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명열칼럼> 104주년 3.1절을 맞으며…….
오늘 3월 1일은 제 104주년 3.1절 기념일이다.
지난 1919년 3월1일 일제 강점기에 나라의 독립을 위해 온 민족이 한 마음, 한 뜻으로 뭉쳤던 뜻 깊은 국경일이다. 따라서 우리 한국 혈통을 가진 모든 한 민족, 국민들은 104년전 민족이 단합했던 그 시절의 호국정신을 오늘에 되살려 작금의 어지럽고 어려운 현실을 극복하여 우리나라의 번영에 힘을 모으는 슬기와 지혜를 도출해야겠다.
국권을 찬탈당해 나라가 없던 시절, 나라를 되찾기 위해 분연히 궐기했던 조상님들의 숭고하고 헌신적인 마음과 행동을 오늘에 다시 한번 재현하여 나라의 어려운 현실을 타파하는 애국, 애족의 정신이 우리 모두의 가슴에서 우러나와야 하는 것이다. 특히 104년전 겨례의 숨결이 서로의 가슴을 뜨겁게 달아오르게 했던 그 단합된 힘을 나라 발전에 승화시키는 새로운 계기를 우리 모두는 만들어 번영된 미래의 대한민국 건설에 접목시켜야 할 시기가 아닌가 싶다. 문명의 발달로 촉발된 물질의 풍요가 도덕성을 저버리며 순리를 역행하는 부적절한 모습으로 나타나고 있는 오늘의 현실을 직시하며 3.1정신에 입각한 위대한조국 만들기에 우리 모두가 동참하여야 하는 것이다.
올해는 3.1운동이 일어 난지 104주년이 되는 해이다. 3.1독립만세운동은 조국의 자주독립정신과 민족의 자긍심을 드높여준 고귀한 정신적 유산을 우리 후손들에게 남겨주었다. 3.1독립만세 운동이야말로 전 세계 피 압박민족들의 독립의지를 깨우치는데 결정적인 역활을 한 전 세계적인 정신 운동이다. 오늘에 사는 우리들은 3.1운동에 깃들인 민족정신을 그냥 역사속의 한 페이지로 여기고 제대로 계승하지 못하고 있는 것 같아 안타까운 생각이 든다. 그래서 올해의 3.1절에는 이러한 3.1독립정신을 되새겨 보고, 그러한 옛 조상들의 헌신적이고 호국적인 숭고한 정신을 기리며 글을 쓰고 있다.
지금으로부터 100여년전 조선시대 말, 우리민족의 운명은 나약한 국가체제 아래 어찌할 수 없었던 시대의 흐름이었다면, 이제는 미래의 변화를 주도적으로 이끌 수 있는 우리의 선택이자 의지이다. 신 민족주의 시대가 아시아를 넘어 전세계에 도래한 지금, 한국역시 우리의 안보와 발전을 위해 민족의식에 대한 새로운 해석과 이해를 하는 것이 필요하다. 내가 하고 싶고 바라는 말은, 미래를 걱정하는 한국사람이라면 3.1절을 계기로 한번쯤 독립선언서를 읽어보시길 바란다. 청나라와 러시아, 일본의 폭거에 시달리며 결국은 일본의 식민지배를 받게 되었지만, 민족대표 33인을 통해 보이는 민족의식은 분노나 복수심이 아니었다. 독립을 요구하는 글이라고 보기 어려울정도로 선언서는 민족의 미래를 넘어 세계의 평화와 발전을 기리고 있으며, 일본에 대한 원망이 아닌 우리의 미래를 우리가 개척해 나가겠다는 의지를 표현하고 있다. 또한 글, 선언서 속에 그 어떠한 구절에도 타민족을 비방하거나 헛된 우월주의로 남을 깔보는 문장이 포함되어 있지 않다. 백범 김구선생의 ‘나의 소원’에서와 같이 절망적인 시대를 살았던 민족지도자들은 한결같이 민족정신을 계승한 문화의 발전을 통해 세계평화와 번영에 기여할수 있는 국가를 꿈꿨으며, 국민들의 복수심이나 좌절감에 빠지지 않고 희망을 선택하여 ‘홍익인간 이화세계’라는 민족의 사명을 실현할 시대를 만드는데 집중하기를 원했다.
