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명열기자의 이스라엘, 요르단 성지순례 기행문17

요단강(Jordan River) 세례터와 마사다(Masada)요새

요단강은 팔레스타인 지방에서 가장 길고 중요한 강이다. 요단강은 골란고원 북쪽 해발2814m의 헬몬산에서 눈이 녹은 물을 근원으로 발원하여 훌라 계곡을 따라 흘러 갈릴리호수로 합류하고, 다시 요단 계곡으로 이어져 지구상에서 가장 낮은 해저 398m인 사해로 강물이 흘러들어가고 있다. 갈릴리호수에서 사해까지는 약 110Km가 된다. ‘급한 여울’ 또는 ‘아래로 흐르는 여울’이라는 히브리어의 말뜻을 가진 요단강은 팔레스타인 지방에서 유일하게 큰 강이며 북의 레바논과 핼몬산의 물들이 모여 팔레스타인을 종단하여 사해로 흘러 들어가고 있다. 특히 우기가 되면 이스라엘 중앙 고지대의 골짜기와 와디에서 흘러들어오는 물과 트란스 요르단의 얍복강에서 흘러 들어오는 물이 상류의 물과 합류하여 요단강을 이룬다.

오늘날에는 갈릴리 호수의 물을 저장하여 이스라엘 전역에 공급하기 때문에 갈릴리호수의 수문을 열지 않으면 요단강 물은 흐르지 않고 말라 있을 때가 많다고 한다. 그러나 고대 요단강은 강폭이 넓고 우기에 자주 범람하였던 것으로 기록되어있다. 성경에 보면 여러곳에서 이 같은 언급을 하고 있다. 아브라함이 조카 롯과 헤어질때 요단 뜰을 택한 사건(창 13:10) 이 있는 곳이며, 출애굽한 이스라엘 민족을 이끌고 요단강을 건널때 “요단이 모맥 거두는 시기에는 항상 언덕에 넘치더라(수 3:15)” 라는 기록이 있다.

또한 여호수아 3:17절에는 “여호와의 언약궤를 멘 제사장들은 요단가운데 마른땅에 굳게 섰고 온 이스라엘 백성은 마른땅으로 행하여 요단을 건너니라”는 기록으로 보아 모세가 홍해를 건넌 기적과 같은 일이 여호수와 때도 있었던 것 같다. 여리고 지역 요단강에서도 엘리야와 엘리사에 의하여 강물이 갈라지는 기적이 있었다. 열왕기 하 2:8절에 보면 “엘리야가 겉옷을 취하여 말아 물을 치매 물이 이리저리 갈라지고 두사람(엘리야와 엘리사)이 육지 위로 건너더라”는 기록이 있으며 열왕기 하 2:13~14절에는 “엘리야의 몸에서 떨어진 겉옷을 주워가지고 돌아와서 요단언덕에 서서… 그 겉옷을 가지고 물을 치며 가로되 엘리야의 하나님 여호와는 어디에 계시니이까 하고 저도 물을 치매 물이 이리 저리 갈라지고 엘리사가 건너니라”고 적혀있고, 아람왕의 군대장관 나아만이 하나님의 사람 엘리사의 말씀대로 요단강에 일곱번 몸을 잠그니 그 살이 여전하여 어린아이의 살같아서 깨끗하게 되었다(왕하 5:14)고 기록된 요단강은 벧산에 가까운 요단강이다.

이러한 역사적 사실과 숨결이 묻혀있는 요단강 세례터를 우리 순례객 일행들은 흥분에 들뜬 마음으로 그곳을 방문했다. 예수님께서 세례 요한에게 물로 세례를 받으신 요단강 지역은 여리고 남쪽, 팔레스타인 자치지구의 요르단과의 국경지대에 위치하고 있기 때문에 이스라엘에서 쉽게 갈 수 있는 곳이 아니다. 그곳을 방문하기 전에 이스라엘 병사들이 지키는 검문소를 거쳐야 비로써 그곳의 세례터를 방문할 수 가 있다. 그래서 예수님처럼 직접 요단강에서 침례를 하고 싶어하는 순례자들을 위해 이곳은 상설 세례터가 만들어져 있다. 까스르 엘 야후드로 알려진 요단강 예수님 세례터는 성지를 방문하는 기독교 순례자들에게 성묘교회와 예수탄생교회와 더불어 세번째로 중요한 장소이다. 예루살렘에서 여리고로 가는 길목에 위치한 이 장소의 중요성 때문에 수세기동안 많은 교회가 지어졌다. 이스라엘 관광부는 순례자들이 세례를 받기위해 요단강에 들어갈 때 쉽고 편안하게 물속에 들어갈 수 있도록 나무 경사로를 설치하고, 기도시간을 위해 그늘진 장소를 마련하고, 욕실, 샤워시설, 주차장을 개조하는 등 이 명소를 개선하고 보수하여 순례객들에게 편리를 제공해주고 있다.

