 한탄과 함께 체념하다가도 다시 찾아오는 봄에는 희망과 젊음을 느끼며 심적 위안을 받는다.
자연이 내려준 혜택 중에 가장 아름다운 것은 봄이 아닌가 한다. 봄은 대지를 새로운 옷들로 갈아입힌다. 천자만홍(千紫萬紅)의 꽃들로 곱게 물든 산하(山河), 바람에 흔들리는 파릇한 새 나뭇잎의 청신함, 게다가 물결에 아롱대는 햇살, 노래하는 꾀꼬리의 청아한 목청, 모두가 아프리만큼 아름다운 봄의 정경들이 아닌가. 과연 프랑스 사실주의 문호 플로베르가 ‘봄이오니 다시 죽고 싶어지지도 않는다’고 독백한 것이 실감난다. 확실히 봄은 사람을 유혹하는 마력을 가진 계절이다.
봄에는 특히 아름다운 꽃들이 많이 피어난다. 꽃은 우리에게 황홀과 도취, 기쁨과 행복을 선사하는 신의 고귀한 선물이다.
온갖 영화를 누렸던 솔로몬도, 절대 권력의 진시황도 꽃한송이처럼 생생하고 화려하게 치장할 수는 없다. 이에 우리는 백화난만(百花爛漫=온갖 꽃들이 활짝피어 아름답게 흐드러진 상태를 말함)한 이 대자연의 축제속에 화초와 하늘과 바람과 함께 숨쉬며, 노래하고 싶은 충동을 느낀다.
하지만 이 아름다운 봄은 자연의 섭리를 거스를 수 없기에 단명의 생을 보낸다.
인생도 마찬가지다. 즐겁고 행복한 시간은 너무 빨리 지나가 애석함을 남기게 마련이다. 그러니 이 짧은 봄과 같은 유한한 인생을 우리는 어떻게 행복하게 보낼것인가? 스위스 성자 힐티는 <행복론>에서 “참된 행복은 신의 품에 안기는 것이다”라고 했다. 이는 너무나 종교적이다. 그런가 하면 할 일과 사랑할 사람과 희망이 있을 때 행복하다는 ‘칸트’의 말은 너무 소박하다. 이들보다는 차라리 ‘행복은 나비와 같아서 잡으려면 달아나고 가만히 있으면 살포시 어깨위에 앉는다’고한 어느 시인의 말이 더 설득력 있어 보인다. 나는 많은 선각자들의 행복론은 차치하고, ‘행복은 멀리 있는 것이 아니고 바로 내마음속에 존재한다’고 정리하고 싶다.
우리들 인생은 리허설이 허용되지 않는 단막극이다. 이 극을 해피엔딩으로 장식하기 위해, 우리는 촌각을 아껴 부단히 배우고 일하며, 타인에게 베풀고, 신에게 감사하는 마음으로 살아가야 하지 않겠는가………! 롱펠로우는 <인생찬가>에서 ‘슬픈 사연으로 내게 말하지 말라, 인생은 한갓 헛된 꿈에 불과하다. 그리고 인생은 진실이며 진지하다’라고 했다. 우리 모두 우리곁에 찾아온 봄을 한껏 즐기되, 진지한 인생의 의미도 깊이 음미해 보자. <문학 작가 김명열 / 탬파거주 myongyul@gmail.com.> 1399/2024032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