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명열칼럼> 찔레꽃 향기
요즘 이맘때 한국의 산과 들에 가보면 묘하게 진한 장미꽃 향기 비슷한 그윽한 향내가 숲을 온통 절인다.
그 진원은 바로 찔레꽃이다. 아카시아 꽃 향이 채 가시기도 전에 또다시 코끝을 자극하며 감미로움에 빠져들게 하는 꽃향기가 있어 정신이 번쩍 들게 한다. 밭머리에 퉁구러지듯 버림받은 돌무지나 산 비냥 끝자락에 제 멋대로 엉킨채 소복하니 무리지어 피어난 찔레꽃, 사는 곳이 외진 탓에 사람들이 그리워서인가, 향기로라도 부르려는 듯 바람기라곤 전혀 없음에도 지나는 이마다 고개를 돌리게 해 붙잡는 품이 눈물겹다.
찔레꽃의 한자이름은 야장미(野薔微)이다. 찔레꽃은 곱지만 화려하진 않다. 그래서인지 예나 지금이나 ‘화초’축에도 못 끼는 신세다. 찔레에서 나온 장미가 ‘꽃의 여왕’으로 대접받는 걸 생각하면 마음이 짠할 정도다.
하지만 돌이켜 생각해보면 오히려 이 때문에 대다수 민초(民草)들에겐 더 정겨운 대상이었는지도 모를 일이다. 어차피 당장 입에 풀칠하기도 바쁜 민초들한테는 완상(玩賞)이란 사치일 뿐 일테니 그저 일하러 오가다 풀숲 변에 수더분하게 핀 꽃을 보며 지친 맘을 달랬을 터다. 더구나 그건 일부러 심은 것도 아니고, 반(半) 품이라도 들여 가꾼 것도 아닌데 한껏 위로를 주는 존재이기에 더욱 고맙고 정겨웠을 테고, 그렇기에 찔레꽃은 유별난 그 무엇이 아니라 아주 친숙한 존재요, 고향의 다른 이름이나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이 땅의 수많은 꽃 가운데서도 특히 찔레꽃이 우리네 가슴에 유난스러운 것은 단지 향기나 아름다움 때문만은 아니다. 그건 다름 아니라 찢어지게 가난하던 아픈 추억의 공유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찔레꽃이 피는 바로 이때가 태산(泰山=지금같으면 에베레스트산)보다 넘기 힘든 맥령기(麥嶺期), 즉 보릿고개였으니까…..
그 시절엔 대부분 많은 사람들이 남의 소작을 부치거나, 혹 제 땅이라도 고작 메뚜기 마빡만한 땅뙈기 이다보니 이것저것 떼고 나면 늘 양식이 부족해 이때쯤엔 바닥이 나기 마련이었다. 그래서 보리가 날 때까지 연명하며 버텨내기가 그야말로 죽을 맛이었다. 실제로 아주 오래전엔 이 고개를 넘지 못하고 굶어죽는 사람들이 제법 많았었다.
찔레꽃이 필 때면 연례행사처럼 안타깝게도 늘 가뭄이 들어 ‘찔레꽃가뭄은 꿔다 해도 한다’ 는 속담마저 있을 정도로 고통을 줬다. 사정이 이렇다 보니 찔레꽃자체가 배고픔의 고통을 예고하는 메신저나 매한가지였다.
이 고통은 밤꽃이 필 때까지 계속됐다. 그래서 찔레꽃이 피면 꿈에라도 사돈 보기가 무섭고, 또 그러니 무남독녀를 건넛마을에 시집보낸 영감조차 차마 갈 엄두를 못 내고 혼이 나간 듯 멍~하니 딸네를 바라다볼 수밖에 없었다. 사실 그 시절엔 별의별 것을 다 먹었다. 달래, 냉이, 씀바귀, 쑥,민들레, 취, 명아주, 비름, 머위, 둥굴레, 닭장풀, 혼닢, 뽕잎 등 나물은 물론 청미래 덩쿨, 칡, 무릇, 나리 등의 뿌리에다 소나무 속껍질인 송기(松肌),느릅나무 껍질 등 문자 그대로 초근목피(草根木皮)가 주식(?) 이다시피 했으니까. 그것도 여러 식구가 먹으려면 양을 늘려야 하기 때문에 싸라기라도 한웅큼 생길라치면 가마솥에다 물을 넉넉히 잡은뒤 이것저것 집어넣고 끓여내 멀국으로 배를 채우기 일쑤였다. 이같은 나물은 평소엔 반찬이었고 비상시에는 반(半) 양식이었다. 그러다보니 어린애들은 들이야 산으로 쏘다니며 찔레며 삠비기, 미루나무열매, 메, 돼지감자는 물론 진달래꽃, 아카시아꽃, 칡꽃 등 먹을만한 곳이면 닥치는 대로 다 먹어댔다. 미꾸라지, 송사리, 붕어, 뱀장어, 불거지, 모래무지, 메기, 파라지, 버들치 등의 물고기도 그렇고, 심지어는 개구리, 뱀, 우렁이, 다슬기, 조개, 가재, 방게 등도 빼놓을 수 없는 영양식(?) 이었다.