마사다(Masada)=천연 요새, 이스라엘의 최대 격전지

요단강 세례터를 둘러보고 난후 우리들 일행은 이스라엘의 최대 격전지이며 세계적으로도 너무나 유명하고 영화로도 제작되어 상영되었던 마사다로 향했다. 이스라엘 동부의 고대 유적지 마사다는 히브리어로 ‘요새’라는 뜻이며 사해 서쪽 연안 유대사막 동쪽에 우뚝 솟은 거대한 바위절벽에 자리 잡은 고대의 왕궁이자 요새를 말한다. 주위의 유대광야 산들과는 고립된 400여미터의 이 천혜의 절벽 요새는 길이 660m, 폭 250m인 마름모꼴의 평평한 고원을 이루고 있다. 사방이 가파른 절벽으로 되어있어 쉽게 정복할 수 없는 난공불락의 요새이다.

이 요새는 BC37~BC31년 사이 7년여에 걸쳐 헤롯왕이 축조했다. 그는 자신의 악정(나쁜 정치와 집정)으로 인해 반란이 일어날 것에 대비하여 거대한 피난요새 궁전을 지었던 것이다. 수천명이 몇년간 충분히 먹을 수 있을 정도 분량의 식량을 쌓을 수 있는 식량창고도 만들었다. 이 요새는 헤롯왕이 죽은뒤 로마군이 주둔하고 있었으나, 제1차 유대전쟁(Jewish War)때 유대인이 점령하여 최후의 보루로 지키다가 73년 로마군의 총공격을 앞두고 960명 전원이 집단 자살함으로 ‘유대전쟁’ 최후의 비극적인 격전지가 되었다. 이러한 사실은 서기 1세기의 유대인 역사가 요세프스(Josephus)가 쓴 ‘유대 전쟁사’를 통하여 살아남은 한 사람의 여인이 전한 말로 마사다의 생생한 순간이 전해졌다. 서기 66년부터 시작된 유대인의 로마에 대한 반란이 로마의 월등한 군사력으로 서기 70년 예루살렘의 함락과 더불어 성전의 파괴로 끝을 맺게 되자 이에 굴복하지 않은 960명의 ‘열심당원’이라 불리는 극우파 민족주의자들은 이미 66년에 당시 소수의 로마 군인들이 지키고 있던 마사다를 점령하여 저장된 물과 식량, 무기를 이용하여 로마에 대항하였다.

예루살렘을 이미 점령하여 유대인 반란의 진압을 이미 달성한 로마의 총 사령관 티투스는 장차 아라비아 광야 지역으로의 진출을 예상한 광야 전투의 훈련을 목적으로 플리비아스 실바 장군으로 하여금 10군단을 이끌고 이곳에 대한 대규모의 포위작전을 실시하게 되었다.

로마군은 2년에 걸쳐 여러차례 요새를 공격하였으나 성벽은 무너지지 않았고, 이에 로마군은 요새 꼭대기의 견고한 성벽을 파괴시키기 위하여 서쪽의 고원과 같은 높이의 거대한 성채를 쌓아올려 공성퇴(Beteening Ram)를 끌고 올라갈 수 있도록 6개월에 걸쳐서 거대한 경사로를 축조하였다. 요새프스는 그가 기록한 다른 전투와는 달리 이 전투에서 유대 저항군의 반격을 기록하지 않았는데 이는 당시 마사다의 저항군이 로마군에 대항할 전력이 없었기 때문으로 보고 있다. 하지만, 다른 역사학자들은 로마군이 성채를 쌓을 때 같은 열심당인 유대인 노예를 이용했기 때문에 민족주의 성향이 다분한 열심당원이 차마 동족을 죽일 수 없었다고 보고 있다. 유대인들의 격렬한 방해에도 불구하고 공성퇴가 성벽을 무너뜨리게 되었고 다음날 아침이면 로마군이 성벽이 파괴된 곳으로 진격해 올 바로 그 전날밤 유대인들의 지도자 엘리에제르 빈 야이르는 모두를 모아놓고 다음과 같은 요지의 연설을 하였다. “내일아침 로마군에 잡혀서 온갖 수모를 겪느니 차라리 오늘밤에 우리가 스스로 자유스럽게 영광의 죽음을 선택합시다” 이 말에 감동한 각 가정의 가장들이 사랑하는 아내와 자식들을 칼로 찔러 죽인다음 남자들이 한자리에 모여 열명을 추첨하여 그 열명이 나머지 남자들을 죽였고, 남은 열명이 한명을 추첨하여 아홉명을 죽인 후 그도 최후로 자결하였다. 3년 동안의 한 맺힌 포위작전에 대한 영광의 댓가를 바랬던 로마군인들은 960구의 시체 앞에 망연자실했다.

