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명열기자의성지순례기행문> 32

<김명열기자의성지순례기행문> 32

아르논 강(Arnon River)

요르단의 그랜드 캐년, 2천년의 요새

 

오전에 우리들 일행은 마인 유황 온천을 방문하여 온천욕을 즐기고 점심 식사후에는 오후일정의 첫 방문지로 아르논 강 일대 요르단의 그랜드 캐년이라고 불리는 아르논강 협곡 골짜기를 방문했다.

아르논은 요르단의 고원지대에서 부터 발원하여 깊은 협곡을 통하여 사해 동쪽연안 중간지점으로 흘러드는 요르단 최대의 강이다. 아르논은 일찍이 모세가 이스라엘 백성을 이끌고 광야생활을 하며 경유한 곳이다. 이 강은 모압과 아모리왕 시혼의 나라와 경계를 이루었으며, 후에 르우벤 지파의 남쪽 경계가 되었던 곳이다. 메사는 아르논 골짜기에다 대로를 만들었다고 주장하였다. 아르논 강의 근원지는 레준 지역인데 그곳에서부터 남북 약 80Km에 걸치는 많은 지류를 모아 높은 지대에 깊은 하상을 침식하면서 서쪽으로 흘러 사해로 들어간다. 아르논강이 흘러서 통과하는 협곡은 다본의 남부지역에서는 그 폭이 약 4Km, 그 하상이 절벽 꼭대기로부터 485m에 달할 정도로 엄청나게 큰 규모다.

많은 지류가 합류하여 흐르기 때문에 아르논 골짜기로 불렸다. 양쪽 단(절벽)의 높이는 510m나 되고 천연적인 요새로 되어있어 아모리 사람의 경계를 이루고 있다.

아르논 고지는 헤스본과 아르논강 사이의 높은 지대를 말하며 이전 모압땅을 아모리 왕 시혼이 점령한듯 하다. 모압에 관한 심판을 선포하면서 ‘모압의 여인들은 아르논 나루에서 떠다니는 새 같고(사16:2)’라고 성경에 언급된 강이기도 하다. 아르논강의 오늘날 이름은 와디 무지브(Wadi Mujib)이다. 이 골짜기는 요르단 국왕 압둘라가 요르단에서 가장 아름다운 곳이라 칭송한 자연 계곡으로 요르단의 그랜드 캐년이라고 불릴만큼 광대하고 아름답다. 이 골짜기 동쪽에는 영화 ‘아라비아의 로렌스’의 무대로 유명한 ‘신의 사막’ 와디럼이 있다. 이곳은 아라비아 반도에서 올라오는 캬라반(약대 상인들)이 시리아와 레바논, 팔레스타인 지역으로 가는 길목이라고 한다.

이미 전 주에서 얘기했듯이, 이곳에 와서 보니 많은 관광객들이 이곳을 찾아와 북새통을 이루고 있었다. 그중에 한국 관광객들 일행 40여명도 이곳에 우리들 일행과 동시에 도착을 했다. 모두가 즐겁게 이곳 저곳을 둘러보며 협곡의 경관을 관망하며 담소를 나누고 있었는데, 아무리 경치가 좋고 즐거운 분위기라고 해도 신체적 생리현상은 억제할 수가 없는 법이다. 오랜 시간 버스를 타고 오다보니 모두가 화장실 이용이 필요하게 되었다. 너도 나도 우르르 화장실로 몰려갔다.

