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명열칼럼> 사회적 거리두기
꽃들의 잔치가 펼쳐지는 봄날은 소리없이 지나가건만, 코로나19 라는 전염병을 걱정하며 당분간은 서로가 거리를 두고 살아야 하니, 가까운 사람들이 서로 어울려 웃고 울며 살아가는 소소한 일상들이 얼마나 소중한 가를 깨닫게 한다.
아마도 이세상에 인류가 존재했을 때부터 전염병도 함께 하였을 것이라는 생각이든다. 이집트의 파라오 람세스 5세(BC 1145~1141)의 미라에서 천연두(Small pox Variola virus)병변이 발견되었다. 그리고 옛날 통일신라 헌강왕(재위 875~886)때 처용이 역신(疫神)을 쫓았다는 설화에서 통일신라 시대에도 천연두가 창궐했음을 알수있다.
서기 1519년 에스파냐의 에르난 코르테스(1485~1547)는 부하 550명을 이끌고 아즈텍 제국에 침입해 천연두로 죽은 군인의 시체로 면역성이 없던 아즈텍인들을 감염시켜 사망케 하여 승리하였다. 이와 같이 천연두는 인류의 역사상 오랜 기간 광범위한 유행을 일으켜왔으며 20세기에도 많은 사망자를 유발했다. 하지만 예방 백신의 보급에 따라 1977년 소말리아의 마지막 감염자 이후로 신규 감염자 발생이 없어 세계보건기구가 1979년 12월9일에 지구상에서 천연두박멸을 선언, 2019년 12월 박멸 40주년을 기념하였다.
흑사병(Peste)이 14세기 중반 유럽에서 대 유행해 약 7500만명 인구의 3분의1이 사망해 농노들의 노동력 부족으로 봉건제도가 무너졌다. 1800년대에는 인도 벵골만의 콜레라가 유럽으로 퍼져 5차례나 유행하여 이를 예방하기위해 상하수도 정비, 화장실 청결을 가져왔다. 또 이때 결핵도 유행하여 결핵으로 유럽인구의 4분의1이 사망하였고, 1882년 코흐에 의해 결핵균이 알려지게 되었고 아직도 결핵은 완전히 극복되지 않고 있다. 1918년에 처음 발생해 2년동안 전 세계에서 2500만~5000만명의 목숨을 앗아간 스페인독감(Spainish influenza)은 14세기 중기 페스트(흑사병) 보다도 훨씬 많은 사망자가 발생해 지금까지도 인류 최대의 재앙으로 불린다. 이로 인해 1차 세계대전(1914~1918년)이 서둘러 종식되었다.
참고로 1차 세계대전으로 사망한 사람은 1500만명 정도였다. 우리나라도 이때 스페인 독감으로 740만명이 감염되었고 14만명이상이 죽었다. 세계적으로 1957년 아시아 독감에서는 100만~200만명 사망, 그리고 1968년 홍콩독감에서는 1백만명이 사망한것으로 추산된다.
지금은 코로나 바이러스19가 세계를 공포로 몰아넣고 있다. 코로나19의 원인은 코로나바이러스는 RNA 바이러스라고 한다.
사람에게 전파 가능한 코로나바이러스는 지금까지 6종이 알려져 있었다. 이중에 4종은 감기를 일으키는 바이러스 이고, 그밖에 사스(중동 호흡기 증후군), 코로나 바이러스가 있다. 코로나19는 일곱번째 사람 감염 코로나바이러스인 셈이다. 이는 박쥐에서 유래한 사스 유사 바이러스와 유전자 유사성이 89.1%에 달한다. 사스는 2002년 11월, 중국 남부 광동성에서 처음 발생해 홍콩을 거쳐 전 세계로 확산된 전염병이다. 페스트가 유럽을 휩쓸고 중국까지 가는데 10년이 넘게 걸렸다면, 사스는 홍콩의 항공노선을 따라 1주일도 채 안돼서 전 세계의 30여개국으로 퍼져나갔다. 메르스는 치사율 35%로 2012년 사우디아라비아 에서 처음 발견된 뒤 중동지역에서 집중적으로 발생했으나, 2015년 한국에서도 38명이 사망한바 있다.