이 비극의 전설은 오늘날까지 승화되어 마사다는 현재 이스라엘군 젊은 장병들의 선서식장으로 활용되고, 이곳에서 그들은 ‘마사다는 두 번 다시 함락되지 않는다’라며 Never Again을 외치면서 1948년에 독립한 이스라엘이 다시는 외적에 의해 정복당할 수 없다는 비장의 각오를 새롭게 하고 있다.

그래서 그런지 그날 우리일행들이 케이블카를 타고 정상에 오를때 여러명의 이스라엘 군인들이 완전군장으로 땀을 비 오듯 흘리면서 가파른 산 정상을 향해 힘겹게 오르고 있는 모습을 볼수 있었다. 그중에는 여군도 있었는데, 가녀려 보이는 앳띤 여군의 모습이 안스럽고 힘겨워 보였다. 이러한 극기 훈련을 통하여 그들은 두번다시 나라를 남의 나라에 뺏기지 않겠다는 비장어린 각오가 그들의 훈련 모습에서 돋보여보였다.

이 요새는 1963~1965년에 실시된 발굴조사로 요새의 3분의2가 발굴되었다. 서쪽의 궁전과 북쪽의 험한 벼랑을 깎아서 세운 낭떠러지의 3단 테라스식 현애궁전 및 1천여명 이상의 저항군이 이용할 수 있는 부피 4천3제곱의 커다란 물 저장고와 거대한 곡물창고, 로마식 큰 목욕실 등이 확실하게 드러났다. 산기슭 주위에 로마군이 쌓은 네모진 진지의 흔적이 있으며 파피루스 문서도 발굴되었다.

현재 유네스코가 지정한 세계문화유산 중에 하나며 유명한 관광지가 되었다. 이 역사의 현장을 방문하기 위해서는 3~4Km의 구불구불한 급한 경사로를 따라 올라가는 길과 케이블카를 타고 올라가는 방법이 있다. 올라가기전 마사다와 관련된 영화를 10분정도 관람하고 올라가는데, 우리 일행들이 방문한 그날은 관광객들이 너무나 많이 찾아와서 우리의 차례가 오려면 1시간정도를 기다려야 하기 때문에 우리는 그 영화 관람을 시간이 없어서 포기하고 곧바로 케이블카를 타고 산 정상으로 향했다. 케이블카를 타고 정상에 올라가는 도중 가파른 산 비탈 등성이를 보니 저 아래 까마득하게 급한 경사로를 타고 걸어서 올라오는 일부 사람들과 완전군장을 하고 힘겹게 산을 타고 올라오는 이스라엘 군인들의 모습이 아스라이 멀리서 시야에 들어왔다. 그들의 모습을 보는 순간 나의 생각으로는 저 사람들이 진정한 순례객들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이 마사다 요새를 둘러보면서 순례객들은 당시 유대인들의 결연한 의지에 크게 감동을 받기도 하지만, 신앙적으로 볼때 다윗을 쉽게 떠 올리게 된다. 모든 고백이 체험의 소산이라 한다면 다윗은 적어도 이런 산성과 요새를 직접 오르며 산성과 요새의 견고함을 직접 느꼈을 것으로 추측해 본다. 그는 즐겨 ‘주는 나의 산성이시니이다(시편 18:2, 31:4)’, ‘주는 나의 요새시요 산성이시요(시 144:2)’라고 여러 차례 고백했기에 말이다.

난공불락의 요새 이런 요새야말로 우리 하나님을 견줄만하지 않겠는가?

“아무것도 두려워 말라. 주 나의 하나님 지켜주시네. 놀라지 마라 겁내지 마라. 주님 나를 지켜주시네. 네 맘이 힘에 겨워 지칠지라도 주님 나를 지켜주시네. 세상에 험한 풍파 몰아칠 때도 주님 나를 지켜주시네.” “주님은 나의 산성이시며 나의 요새이시니이다. 주님은 나의 소망 나의 힘이 되신 여호와이시니이다.” 아멘.

<칼럼니스트 / 탬파거주> myongyul@gmail.com <12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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