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명열칼럼> 어둠속 터널을 지나는 정지된 삶

 

브라질 상 파울로에 사시는 한인동포 애독자 이 선생님께서 지난 5월1일 이메일로 보내주신 그곳 소식이다.

인구수 2억이 넘는 이 나라는 정치인들이 코로나바이러스 같은 전염병 괴질에 대한 대처는 전혀 하지않고 자기들의 주머니만 챙기고 있다고 한다. 미국이나 다른 나라들의 사례를 보고 본받아서 사회격리를 2개월 동안이나 실시하고 있는데, 그로 인해 모든 상점이나 업소, 식당들은 문을 닫으라고 해놓고 정부로서는 아무런 보호대책이나 구제방안조차 없이 무조건 너희들

각자가 알아서 먹고살라며 방관적인 행정의 난맥상을 보여주고 있다고 한다. 주지사는 자기의 관할이니 대통령(정부)에게 돈을 지원해달라고 사정을 하는데 대통령은 뒷짐지고 앉았고, 실업률은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나 국민들은 굶어죽는다고 난리 법석을 친다고 한다. 이렇게 지금 세계 각처에서는 코로나 사태로 인해 몸살을 앓고 있고 국민들의 생활은 도탄에 빠져 위기에 직면하고 있다.

언제부터인가 즐겁고 행복한 이야기들이 우리들곁에서 사라졌다. 어릴때 주변에는 꿈과 모험에 관한 이야기가 적지 않았다.

그러나 어른이 된 어느 시점에 문득 그러한 복되고 즐거운 이야기들이 곁에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대신 암울한 이야기들이 그 자리에 들어섰다. 세월이 흐르고 시대가 변하여 사회의 변천과정 역시 바뀌고 문명역시 진화되고 발달되다보니 거기에 부수적으로 수반되는 문제점이나 장애물 역시 많아졌으며 사회적 구도마저 극심한 경쟁사회로 바뀌어버렸다. 살다보니 시대가 그렇게 만들었고 세상마저 옛날의 세상이 아닌 새 세상으로 변해버렸다. 유토피아라는 말은 다들 아시다시피 ‘더없이 좋은 세상’을 의미한다. 좋은 세상이지만 지금 여기에는 없고, 언젠가는 있을 수 도 있으나 장담할 수는 없다. 뭐 이런 뜻이다.

무엇을 쳐다보고 있는지도 모르면서 쳐다보고 있는 사람처럼, 그리고 어디에 서 있는지도 모르고 서있는 사람처럼 사는 사람이 있다. 자기를 잃어버리고 사는 삶에는 안정과 평화가 존재할 수 없다. 왜냐하면 삶의 목적이 분명하지 않은 사람은 사는 것이 무엇인지를 모르기 때문이다. ‘너 자신을 알라’는 소크라테스의 말은 잃어버린 자신을 알라는 것이다. 사람이 살아가는 길은 아무도 대신 갈수는 없는 길이다. 사람이 사는 것은 누가 이래라 저래라 해서 사는 것이 아니고 어느 누가 인생을 책임져 줄 수 있는 것도 아니며 자신이 생각하고 결정한 행동에 대해서 책임을 져야 하는 길이다. 그런데 무엇을 위해서 사는지 목적이없이 산다면 자기를

잃어버리고 방황하는 삶을 살아가게 된다. 돈을 벌기위해 일에 파묻혀 자신이 해야 할 역할을 하려고 몸부림쳐도 뜻대로 되지 않을때 스트레스로 인한 불만으로 남을 밟고 올라서는 짓을 서슴없이 하고 인정을 받는 존재가 되려는 안간힘으로 물질만능주의자로 변질되어 위선의 탈을 쓰고 산다면 자기를 잃어버리고 사는 사람이 될 수 있다.

