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명열문필가의행복론> 4

<김명열문필가의행복론> 4

종교와 행복, 그리고 돈

<지난주에 이어서…………….>

과학의 모순이 존재하는 한, 결코 종교는 부정될수 없다. 인류가 과학의 모든 의문을 해결할수 없다면 결국 종교는 사라질 수 없다. 과학이 밝혀내지 못하는 부분은 결국 종교의 몫이다. 인간은 자신의 미래에 대해서 운명적으로 고민한다. 과학을 완전하게 정복할 수 없다면 인간은 거대한 자연앞에 하나의 연약한 존재로 가능할 뿐이다. 눈에 보이지 않는 세계나 개인의 운명을 종교에 의탁하는 것은 인간의 운명과 한계를 오히려 용감하게 인정할 수 있는 하나의 방법이다. 때문에 종교는 다른 가치와 대립되는 것이 아니다. 사회는 결국 사람들이 모여 사는 공동체이다.

개인의 성공과 자기만족을 위해서라도 인간적인 교류가 반드시 필요하다. 종교는 더 이상 과학과 대립되는 신비로운 존재가 아니라 오히려 인간적인 교류의 한 방법으로서 이해되어야 한다. 교회나 성당, 절 등의 종교기관을 통해서 인간은 더욱 다양한 사람들과 교류할 수 있다. 이런 점에서 종교는 오히려 도구적 수단으로서 충분히 기능을 발휘할 수 있을 것이다.

인간들은 자신의 무력함에 직면할 때 신을 찾게 되고 자기의 능력에 한계를 발견할 때 도움을 줄 대상을 찾는다. 그래서 실패의 순간은 신을 만날 수 있는 기회이며 종교를 찾게 되는 가장 큰 이유이다. 만사형통에 자신감이 넘치는 사람은 신(종교)를 필요로 하지 않는다. 신앙을 가진 사람들은 행복하다. 연구에 의하면 신앙(종교를 가진사람)이 없는 사람들보다 병에 잘 걸리지 않을 뿐 아니라, 혹 병에 걸려도 치료가 더 잘된다고 한다. 의사들의 96%가 신앙이 병 치료에 큰 도움이 된다는 것을 인정했다. 신앙을 가진 사람은 마음이 비교적 안정돼 있기 때문이다. 종교가 있다는 건 마치 어린아이가 낯선 동네에 갈 때 든든한 아버지와 함께 가는 것과 같다고 보면 된다. 깡패가 나타나도 아이는 두렵지 않다.

우리들 인생은 낯선 동네와 같다. 그 동네에는 깡패나 폭력배도 많이 있다. 실패와 좌절, 절망과 억울함, 그리고 질병 등이다. 정신의학에서 인간의 가장 원초적인 불안을 ‘죽음에 대한 불안’이라고 한다. 죽은 뒤 어떻게 될지 모르기 때문이다. 그러나 믿는 사람들에게 죽음은 새로운 삶의 시작일 뿐이다.

의사는 죽어가는 환자를 많이 본다. 어떤 환자는 두려워하며 죽지 않으려고 발악을 한다. 공포에 질려 덜덜 떨면서 얼굴색이 변하고 어쩔 줄 몰라 하며 버둥대다가 죽어간다. 그러나 신앙을 가진 환자들은 오히려 회진 온 의사를 위로한다.

편하고 밝은 마음으로 주변을 정리하고 고요히 떠난다. 이런 모습을 보고 신앙을 갖게 된 의대 교수도 있다. 신앙이 있건 없건 누구나 병에 걸리고 인생의 시련을 겪는다. 든든한 보호자가 있다는 게 무 신앙자와 신앙자의 큰 차이다. 그래서 신앙인(종교인)들은 불행이나 역경 속 에서도 행복과 안정을 찾을 수 있는 것이다. 이제 다시 본 론으로 돌아가 돈과 행복의 이야기다.

최근 미국 바팔로 대학교와 하버드 비즈니스 스쿨 연구팀은 경제적 성공을 목표로 하는 사람들이 실제로 행복을 느끼는지 알아보기 위해 연구를 진행했다. 2500명 이상의 참가자를 대상으로 조사한 결과, 돈의 가치를 높게 평가하는 참가자 일수록 더 많은 외로움을 느끼는 것으로 나타났다. 돈을 성공과 동일시 하는 사람일수록 경제적인 성공을 달성하기 위한 압박감을 느끼게 되고, 이런 압박감으로 인해 가족이나 친구들과의 관계가 소홀하게 된다는 것이다. 전문가들은 결과적으로 행복이 돈의 많고 적음보다는 어떻게 돈을 쓰는지에 달려있다고 주장한다. ‘소비를 권장하는 사회’인 요즘 고가의 제품을 사서 즐기는 것보다는 일상속의 경험에 투자하는 것이 행복의 질을 높이는 소비라고 할 수 있겠다.