그런데 간이 화장실이 두개가 있는데, 사람들은 몇십명씩 몰려와서 급하게 화장실을 사용하려고 모이다 보니 기나긴 대기 행렬을 이루지 않을 수 없었다. 화장실 이용료는 대변이건 소변이건 무조건 미화 1달러를 받고 있었는데, 어느 한사람이 큰 일?(대변)이라도 본다면 일은 걷잡을 수 없이 더 지연된다. 이곳에서 돈을받고 있는 요르단 중년 남자는 입이 함지박 만큼 벌어져서 손 안에 쥐어져 모이는 달러 화폐에 싱글벙글이다. 금새 1백달러가 넘는 거금(?) 이 손 안에 쥐어졌다. 화장실 내부는 온통 불쾌한 냄새로 코를 틀어막게 했는데, 간이 화장실이라 그러려니 하며 참았지만 돈을 받으면서 청소는 엉망으로 해놔서 너무나 불쾌하며 역겨웠다. 어느 사람은 농담조로 하는 말 “내가 이곳에 와서 깨끗하게 화장실 짓고 사업을 벌리면 떼돈을 벌어 금방 재벌이 될 것” 이라고 말하기도 했다. 경치는 좋은데 제반 위생시설이 불량하고 미비하니, 제발 요르단 관광청 당국에서는 돈을 벌기 이전에 화장실부터 개량하여 관광객들에게 불편하지 않게 해주었으면 하는 마음이 간절했다.

그곳, 아르논강 골짜기 관광을 마치고 다음 행선지로 우리들 일행은 메드바(마나바)~ 성 죠지 교회가 있는 곳으로 향했다.

메드바(마나바) 성 죠지 교회(비잔틴 시대의 모자이크로 유명한 성 죠지교회)는 ‘물이 많은 시내’라는 뜻을 지닌 메드바는 암만에서 30Km, 카락에서 북쪽으로 약 85Km 떨어진 지금의 마다바(Madaba)지역이다. 요르단 고원에 있는 이곳은 출애굽한 이스라엘에게 점령당하기 전에 아모리왕 시혼에게 점령당한 모압의 성읍이었다. 그러나 이스라엘에게 점령당한 후(민 21:30) 르우벤 지파에게 할당되었다. 다윗 때에는 암몬인 손에 있었던 것으로 생각된다. 모압 비석에 의하면 북 이스라엘의 오므리 왕은 메드바를 다시 찾았다고 기록되어 있으며, 그 아들 대까지 40여년간 이곳에서 거했다. 그러나 메사에 의해 이곳은 다시 정복당했다. 그 뒤에도 이 땅의 소유주는 계속 바뀌었음을 알 수 있다.

기원후 106년 마다바는 아라비아 지방의 도시로 편입되면서 기독교문화가 급속히 확산되어 나갔다. 디오클레시안(Diocletian)의 박해 때에는 많은 기독교인들이 순교당하기도 하였고, 기원후 451년의 칼케톤(Chalcedon) 회의록에 근거하여 마다바는 보스트라의 대주교 밑에 주교를 가지고 있었음이 밝혀졌다. 따라서 비잔틴시대에 메드바는 기독교의 한 중심지로서 크게 번영하였다. 그러나 기원후 614년에 페르시아의 침공에 의해 마다바의 비잔틴 도시는 파괴되었고, 8세기 중반에 이 지역을 강타한 지진으로 잊혀진 도시가 되었다. 1880년 초에 이르러 카락(Kerak)에서 그곳에 사는 기독교인들과 회교도들이 종교문제로 충돌하게 되자, 숫적으로 열세였던 크리스챤은 추방당할 위기에 처하게 되었고 이 상황에서 카락의 크리스챤들은 황급히 당시 통치자 오토만 터키 당국에 그들이 이주해서 살 수 있는 땅을 배정해 달라고 요청하게 된다. 이러한 청원에 따라 오토만 제국은 카락에서 북쪽으로 약85Km 떨어진 곳에 있는 마다바의 땅을 지정해주었다. 오토만 제국이 오갈데 없는 카락의 크리스챤들에게 과거 크리스챤 도시로 명성을 떨쳤던 마다바 지역을 배정해줌으로서 이곳은 다시 기독교 도시로서의 면모를 갖추게 되었다. 그러나 터어키 당국은 이주자들로 하여금 집은 자유롭게 짓되, 교회만은 과거 비잔틴 시대 교회 건물들이 있던 자리에만 지을 수 있도록 제한하였다. 마다바로 이주한 2천여 크리스챤들은 무너진 비잔틴시대의 교회터 위에 새 교회를 세우는 작업을 시작했다. 1887년 마다바에 머물던 라틴 선교사 슈마허(G. Schumacher)가 처음으로 도시의 주요 흔적을 찾아냈으며 1897년에 마다바 지도가 클레오파스 키킬리디스 신부에 의해 발견되었다.