사람이 무엇을 위해 살아야 하는가를 고민하는 것은 공상이 아니라 삶의 의미와 목적에 대한 갈증이다. 삶의 목적과 가치관이 있는 사람은 능동적이고 진취적으로 살아갈 수 있으나 목적이 없으면 공허함 때문에 이유 없는 짜증으로 살아가게 된다. 사람이 살아가는 여정에서 겪는 아픈 순간들은 인생의 결실을 맺는 텃밭이다. 그러므로 삶에서 중요한 것은 무엇을 위해서 사는가에 대한 신념이다.

신념은 인생의 진로를 스스로 헤쳐갈 수 있는 힘이 되는 것이고 욕구충족을 자제하는 역할을 한다. 그러나 삶에 대한 신념 없이 본능적인 욕구를 채우기 위해서 산다면 자기를 잃어버린 삶을 살아가게 되는 것이다. 왜냐하면 인간이 태어나기 전에는 몸도 생각도 없었지만 삶의 여정에서 존재의 의미와 목적이 없이 방황속에 사는 것은 자기를 잃어버린 삶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두 번 다시 살수 없는 인생의 의미와 목적을 깊이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왜냐하면 인간은 존재의 의미와 목적을 실현할 책임이 있는 이성적인 존재이기 때문이다. 자신을 돌아보는 명상을 통해서 진면모를 찾고 삶의 목적과 가치에 대한 신념으로 산다면 어떤 상황에서도 후회스럽지 않게 살아갈 수 있고 자기를 잃어버린 삶에서 벗어날 수 있다.

사람들의 삶을 멀리서 보면 대략 비슷비슷해 보이지만 개인적으로 한사람 한사람을 분리해 자세히 들여다보면 우주만큼 복잡하고 다양한 사연과 이유를 갖고 살아간다. 수많은 인생들은 과연 자신의 삶에 스스로 얼마나 만족하며 살아갈까? 대부분 각양각색의 모양으로 불평불만에 젖어 막연히 저 멀리 어딘가 감추어진 행복을 추구하며 사는 것이 아닐까?………………

근래 세계적으로 누구나 할 것 없이 예기치 못하게 덮친 코로나19로 인해 일상이 붕괴되고 삶이 위협받는 상황에 대한 불안감이 클것이다. 불안감속에 자가 격리나 스스로 절제하며 대면 접촉을 기피하는 현재의 상황에서 ‘사람에 대한 그리움’이 깊어진다. 집단에서 받던 스트레스가 이제는 일상에 대한 절실한 욕구로 옮겨진 사람들이 너무나 많다. 나의 이웃 젊은 친구의 이야기다. 그는 처음 며칠간은 출근하지 않아도 되는 해방감에 마치 휴가를 얻은 것처럼 좋아했지만 이제는 사태가 장기화되고 격리의 시간이 길어질수록 익숙했던 과거를 갈망하며 옛날의 삶을 그리워한다. 아침이 밝으면 출근하고, 저녁의 어둠이 깃들면 퇴근길에 동료들과 술자리를 갖거나 가족과 저녁식사를 하는, 다람쥐 쳇바퀴 도는 그 일상이 지고한 만족감을 주는 시간이기 때문만은 아니다. 손에 붙잡을 수 없는 금지된 일상이기에 어쩌면 욕구가 더 강렬해지고 있을지도 모른다. 이보다 더 큰 위기를 겪으며 사는 사람들도 많을텐데, 요즘처럼 행동의 제약과 환경의 구속을 받으며 살고 있는 현실쯤은 우리 모두 기꺼이 받아들여야 한다고 다짐하며 자위해 본다.