한국인들은 식민지배와 내전, 분단이라는 최악의 상황에서 수많은 역경을 극복하고 한류로 표현되는 현 시대를 창조하였다. 한강의 기적을 만들고 민주항쟁을 이끌며 IMF라는 국가적 위기를 금 모으기와 같은 단결력과 투지로 2년만에 극복해냈고, 그 외에도 태안 앞바다 기름유출 사건 등의 재난을 국민전체의 의지로 해결했다. 어떤 이들은 한류를 단지 K-Pop이나 드라마로 생각하지만, 이제 한류는 엔터테인먼트 사업을 넘어 우리의 선조들이 간절히 바라던 민족적 목표를 이루는데 매우 근접하게 되었다.
이제 우리는 우리의 성공이 우리만의 성공이 아닌, 세상에 희망과 모델이 될 수 있는 한류의 시대에 살고 있다. 우리민족이 역사적으로 가장 잘못한 것이 있다면 이념적으로, 사상적으로 분리되어 내분을 일으키다 기회를 놓치고 잘못된 선택을 한 것이라 할 수 있다. 남을 탓하고 운명에 비관하는 것이 아닌 희망과 꿈을 이야기 했던 3.1절의 정신을 다시금 되새기며 내적인 분열을 경계하고 우리의 가치를 회복하는 노력이 그 어느때보다도 절실하다.
독립과 자립은 민족의 가치관 회복이 없이는 불가능 하다는 것, 누군가의 지배에서 벗어나는 것보다 자신이 누구인지, 어떠한 공동체를 만들기 위해 존재하는지를 인지하는 것이 더 우선이라는 것을 민족지도자들은 알고 있다. 이제 다시금 강국들의 이권다툼에 희생당하지 않기 위해 우리의 정체성을 찾는 새로운 문화운동, ‘한국적 르네상스’운동이 일어나야 한다. 이것이 1919년 3월1일 우리민족이 원했던 진정한 독립을 이루는 첫걸음이 되지 않을까 생각한다. 이어서 별도로 소개하려는 이야기는 1919년 기미년 3월1일, 독립선언서(문) 제작과정에서 자칫 이 위대한 혁명 거사가 물거품이 될 뻔한 아주 위태로웠던 상황의 숨겨졌던 비화가 있어 이번 지면을 통하여 전해드리도록 하겠다.
다음은 3.1절에 대한 비화(秘話)이야기다.
1919년(기미년) 3월1일, 전 국민이 궐기한 3.1혁명(3.1운동)은 기미독립선언서와 민족대표 33인의 주도로 마침내 그 깃발이 올랐다. 이날 오후 3시, 민족대표 33인(참가자는 29인)은 태화관에서 독립선언서를 발표한 후 모두 일본경찰에 끌려갔다. 요즘처럼 통신수단이 발달하지 않았던 당시, 3.1운동 혁명이 전국적인 규모로 전개될 수 있었던 것은 바로 독립선언서 덕분이었다. 그런데 이 독립선언서 제작과정에 기막힌 일화가 하나 있다.
민족대표들은 거사에 앞서 독립선언서를 만들기로 하고 당대 제일의 문필가로 이름을 날리던 육당 최남선 선생에게 맡겼다. 이 과정에서 최남선은 독립선언서는 기초하되 자신은 민족대표 33인에서 빠지겠다고 해서 한때 집필자를 두고 논란이 있었지만, 결국은 육당이 맡게 됐다. 이제 다음순서는 독립선언서를 인쇄하는 일이었다. 비밀을 유지하기 위해 당시 천도교에서 운영하던 인쇄소인 보성사(普成社)에서 하기로 했다.