특히 전문가들은 소비의 규모보다는 그 이후에 일어나는 감정의 질이 중요하다고 강조한다. 값비싼 승용차를 한번 구매할 때의 기분보다는 그 차를 타고 어떤 상대와 어떤 대화를 나눴는가에 촛점을 맞춰야 긴 행복을 지속할 수 있다는 이야기다. 즉 과도한 지출보다는 작은 기쁨을 위한 소비가 진정한 돈으로 행복을 사는 방법이라고 할 수 있겠다.

에리히 프롬(Erich Fromm)의 저서에서 보면 소유적 실존 양식을 현대문명의 재앙으로 보고 있다. 그 내용에서 보면 소유물을 위한 소비와 체험을 위한 소비로 나누고 있는데, 결론은 소유물을 위한 소비보다 경험을 위한 소비가 더 크고 오랜 행복감을 주었다고 강조하고 있다. 그 이유는 경험을 위한 소비는 많은 이야기 거리를 만들어주고 있다. 가령 옷이나 물건, 자동차를 샀을 경우 한두번에 끝나지만, 몇년전에 적잖은 경비를 지출하고 다녀온 여행에 대해서는 지금도 이야기를 종종하고 있다. 또한 이것으로 끝나지 않고 앞으로도 계속 할 것이다. 어떤 여행은 우리의 인생을 바꾸지만 어떤 옷이나 물건은 우리의 인생을 바꿀 수 없다. 즉 어떤 생각은 나의 인생을 바꿀 수 있지만 어떤 자동차는 내 인생을 바꿀 수 없다.

우리가 행복해지기를 원한다면, 돈으로 경험을 살 필요가 있다. 경험에도 이력서가 있다. 행복이 경험적 이력서와 비례한다. 당신은 돈을 벌어 어떻게 쓸 것인가?

할 수만 있다면 이야깃거리를 만드는데 쓰자. 경험(이야기)을 사는 소비는 행복을 만들어준다. 만약 당신이 당신의 자녀에게 자녀를 위한 교육을 시킨다면 경제교육의 지혜를 가르켜라. 돈을 열심히 벌되 많은 경험에 투자를 하라는 얘기다. 자녀들에게 돈에 대한 최고의 가르침은, 경험을 풍요롭게 하는 소비를 가르치라는 말이다. 우리가 세상을 살다보면 많은 제약과 환경의 구속을 피할 수가 없다. 이러한 환경이 우리들의 마음 또한 지배를 한다. By doing good. Being good. 이 말의 뜻은 선한 행동을 하다보면 선한사람이 된다는 이야기다. 우리가 살아가는데 가장 많은 영향력을 미치는 환경은?……… 바로 그것은 내 주변의 사람들이다. 옛 부터도 선인들은 주변 환경의 중요성을 강조해왔다.

그 실제적인 예로 맹모삼천지교(孟母三遷之敎), 또는 근묵자묵(近墨者墨=까만것 곁에 있으면 까맣게 된다), 근주자적(近朱者赤=붉은것 곁에 있으면 붉게 된다). 여기서 잠간 맹모삼천지교에 대한 설명을 드리고 다음 장으로 넘어가겠다. 요약(要約)을 해 말씀드리자면, 맹자는 본명을 맹가(孟軻)라고 하며 자(字)는 자여(子與) 또는 자거(子車)라고도 한다. 중국 전국시대의 유교 사상가로 인간의 본성은 착하다는 성선설(性善說)을 주장하였다. 성선설은 맹자가 주장한 학설로 인간의 본성은 선하지만, 주위의 환경이나 욕심의 영향으로 악하게 된다는 학설. 이와는 반대로 성악설(性惡說)도 있다. 이것은 순자(荀子)가 주장한 학설로, 인간의 본성은 악(惡)하므로 학습을 통하여 선한 행위를 습득해야 한다는 학설이다.