인간 삶의 과정 여정속에 수시로 예고없이 찾아오고 부딪치게 되는 고통과 역경은 ‘당연하게 받아들이는 삶’을 반성하게 해준다. 이러한 때는 ‘평범함’에 대한 감사를 회복하는 시간이기도 하다. 일에 대한 감사, 내 곁에 가까이 있는 가족이나 남편 부인에 대한 감사, 이웃이나 친지, 친척, 친구들에 대한 감사, 그리고 더불어 함께 살아야 행복할 수 있다는 반성, 집안 구석구석 나의 손길이 필요함을 깨달을 수 있는 시간이 지금의 시간이다. 시간을 할애하여 틈나는 대로 집안의 이곳저곳을 정리 정돈하고 쓸데없는 물건들은 버리던가 남들에게 주자. 그리고 시간이 없어서 하지 못했던 일들을 기억을 떠올려 추진해보고 누려보는 일, 때로는 멍하니 멈춰서서 아무것도 하지 않으며 자신을 되돌아보는 것, 비 오는 호젓한 산책길을 걸으며 이름 모를 야생화를 관찰해 보는 작은 실천이 심신이 지칠대로 지치고 삶이 정지된 듯한, 요즘 울타리에 갇혀있는것 같은 구속받는 현실에 또다른 행복을 발견하게 해줄 것이다.

‘이 또한 지나가리라’ 옛 왕의 반지에 새겨진 문구처럼, 지금 힘들고 고통스러운 시간은 언젠가 좋은 기억으로 그리움이 될지도 모를 일이다. 그러므로 지금 무리하고 덧없이 보낼지 모르는 이 시간과 현실들을 인내와 숙고의 시간을 발판삼아 다가올 미래를 위해 나 자신을 충전시키고 사사로운 일상에서도 행복을 창조하고 되찾는 일, 그것이 지금 우리 모두들 각자가 해야 할 일이 아닐까 생각이 든다. 행복은 강도가 아니라 빈도이기 때문이다.

이 세상 곳곳 어느 나라이건 간에 상상도 못하던 위기가 닥쳤다. 금년초만 해도 먼나라 일 같던 신종코로나 감염사태가 점령군처럼 밀어닥쳐 우리들의 일상을 무자비하게 파괴하고 있다. 사상 초유의 비상사태 앞에서 평정심을 잃지 말고 단합되고 협조하는 마음으로 이 위기를 헤쳐 나가는 지혜가 필요하다. 코로나19가 장기적인 지속성을 띠고 불확실성의 고통속으로 우리를 몰아넣고 있다. 삼중의 고통이다.

첫째는 감염으로 인해 생명을 위협받을지도 모른다는 불안의 고통이다. 둘째는 경제활동의 올 스톱으로 앞으로 어떻게 생계를 이어갈지 모를 재정적 고통이며, 그리고 셋째는 사회적 거리두기로 깊어지는 고립과 단절의 고통이다. 직격탄을 맞은 것은 영세 자영업주들과 저임금 직원과 노동자들이다. 그들은 사실상의 실직으로 당장 생계가 막막하다. 정부에서는 여러가지 구제책을 내놓고, 실직자나 자영업자들을 지원해주는 구원금이나 보호책이 실시되고 있지만, 그나마 여기에 해당되지 않거나 신청 자격이 미달되는 다수의 피해자들은 그림의 떡으로 오히려 불행지수만 높여주고 있다. 상황이 어려운 때일수록 가족 친지들의 위로와 도움이 힘이 되는데 감염 위험 때문에 함께 하기도 어려운 실정이다. 특히 염려되는 것은 혼자 사는 노인들이다. 세상이 단절된 듯한 상황에서 이들 노인들의 고립감은 우울증으로 발전하여 건강을 위협할 수가 있다. 모든 위기는 어떻게 받아들이느냐에 따라 결과가 달라진다. 절망감에 짓눌릴 수도 있고, 상황을 직시하며 하나하나 대처해 나갈 수도 있다. 긍정적인 마음의 자세로 침착하고 현명하게 대처하며 희망을 갖고 사는 것이 필수이다.

이제 여기에 더불어서 중요한 것은 사회적인 연대감이다. 현재도 진행형인 사회적 거리두기가 정서적인 단절로 이어져서는 안된다. 물리적 거리두기에도 불구하고 정서적 교감을 나눌 수 있다. 전화로, 카톡으로, SNS로 안부를 전하고 챙기며 위로를 나누자. 어렵고 힘든 시기를 우리 모두가 함께 극복한다는 자세가 필요하다.

<칼럼니스트 / 탬파거주> myongyul@gmail.com <12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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