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명열칼럼> 옛날 서당의 훈장(書堂의 訓長)이야기
지난달 6월12일자 칼럼난에 신언서판(身言書判)에 대한 글을 기고하고 난후 독자들 몇분께서 댓글의 이멜을 보내주며 메세지를 주셨다. 보내준 내용 중에, “내가 어렸을때 서당의 훈장을 하셨던 할아버지”에 대한 이야기다. 그중에 나이가 젊은 독자께서는 “훈장이 무슨 일을 하는사람인가요?” 라고 물은 사람도 있고, 아주 나이가 지긋하신 어르신께서는 자기의 고향이 경북 안동인데 자기도 어렸을때 서당에서 훈장선생님께 천자문을 배웠다며 , 참으로 오랫만에 훈장소리를 글에서 읽게 되니 반가움은 물론 오랜 옛날 어렸을 적의 서당 다닐때 추억이 아련히 떠오른다고 했다. 또 다른 한분은 “훈장 할아버지를 두셔서 문필가 선생님은 기고하는 글속에 가끔씩 한자가 많이 나오는군요. 한자의 뜻을 함께 번역해주며 글을 써 주시니 너무나 이해가 쉽고 공부가 많이 된다”고 했다. 그 외 다른 몇분의 독자들도 독후감의 댓글을 보내주었는데 생략하기로 하겠다.
훈장, 서당의 훈장을 현대말로 옮긴다면 학교의 선생님을 일컫는 말이다. 서당은 비록 사설(私設)이었으나 지방 문화의 창달과 국민교육에 큰 영향을 주었다. 지금도 어렴풋이 나의 머리속에 기억으로 떠오르는 것은, 훈장이셨던 나의 할아버지는 밤낮없이 나이어린 학동으로부터 15~18세의 큰 아이들까지 서당에서 글을 가르쳤으며 때로는 공부를 게을리 했거나 잘못을 저질렀을때(예:내가 알기로는 남의집 참외밭에 몰래 들어가서 참외서리(참외 도둑질)를 한 소년에게 호통을 치시며 종아리를 친 것으로 안다) 회초리로 종아리를 때리는 모습까지 머리속에 남아있다. 올바른 인성 교육과 지식, 그리고 학문과 인격을 잘 가르치기 위해서 가해지는 사랑과 교육적 입장의 회초리였던 것으로 믿어진다.
그런데 오늘날에는 초달(楚撻)하는 부모나 훈장이 없다. 옛날 서당에서 잘못이 있는 학동(學童)에게 회초리로 종아리를 쳐서 바로 잡았던 것을 초달이라고 한다. 회초리는 큰 나무를 자른 밑동에서 새움이 난 가지를 잘라서 사용했다. 종아리를 걷게 하고 잘못을 바로잡기 위해 종아리를 쳤는데, 함부로 감정을 가해 남용하지 않았다. 오늘날의 체벌이나 곤장과는 다르고 반드시 잘못을 뉘우치며 반성하는 기회로 삼도록 종아리를 치며 가르쳤는데 요즘은 초달하는 부모나 선생이 없다.
서당 훈장이 회초리를 칠때는 반드시 목침(木枕)에 올라서서 스스로 바지를 걷어 올리게 하여 왜 초달을 하는지를 인지(認知)하도록 했다. 종아리를 맞으며 스스로 자기의 잘못을 뉘우치고 정신을 차리도록 반성하는 매였지, 훈장의 감정이 개입되지 않았다. 학동이 억울해 하지 않았고 오히려 사람 됨됨이를 기르도록 지도편달을 하는 것으로 인정하고 학문에 더욱 정진하였다고 한다. 여기에 참고로 옛날 우리나라 조선시대때 서당교육과 정서지능에 대한 설명을 드리도록 하겠다.