모진게 목숨이라 죽을 둥 살 둥 하면서도 겨우 ‘보릿동’을 대면 햇보리가 나오는데, 도저히 그때까지 기다릴 수가 없어서 보리누름이 오기가 무섭게 풋바심을 해먹을 수 밖에 없었던 게 이땅 민초들의 가엽고도 눈물겨운 초상(肖像)이었다. 예전엔 꿈이라도 한번 쇠고기 국에 이밥(쌀밥) 한 그릇 먹어 보는게 원이었던 사람들이 이땅에는 득실거렸다. 요즘 젊은이들에게 이 같은 얘기를 해주면 “아무렴 그랬겠냐고” 콧방귀를 뀌지만, 이따금 소위 ‘먹방’이란걸 볼 때면 그 시절을 회상하며 눈시울을 붉히는 이들이 아직도 적지 않다.
나의 어머니는 늘 꽃을 좋아하셨다. 봄에 산으로 나물을 뜯으러 가셨을 때는 진달래, 도라지꽃, 야생 매화꽃 그리고 늦봄이나 이른 여름에 피어나는 찔레꽃을 특히나 좋아하셨다. 그 꽃들을 산나물보따리 한쪽에 소중히 꺾어 다발을 만들어 담고 갖고 오셔서 집에 와서는 도자기 병에 물을 담아 꽂아놓고 드나들며 즐겨 보시곤 하셨다.
내가 살던 고향집 뒷동산에는 온갖 꽃들이 일년 내내 피어나고, 장독대 옆에는 연분홍 살구와 복숭아꽃, 그리고 앵두꽃이 만발했으며 늦가을에는 서리맞은 국화가 피어 있었다. 앞서도 잠시 언급했지만 나의 어머니는 찔레꽃을 참으로 좋아하셨는데, 생각해보면 어머니는 여인이고, 여인은 가슴을 설레게 하는 존재인 동시에 엄마는 또한 그리움의 존재이기도 하다. 어머니 하면 고향을 생각나게 한다. 그리고 고향의 향수를 느끼게 한다.
옛날에 홀 어머니를 모시고 사는 한 젊은 청년이 있었다. 어느날 그는 어머니 곁을 떠나 깊은 산속으로 들어갔다.
부처님의 제자가 되어 도(道)를 닦기 위해서 이었으며, 한참동안 산길을 헤매던 청년은 우연히 스님 한분과 마주쳤다. 이때 스님에게 “스님 어디를 가야 부처님을 만날 수 있을까요?” 스님은 물끄러미 청년을 훑어보며 이렇게 말했다. “지금 즉시 집으로 돌아가면 누군가 옷을 절반만 걸치고 신발을 거꾸로 신은 채 자네를 마중 나올 걸 세. 그 사람이 바로 부처님이시네” 청년은 스님에게 연거푸 절을 올린 뒤 곧장 집으로 향했다. 청년은 집으로 돌아오는 길 내내 부처님을 만난다는 생각으로 들떠 있었다. 청년이 집에 도착했을 때는 이미 한밤중이었다. 그는 잔뜩 설레는 마음으로 대문을 두드렸다. 이때 그의 어머니는 아들이 돌아온 소리에, 너무나 반가운 나머지 허겁지겁 방문을 뛰쳐나왔다. 옷은 절반 정도만 대충 걸친데다 신발은 거꾸로 신은채였다. 젊은이는 그런 어머니의 모습을 보고서야 뜨거운 눈물이 솟구치는 동시에 스님의 말뜻을 깨달을 수 있었다.
해마다 5월이면 그 운명의 실타래에 묻어나는 그리움을 마주하게 된다. 카네이션을 단 가슴이 아름답게 다가온다.