맹자가 어렸을 때의 이야기다. 살던 집 근처에 묘지가 있었는데, 맹자가 장사지내는 흉내를 내며 놀자 그의 어머니는 묘지 근처가 아들의 교육을 위한 좋은 환경이 아니라 생각하고 집을 시장 근처로 이사를 했다. 시장 근처로 이사를 한 맹자는 시장 상인들이 물건을 파는 흉내를 내며 놀았다. 이를 목격한 맹자의 어머니는 아들의 교육을 위해 다시 한번 이사를 하였다. 세 번째로 이사한 곳은 서당 근처였는데, 맹자가 글을 읽는 흉내를 내며 놀자 맹자의 어머니는 드디어 안심을 하며 그곳에 정착하여 살았다. 이상의 이야기는 열녀전에 실려 있는 이야기로, 맹모삼천지교는 아들의 교육을 위해 좋은 환경을 찾아 세번이나 이사를 했던 이 맹자의 어머니 이야기에서 유래된 고사성어이다. 즉 이야기의 핵심은 주변의 환경이 그만큼 큰 영향을 미치고 있다는 사실적 이야기다. 우리주변의 환경, 어떤 사람과 관계를 맺고 주변에 어느 사람이 있는가가 그만큼 무척이나 중요한 것이다. 따라서 주변의 환경이나 사람들이 나의 행복에도 커다란 영향을 미친다는 것도 부정할 수가 없는 이야기다.

경남 합천 해인사 장경판전주련에 이런 좋은 글귀가 써 있다.

원각도량하처(圓覺度量何處) 라는 글귀다. ‘깨달음의 도량=즉 행복한 세상은 어디 있는가?’라는 뜻이다. 그 질문에 대한 답은 맞은편 기둥에 새겨져 있다. 현금생사즉시(現今生死卽時) ‘지금 생사가 있는 이곳, 당신이 발 딛고 있는 이곳이다’이다. 지금 이 순간에 처한 환경과 현실에 만족하며 살고 충실 하라는 뜻이다. 삶의 모든 순간이 첫 순간이고 마지막 순간이며 유일한 순간이다. 지금이 순간은 영원할 수 있지만 마지막이 될 수도 있는 순간이다. 평생 일만 하고 사는 바보들이 놓치고 사는 것이 바로 지금(Present)이다. 당신에게 주어진 지금의 매 순간을 생애 마지막인 것처럼 살아가자. 지나간 과거에 연연하지 말고 또한 내일의 일을 오늘 걱정하지 말자. “어제의 비로 오늘의 옷을 적시지 말고 내일의 비를 위해 오늘의 우산을 펴지 마라”는 말이 잇듯이 지금 주어진 현실에 충실을 기하며 살아가자는 얘기다. 중국인들이 애용하는 상용구중에 이런 말이 있다. 어제의 태양으로 오늘의 옷을 말릴수 없고, 오늘밤 달빛으로 어젯밤 그림자를 비출 수 없다. 이상의 글귀에서 뭔가 느낌이 들었을 줄 믿는다. 즉 쉽게 단적으로 말한다면 지금에 충실할 오늘이 중요하다는 말이다. 지금 현재 후회 없는 삶을 창출하는 것이 인생의 행복을 이어가는 것이다.

우리가 지상 최고로 추구하고 바라는 행복은 전염성이 대단히 강하다.

즉 행복은 전염된다. 하버드대학의 니컬러스 크리스태키스, 제임스 파울러, 이 두사람의 저서 수학과 의학, 과학으로 인간관계, 네트워크와 커뮤니티의 중요성 증명 등, 이 책의 내용중에서 사회적 관계의 놀라운 힘(The surprising power of our social networks)은 우리가 생각한 것보다 훨씬 더 놀라운 것을 보여준다. 이 내용에서는 3단계의 영향규칙을 설명해주고 있다. 친구(1단계) 친구의 친구(2단계), 친구의 친구의 친구(3단계) 까지 영향을 미치고 있다는 이야기다. SNS에서 말하는 사회적 관계는 평균적으로 6단계를 거치면 거의 모든 사람과 연결된다는 사회적 관계분석 설이다. 그에 대한 연구분석 결과를 본다면, 1)불행한 사람은 불행한 사람끼리 각각 무리를 이루고 상종하며 살고 있다. 2)불행한 사람은 연계적으로 사회적 관계가 없다시피 했다. 만약 나의 곁에 불행한 사람들만 주변에 있다면 나도 그 영향을 받아 불행해질 확률이 높다는 분석이다. 친구가 행복할 경우 내가 행복할 확률은 15% Up, 친구의 친구가 행복할 경우 내가 행복할 확률은 10%Up, 친구의 친구의 친구가 행복할 경우 내가 행복할 확률은 6% Up. 이후 3단계를 벗어나 4단계쯤 가면 그에 대한 영향력은 거의 소멸되고 만다. 그만큼 우리의 주변에 어느 누가 있느냐가 중요하다는 설명이다. 여기서 얻은 결론은 바로 행복하고자 한다면 행복한 사람 곁에 머물라는 얘기다.

<다음주에 마지막 행복론 이어짐>

칼럼니스트 / 탬파거주 myongyul@gmail.com <12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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