조선시대 서당교육과 정서지능
서당은 옛날부터 내려오는 글방, 서재, 사숙 등 여러 가지 이름으로 불렸으나 1659년(효종10년) 송준길에게 명하여 서당 학규(學奎)를 제정하게 한 것이 향학지규(鄕學之規)로서 서당이라는 명칭이 처음으로 학규상에 나타난 것이다. 서당은 고려시대부터 조선시대에 걸쳐서 국민대중의 자제들을 위한 민간의 사설 초등교육기관 이었다. 비록 향촌사회에 생활근거를 둔 사족(선비족)과 백성이 주제가 되어 설립한 초등관계의 교육기관이었으나, 서당은 민중의 문자교육과 그 마을의 도덕적 향풍을 수립하고 전수하는데 가장 큰 역할을 했다. 조선시대는 신분의 차이가 있는 계급사회였지만, 서당의 입학 자격은 신분적 제한이 없어 사(士), 농(農), 공(工), 상(商)은 물론이고 천인의 자제들도 입학할 수 있었다고 한다. 이를테면 천인, 노비의 신분으로 16,17세기의 유명한 학자였던 서기(1523~92), 송익필(1534~99), 홍세태(1653~1725)등은 모두 서당출신 이었다고 한다. 이러한 점에서 서당은 양반들의 사설 교육기관인 문도제(門徒制)와는 구별이 되는 기관으로서 조선시대의 보편적 교육 실태를 알아볼 수 있는 대표적 교육기관이라고 할 수 있다.
서당의 설립목적은 남아들에게 인륜을 가르치고, 향촌사회에 있어서 상하의 분별과 예법 및 유학의 전파에 있었다고 한다.
그러므로 서당의 궁극적인 목적은 사학과 향교에의 입학을 위한 준비교육이었으나, 실제적으로는 지방의 청소년들에게 한문을 깨우쳐주고 유교에 대한 초보적인 지식과 예법을 이해시키는 역할을 하였다. 서당교육의 실태를 보면, 서당의 학생은 7~8세로부터 15~17세의 아동들이 그 중심이 되었으나 때로는 20세 안팍으로 부터 25세의 학생이 있는 경우도 많았다고 한다.
여성을 위한 규방교육의 서당이 가숙(家熟)의 형태로 설립되기도 하였지만 서당은 원래 남성중심의 교육기관이었다. 서당의 교육내용은 강독(講讀), 제술(製述), 습자(習字)의 세가지였는데 강독은 처음에 ‘천자문’으로부터 시작하여 ‘동문선습’, ‘통감’, ‘소학’, ‘4서3경’, ‘사기’ 등으로 올라갔으며 서당에 따라 ‘춘추’ ,‘예기’, ‘근사록’등을 읽히기도 하였다고 한다. 제술은 일반적으로 오언절구, 칠언절구, 사률(四律), 십팔구시(句詩), 작문 등을 가르쳤으며, 습자는 처음에는 해서를 많이 연습시키고 그다음 행서와 초서를 익히게 하였다.
서당은 누구나 뜻있는 사람이면 훈장 한사람과 방 한칸으로써 마음대로 설치할 수 있었고, 훈장의 자격은 따로 정해져있지 않았으므로 각 서당에서 가르치는 교육내용은 훈장의 능력에 따라 천차만별 이었다고 한다. 그러나 대체로 아동들은 처음에 천자문, 소학 같은 쉬운 것을 배우다가 점차로 어려운 경서를 배우게 된다. 경서쯤 배우게 되는 상급생은 접장이라 하여 하급생을 통솔하게 되며, 훈장을 도와 처음배우는 아동들을 지도하였다. 서당의 교수방법은 처음에 천자문, 동문선습 등의 한문자를 한자 한자씩 가르치고 다음에 단어를 붙여 음독하는 것을 가르치고 그다음에 일장(一章)의 대의(大義)를 가르쳐서 마지막에는 자독자해(自讀自解) 즉 학습자 스스로 풀이하여 읽도록 하였다. 특히 다독보다 숙독을 권장하였으며 특별히 쉬는 시간이 없이 하루 종일 글을 읽고 쓰도록 하였다고 한다. 아동은 이렇게 조상의 선행이나 명언을 다독과 숙독을 함으로서 바른 정서를 함양하게 되며 자신의 행동거지에 기본을 이루게 되었으리라고 본다.
정서지능의 관점에서 본다면 개인이 자기조절을 위해서 얼마나 많은 레퍼토리를 가지고 있으냐와 정서 상황에서 조절 책략을 얼마나 쉽게 끌어낼 수 있느냐는 매우 중요한 것이다. 그러한 책략을 사용할 동기가 부족하면 그 책략을 활성화시킬 수 없다. 이러한 면에서 인간의 선례나 고전의 다독, 숙독은 동기부여와 많은 레퍼토리의 축적이 유익하였을 것으로 보인다. 8월 추석이 지나면 밤글을 장려하여 흔히 자정이 넘도록 공부를 시켰다고 전해진다. 학습의 진도와 내용은 훈장이 학생 각자의 능력에 맞추어 개별적 지도를 하였으므로 일률적으로 진행되지는 않았다. 서당의 훈장은 밤글뿐 아니라 식사, 잠자는 시간까지 하루 24시간을 학생들과 같이 생활하였다고 한다. 그러므로 훈장은 부모를 대신하여 하루종일 학문뿐만 아니라 사람됨을 가르쳤으므로 군(君), 사(師), 부(父) 일체라는 말을 듣게 되었다. 이러한 서당교육은 현대의 지식교육 위주의 교육이 이루어지고 있는 학교에서의 교육과는 상당히 차이가 있는 교육으로서, 특히 인격과 인격이 맞부딪히는 만남을 통하여 자연스럽게 서로의 감정과 정서를 표현하고 서로에게 공감을 형성하는 귀중한 교육이 이루어졌다고 보겠다.