세계보건기구(WHO)에 중국 후베이성 우한발생 코로나19가 처음 보고된 것은 작년 12월31일이었으나, 이미 9~11월에 발생했다는 설도 있다. 세계보건기구가 2020년 1월9일 해당 폐렴의 원인이 새로운 유형의 코로나바이러스(SARS- Cov-2. 국제 바이러스 분류 위원회 2월11일 명명)라고 밝히면서 병원체가 확인됐다. 감염자의 비말(침방울)이 호흡기나 눈, 코 , 입의 점막으로 침투될 때 전염된다. 감염되면 약 2~14일(추정)의 잠복기를 거쳐 발열(37.5도 이상), 기침이나 호흡곤란 등 호흡기증상, 인후통, 폐렴이 주 증상으로 나타나지만 무증상 감염사례도 드믈게 나오고 있다.
코로나바이러스19 전염병 때문에 세상이 너무나 어수선 하고 불안하며 공포감마져 팽대해져 사람을 만나기조차 겁이 나는 세상이 되어버렸다. 요즘만큼 인간이란 말이 실감나는 때도 없을 것이다. 한 사람을 가리킬 때도, 사람이란 뜻의 이 말이 쓰이는 건 의미심장해 보인다. 인간이 혼자만으로 살 수 없다는 절박한 깨달음이 그 말에 숨어있는 듯 하다. 혼자만으로 살수없다는 그 운명 같은 것에는 동의한다. 하지만 사람과 사람 사이 그 거리는 어느 정도여야 하는가. 이 문제는 스스로 정해야 하는 문제다. 사람과 사람 사이의 거리는, 인간의 모든 문제를 설명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핏줄이나 가족은 사람과 사람 사이의 생물학적 지근 거리를 말하고 있고, 사랑과 증오같은 다채로운 감정들은 사람과 사람사이의 심리학적인 거리를 상징하고 있으며, 마차나 기차나 자동차는 그 거리를 좁혀주는 핵심 수단이며, 디지털 속의 모든 기술들은 사람과 사람 사이의 새로운 거리에 대한 제안들이며, 이웃이나 인접국가 간에도 거리의 감정이 발생한다. 부부간에도 서로의 거리를 어떻게 관리 하느냐의 문제가 평생의 과제다. 종교는 신과 인간의 거리, 삶과 죽음의 거리에 대한 믿음체계라고 할 수 있다.
이번 코로나 사태로 깨닫게 된 것 중에, 세상의 모든 유통들, 모든 집단행동들, 쇼핑 들, 모든 사회 행위들, 모든 즐거움들, 모든 모임들, 모든 놀이들이 모두 사람과 사람의 거리가 좁아지면서 생기는 현상이라는 점도 있다. 이 무자비한 전염병은 그 거리를 불심검문하면서 사람과 사람 사이의 경로에 바이러스를 개입시켜놓았다. 아직도 이 바이러스를 박멸하고 퇴치할 방법을 찾자못한 인간들이 할 수 있는 최선의 방책은 격리다. 사람과 사람 사이를 뗴어놓는 것이다. 이 단순해 보이는 조치는, 처음에는 쉬워보였지만 갈수록 인간들의 생활전반을 위축시키고 마비시키며 비 정상적인 상태로 몰아넣었다. 이 세상은 사람을 통하지 않고서 할 수 있는게 거의 없다. 결국 이상태가 오래도록 지속되면, 이간은 저마다 자신을 격리한채 무기력하게 견디며 방콕(방에 콕 쳐박혀 있는 상황)생활 속에 이 전염병이 사라지기만을 기다릴 수밖에 없을지도 모른다.
