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명열기자의 이스라엘, 요르단 성지순례 기행문15
예루살렘 일대 기독교 유적지 순례
나는 이번에 예수님 생애때 행하셨던 수많은 이적과 구원사역의 발자취를 더듬어보면서 참으로 많은 은혜와 감명을 받았다.
특히 거룩한 땅으로 일컬어지는 이스라엘, 그리고 중요 사적지인 예루살렘 지역을 순례하면서 보고 느낀바가 너무나 많다. 예수님께서 주로 활동하시고 사역을 하셨던 그 중심지가 바로 예루살렘이었기에 더욱 그 의미와 감동은 클 수밖에 없다.
그리스도교의 대표적인 성지로는 예수님이 탄생하시어 생활하시다 십자가형을 받고 부활하신 땅, 즉 예루살렘을 포함한 팔레스티나 지역을 꼽을 수 있다. 성경속 주요 사건들의 배경이 되는 곳은 물론 성모 발현지와 순교지, 이름난 제자와 병자들이 사랑과 혜택과 은혜를 입은 곳, 이러한 예수님의 숨결이 머물러 있는 곳, 그러한 곳들을 나는 지금 둘러보고 있는 중이다.
성지순례란 즉 하나님과 예수님을 만나기 위해 나선 여정이다. 그리고 이 여정은 하나님의 사랑을 일상 한 가운데로 끌어당겨 실천하는 모습으로 이어질 때 그 의미가 극대화 된다. 오늘도 우리들 순례객 일행들은 열심히 또 열심히 그 사역지와 역사적 숨결이 담겨있는 유적지 곳곳을 순례하며 둘러보고 있다. 오늘 우리가 순례중 방문한곳은 너무나 유명한 ‘통곡의 벽’이다.
통곡의 벽(Wailing Wall)
유대인들의 순례장소이자 성스러운 기도처
예루살렘 구 시가지 옛 성전 서쪽 옹벽의 일부를 가리키는 이 벽은 유대인들이 거룩하게 여기는 기도 및 순레의 장소가 되었다.
이 벽은 BC 2세기에 헤롯왕(BC 37~4)이 솔로몬이 건축한 예루살렘 성전터를 증 개축할 때 쌓은 서쪽 옹벽의 일부인데, 주후 70년 로마 티투스 장군에 의해 성전과 성벽이 파괴될 때 후세 사람들에게 로마제국의 위대함을 보여주기 위해 서쪽벽의 일부를 남겨놓은 것이다. 오늘날 남아있는 벽의 지상부분은 길이 약 50m, 높이 약 20m, 모두 43단으로 되어있다. 그중 상부 17단은 후대에 쌓았으나 하부의 26단은 헤롯왕 시대 특유의 테두리가 있는 길이 4~5m, 높이 1m의 규모로 다듬은 돌로 쌓았다. 현재 벽의 하부 15단은 아직 지하에 매몰된 채로 있다. AD 70년 로마 사람들에 의해 파괴된 예루살렘 제2 성전가운데 현존하는 유일한 유적지이다. 이 유적지의 신빙성은 전승이나 역사, 고고학 등으로 증명되었다. 로마의 학정에 반발하여 반란을 일으켰으나 반란(132~135)은 실패하여 비극으로 끝난 뒤, 유대인이 예루살렘으로 들어가는 것이 금지되었다. 4C 비잔틴 시대에 들어와서야 그들은 1년에 한번 신전이 파괴된 날로 전하는 아브월(Ab월:유대력 5월) 9일에 허물어진 신전을 찾아가 나라의 멸망과 그로인해 민족이 세계 각처로 유리하게 된것을 슬퍼하며 통곡하며 울었다고 한다. 이런 관습은 수세기동안 계속되었지만, 이 성전 터에 이슬람 성소가 건설되고 이 지역이 요르단 령에 속하게 되면서 유대인들의 통곡의 장소는 서쪽 벽으로 옮겨져 오늘에 이르렀다. 이로 인해 이 벽은 세인들에게 (통곡의 벽)으로 알려져 왔다.
오늘날 이 벽은 이슬람의 바위사원(Dome of the Rock)과 ‘엘 악사 모스크’를 둘러싸는 더욱 큰 벽의 일부를 이루고 있기 때문에, 유대인들과 요르단으로 분할하면서 이 성벽은 요르단측에 속하였으나, 1967년 제3차 중동전쟁에서 요르단 서안을 점령하고 이스라엘이 구 시가지를 수복하면서 이 통곡의 벽은 유대인의 수중에 들어온 것이다. 당시 이곳을 점령한 이스라엘 공수단 부대는 통곡의벽 앞에서 서로 얼싸안고 감격의 눈물을 흘렸다고 한다. 그러나 유대인들은 아직도 성전산에 들어갈 수 없는 처지를 생각하며, 성정의 완전한 회복이 이루어지는 날까지 기도하기 위하여 이 통곡의 벽을 찾아올 것이다. 아브라함이 독자 이삭을 바쳤고(창 22:2) 하나님께서 다윗에게 나타나셨던 곳(대상 21:15~22:1)으로 믿고 있기 때문이다. 더구나 638년 아랍이 예루살렘을 정복한 뒤 유대인들이 정복자의 노예로 전락하여 거룩한 바위터와 성전 뜰에서 잔해를 치우는 노역에 강제 동원되었던 아픈 상처가 치욕으로 남아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곳은 빼앗으려는 자와 빼앗기지 않으려는 자의 날카로운 시선이 교차되는 곳이기도 하다.