또한 서당교육에서는 학생들의 정서에 따라 학습의 내용을 바꾸어 효율적인 교육을 실시함으로써 정서의 사고촉진 능력을 개발시켰다고 볼 수 있겠다. 예를 들어 서당교육에서는 학과와 계절을 조화시켜 학습하게 하였다고 하였는데, 여름의 더운때는 될 수 있는 대로 머리를 쓰지 않고 흥취를 돋우는 시(詩), 율(律)등을 읽고 짓는 것으로 일과를 삼았고, 봄과 가을에는 ‘사기’나 고문과 같은 것을 읽히고, 겨울에는 어려운 경서를 읽게 하였다. 여름에는 산간, 강변에 임시로 지은 간소한 초당이나 또는 절간을 빌어서 시회(詩會)도 가졌고, 흥미있는 유희로서 여가시간을 보내었고 때로는 여가시간에 놀이를 학습에 이용하여 많은 지식을 얻게 하기도 하였다.
이를테면 쌍릉 놀이를 이용한 승향도(陞鄕圖) 또는 종정도(從政圖)라고 한다. 놀이를 통하여 관직명을 익히도록 하는가 하면 옛 사람의 시를 암송시키는 초중종(初中終)놀이, 우리나라 8도의 군 이름을 기억시키는 ‘고을 모둠놀이’ 이밖에 조조(曹操)잡기, 글 대구(對句) 맞추기 등이 중요한 놀이였다고 한다.
서당에서는 책을 한권 배우고 나면 축하행사를 벌이는 책걸이가 유행하였다고 하는데, 이는 훈장에 대한 감사의 마음 표시이며 동시에 아동을 격려하는 뜻이 담겨있다. 이러한 행사속에서도 다른 사람에게 감사하는 마음이나 격려하는 마음 등을 통하여 학문을 하는 것이 지식습득에만 그치는 것이 아니라 다른 사람의 정서에 대한 이해와 배려가 중요함을 간접적으로 가르쳤다고 볼 수 있겠다. 책걸이뿐만 아니라 일부 서당에서는 글을 배우다가 필업(졸업)을 하면 졸업장 대신 상징의 짐승을 한 마리씩 주기도 하였다. 성격이 게으르면 닭을 주고, 야심이 많으면 염소를 주고, 약삭빠르면 돼지를 주고, 주의력이 산만하면 거위를 주고, 느리면 말을 주었다고 한다. 예를 들면 정탁이 유학의 영남학파인 남명 조식의 문하생으로 공부를 마치고 필업을 하여 문하를 떠날 때 스승 남명은 ‘뒷간에 소 한마리를 매어놓았으니 몰고 가도록 하라’고 하였다고 한다. 이는 실제의 소가 아니라 마음의 소로서 기(氣)가 세고 조급한 정탁에게 세상을 살아갈 때 소처럼 둔중하게 살아가라고 그의 결함을 일러주며 교훈을 하는 것이었다고 한다. 후에 정승의 자리에까지 오른 정탁은 큰일을 당할 때마다 이 마음의 소를 상기하며 교훈으로 삼았다고 하는데, 이러한 일화속의 졸업식장면은 우리나라 현대의 교육이나 서양의 교육에서는 상상할 수도 없는 장면이지만, 옛날 서당에서의 교육이 단순한 지식전달로 끝나는 것이 아님을 잘 보여주고 있는 예라고 할 수 있겠다.
상대의 기분이 상하지 않도록 간접적으로 마음의 짐승을 통하여 학생의 약점을 알려주고 스스로 자신의 정서를 조절할 수 있도록 도와주었다는 것이 현대의 의미로서 정서지능의 개발을 도와주는 직접적인 방법의 교육이었다고 볼 수 있다.
<칼럼니스트 / 탬파거주> myongyul@gmail.com <122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