인간과 인간 사이에 지나치게 가깝거나 먼것을 경계하고 알맞은 거리를 유지하는 것은 사회생활의 지혜처럼 여겨져 왔다. 담담한 관계를 강조하는 것 또한 서로 잊히지 않고 견딜 수 있을 만큼의 거리를 유지하는 노하우를 칭찬하는 말이다. 이게 얼마나 어려운 일인가. 좋으면 자꾸 가까워지고 싶고, 싫으면 하염없이 멀어지고 싶은 심정을 절제해야 하니 말이다.
코로나바이러스 전염병의 와중에 사회적 거리두기(Social distancing)이란 기묘한 표현이 우리들의 일상에 등장했고, 사람들이 모이는 일체의 사회생활을 자제하는 행위를 그렇게 표현했다. 거리를 둔다는 것은, 전염병 감염의 위험으로부터 벗어날 만큼의 거리를 만들어 방역한다는 뜻이다. 마켓이나 상점, 약국, 주유소등의 공공장소, 사람들이 모이는 곳에는 어김없이 2m간격으로 줄이 그어져 있고 사람간의 거리를 최소한도로 유지시켜놓고 있다. 코로나 비상사태에 자택 대피령이 발령되다보니 아무곳에도 못나가고 집안에 머물러 있어야 한다. 교회도 문을 닫고, 친구나 지인, 친척, 자식들조차 만나거나 방문하는 것을 자제해야 한다. 지난 5월10일은 어머니날이었다. 이날 어머니에게 자식들이 드리는 가장 큰 선물은, 값비싼 물건이나 선물,꽃 등이 아니라 어머니 집을 방문하지 않는 것이 최상의 선물이고 효도행위였다. 코로나바이러스19이 이렇게 부모 자식 간을 사회적 거리두기로 갈라놓은 것이다. 이렇게 세상이 온통 모두가 숨을 죽이고 납작 엎드린 채 쏟아지는 소낙비는 일단 피하고 보자는 심정이다.
최근에 회자되는 ‘사회적 거리두기’는 예전에는 누구도 예상 못 했던 본질적인 자기 객관화를 가능케 하고 있는지 모른다. 사람들이 저마다 각자 고립되어야 하는 상황속에서 모든 관계들에 대해 돌아보게 되는 기회가 생겨났다. 또한 모든 삶의 행위들과 그로 인해서 빚어지는 감정들의 정체가 ‘거리를 좁히는 일’에 불과한 것이었음을 깨닫게 된다. 인간의 친밀과 애정, 인간의 증오와 혐오와 설움 같은 것들 또한 사람사이에 생겨난 ‘거리’들이 만들어 내는 감정의 너울이었음을 알게 된다. 학습도 거리이고, 존중도 거리이고, 신앙도 거리이고, 생각도 거리이고, 우리의 일거수 일투족이 모두 모언가를 향한, 혹은 무언가에서 벗어나는 거리를 만드는 행동들에 불과했다는 것도 자각하게 된다. 이런 상황을 ‘사회적 거리두기’라고 표현하는 건 적절할까. 우선 이 행위는 전염병의 공포에서 생겨난 것으로 자발적인 ‘거리두기’가 아니다. 사회적 거리를 둔 것도 아니고, 생물학적 거리를 둔 것이다. 즉 대면 기피 증 정도가 그나마 상황을 드러내는 말인 것 같다. 여하튼 어쨋거나 어서 하루속히 이 무서운 코로나19가 박멸되어 서로가 거리감 없이 편안하게 오고 가고 악수하고 반가워서 포옹도 할 수 있는 평화롭고 자유스러운 그런 날이 회복되기만을 학수고대 하며 하나님께 간절한 마음으로 기도를 드릴 뿐이다.
<칼럼니스트 / 탬파거주> myongyul@gmail.com <121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