지금의 마다바는 우리나라의 작은 읍 정도의 마을인데, 이마을 북쪽에 그리스 정교회에서 세운 성 죠지 교회가 있다. 이 성 죠지교회가 주목을 받는 이유는 1896년에 발견된 모자이크 지도를 바닥으로 해서 성 죠지교회가 세워졌기 때문이다.

원래 이 모자이크 지도는 고대 근동지역의 지도로서 가로 5.6m, 세로 15.7m의 대형으로 약 30평 바닥을 채울수 있다. 그러나 그간 3분의2 가량이 훼손 되고, 지금은 10평정도 분량만 남아있어 보는 이들의 마음을 안타깝게 한다. 그나마 한가지 다행스러운 것은 예루살렘 부분은 동편 끝의 약간만 제외하면 잘 보존되어 비잔틴시대의 예루살렘을 연구하는데 귀중한 자료가 되고있다. (관련성경 민21:30, 수13:9, 수13:16, 대상19:7, 사15:2).

이 모자이크 지도는 북쪽의 레바논의 시돈과 두로, 남쪽으로는 이집트의 델타 지역까지 연결되어있다. 이 지도상에는 많은 고대 유적지들과 교회가 나타나 있으며 예루살렘 지역의 지도는 손상되지 않은채 보존이 잘 되어있다.

특히 성 죠지교회 바닥에 있는 모자이크 지도에는 기원후 542년 11월20일에 봉헌된 예루살렘의 네아 교회가 그려져 있어 유스틴 황제(기원후 527~565)때 만들어진 것으로 추정된다. 이로 볼때 마다바 성 죠지교회의 지도는 지금까지 발견된 로마~비잔틴 시대의 가장 오래된 지도에 해당된다. 마다바 지도는 현대의 지도 그리기 기법에 기준하면 사실적 균형미는 많이 떨어지지만, 성서 지리학의 연구결과 이 지도의 정확성은 더욱 확증되고 있어서 이지도의 역사적 가치를 더욱 높여주고 있을 뿐 아니라 고고 지리학적 ,지형학적 가치는 매우 높다고 할수있다. 모자이크 전성기는 로마시대와 비잔틴 시대였다. 이때 지은 저택이나 교회건물의 바닥은 거의 예외 없이 모자이크로 장식되었다. 모자이크 작품은 자연석을 소재로 삼아 만들었기 때문에 견고할뿐더러 아무리 시간이 지나도 색깔이 변하지 않는것이 특징이다. 비잔틴 시대 마다바는 요단강 동편 지역에서 가장 중요하고 번성하는 기독교 도시가 되었고 이때 이곳은 모자이크 예술의 중심도시가 되었다. 당시 이름을 날리던 장인들이 모여들면서 이곳은 모자이크 도시로 비잔틴 세계에 널리 알려지게 되었다. 기독교 도시였던 마다바에는 많은 교회들이 세워졌고, 교회의 바닥에는 모자이크 거장들이 심혈을 기울인 작품들이 남겨졌다. 그들의 작품중 최고의 걸작이 ‘마다바 모자이크지도’ 이다.

우리들 일행은 성 죠지교회와 시내의 유적지를 둘러보고 직접 모자이크로 작품을 만들고 있는 현장의 상점들을 들어가 보았는데 과연 듣고 보던대로 그들의 솜씨는 놀라울 정도로 우수했고 장인의 경지에 이르른 느낌이 들었다. 한 조각, 한 조각, 꼼꼼하고 세심하게 수를 놓듯 섬세하고 우아하게 작품을 만드는 그들의 솜씨에 혀를 내두를 뿐이었다.

참고로 점심식사 때 어느 부페식당에 들렀는데, 점심식사를 제공하는 식당 종업원들의 서비스가 놀라웠다. 수많은 관광객들이 몰려들었는데, 일사분란하게 서브하는 그들의 모습이 이채로웠다. <다음 주에 이어짐>   12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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