비록 향기 없는 조화라 할지라도 가슴에 단 카네이션이 아름다운 이유는 꽃이기 때문이 아니라 그 꽃을 자랑스럽게 달고 있는 어머니의 젖가슴 때문이고 이날만큼은 어머니에게 꽃이고, 꽃이 되고 싶은 자식들의 마음을 달고 있기 때문이다. 옛 부터 오뉴월에 피는 꽃이 향기가 제일 짙다고 한다. 그중에서도 장미과에 속하는 ‘찔레꽃 향기’가 으뜸이라 했으며, 찔레꽃은 어딘가 모르게 때 묻지 않은 듯 마치 수줍은 시골 새 색시처럼, 화려하지도 빼어나지도 않으면서 사람들의 마음을 사로 잡는것 같다. 향기를 맡아보면 향기 또한 어질고 착한 듯 수수하고 고와서 소녀 같은 청조함이 묻어나 오랫동안 취해도 싫증이 나지 않는다. 찔레꽃은 자리를 가리지도 않으며, 생 울타리건 진흙구렁이건 비탈언덕이든 어느 곳 어디서나 잘 자라나고 잘 피어난다. 찔레꽃의 꽃말은 ‘온화, 신중한 사랑’이라 하는데, 이 순박한 꽃에는 슬픈 전설이 있다고 한다.
옛날 고려시대 조공(朝貢)으로 여러 처녀들과 함께 몽골로 끌려간 소녀 ‘찔레’는 고향과 부모에 대한 그리움으로 수많은 세월을 보내다 어렵사리 고향으로 돌아왔다. 그러나 부모형제는 어디론가 다 사라지고 소식조차 알 길이 없었다.
‘찔레’는 가족을 찾아 밤낮없이 이곳저곳을 찾아 헤매며 애타게 찾았건만, 결국 가족들을 찾지 못하고 실성한 듯 울부짖다가 그만 죽고 말았다. 그 뒤부터 그녀가 가족을 찾아 헤매던 골짜기 개울마다 그녀를 닮은 하얀 꽃이 하나둘 피어났는데 그때부터 사람들은 그 하얀꽃을 ‘찔레꽃’이라고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그래서 하얀 찔레꽃을 ‘한많은 찔레꽃’이라 부르기도 했다. 비록 밭 언저리, 산골짝 계곡 바위틈, 가시넝쿨 속에서 잡초처럼 피어나지만 그 수수한 아름다움은 다른 꽃에 비할 수가 없고, 원래 장미꽃의 어머니를 찔레꽃이라 한다. 그래서 그런지 장미의 화려함도 좋지만, 찔레꽃의 수수함은 더 좋은 것 같아 보인다. 그리고 찔레꽃의 향기는 사람의 마음을 사로잡을 만큼 짙고 신선하며 오묘하다.
그 옛날 찔레꽃나무의 연한 순은 배고팠던 어린 시절, 한창 자라나는 어린이들에게 맛좋은 간식거리였기도 하다. 나 역시 동무들과 어울려 찔레꽃 순을 많이도 꺾어 먹어봤는데…….. 지금은 누가 먹으라고 권해도 거들떠보지도 않을 것 같다.
먹을 것이 풍부한 지금의 시대에, 과거 과자나 간식거리 대용으로 따 먹었던 그 찔레순은 아무래도 옛날 그 시절의 맛을 되 찾아보기는 힘들 것 같다.
한편 이 찔레순은 다양한 약효를 지닌 식품이라 한다. 일례로 찔레순을 많이 먹으면 겨우내 몸 안에 쌓여있던 독소를 제거해주는 약효가 있다 하며, 한편 찔레꽃의 열매를 영실(營實)이라 한다. 이 영실은 여자들의 생리통, 생리불순, 변비, 신장염, 방광염, 각기, 수종 등에 치료효과가 뛰어난 약재라고 한방(韓方) 에서는 말한다. 그 옛날 그 시절 동심으로 돌아가 찔레순이며 ‘시엉’을 꺾어먹던 아련한 옛 추억에 한번 잠겨 보는 것도 무방하리라. 그러나 그 옛날 고향에서 함께 뛰놀던 동무들은 지금은 거의 찾아볼 수도 없다. 고향에 가도 옛날 함께 지낸 친구들은 모두 없다. 다 고향을 떠났거나 이미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다만 그리움만 남는다.
내 고향 마을 뒷산에는 아마 이맘때쯤이면 하얀 찔레꽃이 흐드러지게 피었으리라 생각된다. 나의 어머니 몸에 아련히 스며있던 찔레꽃 엄마의 향기는 다시 찾을 길이 없다. 하지만 이맘때 피는 찔레꽃 향기에 취해 꿈속에서라도 엄마의 체취를 더듬어 보고 싶다. 그윽한 찔레꽃 향기와 엄마의 향기가 그립다. <칼럼니스트 / 탬파거주> myongyul@gmail.com<126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