2월27일, 보성사 사장 이종일 사장은 직원들을 일찍 퇴근시킨 후, 인쇄 기술자, 총무등 두 사람만 데리고 커튼을 드리운 채 극비리에 인쇄 작업을 진행하였다. 한창 인쇄를 하고 있는데 밖에서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당시 보성사 주변을 순찰하던 종로경찰서 소속 형사 신승희가 보성사에서 달가닥 거리는 소리를 듣고서 검문을 하러 온 것이었다. 이종일로서는 기절초풍할 노릇이었지만, 문을 열어주지 않을 수가 없었다. 인쇄소 안으로 들어온 신승희는 금새 상황을 알아차렸다. 독립선언서 인쇄가 바로 탄로가 나고 말았다. 이종일 사장은 신승희 앞에 꿇어 엎드려 “당신도 조선 사람이니 제발 한번만 눈감아 달라”고 애걸했다. 그러나 신승희는 게거품을 물면서 당장 경찰서로 가자고 곤봉을 내리치며 눈을 부라렸다. 펄펄 뛰는 신승희를 가까스로 진정시키고 달래면서 이종일 사장은 잠시 어느 곳을 다녀 올테니 꼭 기다려달라고 신신당부를 하며 사례를 하겠다고 이야기를 했다. 돈을 주겠다는 말에 신승희는 못이기는 척 빨리 갔다 오라고 재촉했다. 이종일사장은 곧장 의암 손병희 선생을 찾아갔다. 이러한 얘기를 전해들은 손병희는 두말도 하지 않고 안방에서 거금 5천원뭉치를 꺼내주었다. 신승희는 이돈 5천원을 먹고 눈감아주었다.
물론 이 돈은 천도교 자금이었지만, 그날밤 손병희가 당시로서는 너무나 큰 돈, 거금 5천원을 선뜻 내주지 않았다면 상황이 어떻게 변하고, 어찌 됐을까?……. 생각만 해도 소름이 돋아난다.
3.1독립만세 사건은 1919년 3월1일 오후2시 정각, 서울 종로구 인사동 태화관의 근대식 건물에서 터져 나온 ‘대한독립만세’ 함성과 더불어 시작되었다. 한식당 태화관에서 독립을 선언한 것은 매우 역설적이다. ‘왜 하필이면 태화관에서냐?’ 라는 의문이 생겨났다. 그곳은 매국노 이완용이 별장으로 사용했던 곳이기 때문이다. 태화관은 조선조 24대 왕인 헌종의 후궁 사당으로 쓰던 곳인데, 1907년 고종황제의 강제 퇴위에 분노한 군중들이 이완용의 집에 불을 지르자 집이 전소하고, 그로 인해 일제가 이완용에게 선물한 것이다. 이완용은 이 집을 별장으로 개조하여 당시 친일파들의 아지트와 같이 사용했다. 조선통감 이토 히로부미도 자주 드나들며 나라를 빼앗을 궁리를 했다. 그래서 태화관은 매국의 근거지로 불렸으며 이 건물을 둘러싸고 좋지 않은 유언비어들이 장안에 파다했다. 1918년 이 건물은 음식점으로 탈바꿈 하여 우리나라 최초의 근대 요릿집인 명월관 분원이 되었다. 궁중요리 전문에 기생들이 서브하는 고급요정으로 친일파들이 단골이었으나, 천도교 교주인 손병희도 가끔씩 종교지도자들과 함께 이용했던 곳으로, 감시의 눈을 피할 수 있다는 잇점에서 선정된 듯 하다.
태화관은 3월1일 손교주가 주도하는 종교계 지도자 모임으로 생각해 특별히 배려하여 다른 손님은 일절 받지 않은채 33인분 음식만 준비했다고 한다. 민족대표들은 만세삼창 후 평화투쟁의 일환이라는 것을 분명히 하고 곧바로 경찰에 자수했다. 만세사건 이후 태화관 영업은 한동안 중단됐다.
일제가 독립선언서 낭독을 문제 삼았기 때문이다. 그후 태화관은 1921년 미국 선교사들에게 팔려 여성들을 위한 감리교 포교 공간으로 사용했다.
오늘 104주년 3.1절을 맞으며 그 옛날 우리 국민들의 독립 만세 함성의 소리가 나의 마음속에서도 울려 나오는 것 같아서 흥분을 감추지 못해 감상에 젖어 글을 써 보았다. 대한독립 만세, 대한독립 만세, 대한독립 만세. <문학 작가 김명열 / 탬파거주 myongyul@gmail.com.> 1349/2023030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