지금 통곡의 벽은 북쪽은 남자들이, 남쪽은 여자들이 구별하여 기도를 드린다. 이곳에서는 전통파 유대인들이 검은 옷에 검은 모자를 쓰고, 일반인들은 ‘키파’라고 하는 조그만 모자로 머리를 가린다. 그리고 이마에는 텔빌림이라는 구약 성구를 적은 양피지를 넣은 상자를 동여매고 벽에 이마를 대고 기도하거나 입을 맞추기도 한다. 순례자들도 이 통곡의 벽에 와서 성벽 틈에 자신들의 기원이나 기도문을 꽂아놓고 기도를 드리기도 한다. 이곳은 매일 24시간 개방되지만 매주 금요일 오후에 시작되는 안식일 이후에는 유대인들이 가장 많이 모여드는 시간이라 이때만은 사진촬영이 금지된다. 통곡의 벽 앞 광장에서는 국경일 행사, 군인들의 선서식, 그리고 기타 중요한 행사가 행해진다고 한다.
베들레헴, 예수탄생 교회와 목자들의 들판 교회
베들레헴은 예루살렘 남쪽 약 10Km에 있는 도시로, 인구는 약 3만명 정도가 살고 있고, 해발 고도 777m의 구릉지대이다. 동굴이 벌집처럼 많은 석회암 언덕의 비탈에 위치한 도시이다. 베들레헴은 ‘집’란 뜻의 벧트(Beit)와 빵이란 뜻의 레헴(Lehem)이 합해져 ‘빵집’이란 뜻을 갖고 있다. 아랍어로는 ‘푸줏간’을 뜻하는 말로 이지방의 토지가 비옥함을 나타낸다.
베들레헴은 아주 오래전 고대 도시로 성서에서 여러번 언급되고 있다. 베들레헴 근처에서 라헬이 죽어 묻혔으며(창 35:19, 48:7) 사사기 19장에 나오는 한 레위인의 첩이 베들레헴 출신이다. 또한 룻기의 배경이 베들레헴이며 룻의 자손인 다윗이 베들레헴에서 태어나 거기서 사무엘에 의해 기름 부음을 받았다.(삼상 16:1~13), 한때 이곳은 불레셋 사람들에게 점령되기도 했는데, 다윗의 용사들 중 세명이 적진을 뚫고 이곳의 우물물을 떠서 다윗에게 고향의 물을 바쳤다고 기록되어 있다. 남북왕국이 분열된 뒤 르호보암에 의해 요새화 되기도 했다. 그러나 1000년 동안 베들레헴은 예루살렘 근교에 있는 작은 마을로 남아있었다. BC 6세기 말에는 바벨론에서 귀화한 123명의 사람들만이 이곳에 살았다. 이때 미가 선지자는 이 작은 수의 귀환에도 불구하고 큰 예언을 한다. 베들레헴은 다윗의 고향으로 메시야가 태어날 곳으로 기대되었다. 이 메시야의 탄생에 대한 마태복음과 누가복음의 이야기(마 2:1~5, 눅 2:4~15)는 신약에서 가장 중요한 부분으로 사랑을 받고 있다.
이처럼 예수님의 탄생은 인류 역사에 큰 획이 되었다. 인류구원을 위한 사랑의 이야기는 영원한 메시지가 되었다. 그것은 2천년이 지난 오늘날까지도 사람들의 양심, 생각과 믿음형성에 밑바탕이 되었다. 그런 이유로 메시지의 배경이 되는 베들레헴은 기독교인들에게 가장 잘 알려진 장소로 빼놓을 수 없는 성지중의 하나가 되고 있다. 이곳 베들레헴에는 일찍이 크리스천 공동체가 있었음이 확실시 되고 있다.
첫번째 교황중 한사람인 에바리스 투수는 베들레헴 출신으로 기독교도 어머니와 유대인 아버지 사이에서 태어났다. 표면적으로 베들레헴은 작고 보잘것없는 도시로 계속 남아있었다. 이곳은 한동안 로마 군인들에 의해 황폐되었고, 모든 유대인 거주자들은 도시 밖으로 추방되었다. 4세기 로마 황제 콘스탄티누스가 전통적으로 예수님의 탄생지라고 알려진 장소에 탄생 기념교회를 창건했으나, 529년 사마리아 사람들의 반란으로 파괴되어 동 로마 유스티니아우스 황제 (재위 527~565)의 명령으로 재건되었다. 그 후로 기독교 순례지중 가장 잘알려진 곳이 되자, 이때부터 많은 기독교인들이 이곳에 거주하기 시작했다.
1949년 제1차 중동전쟁뒤 요르단에 속했으나 1967년 제3차 중동전쟁 (6일전쟁) 이후에는 이스라엘이 점령하였다. 베들레헴은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 간의 1933년 오슬로 평화협정 후 1995년 12월 팔레스타인 자치지역이 되어 현재는 이스라엘 통치권과는 상관없이 팔레스타인 자치정부의 영향아래 있다. 주민들 대부분이 팔레스타인으로서 모슬렘(약80%), 기독교(대부분이 구교 계통 20%)로 구성되어 있다.
혹시 생길지 모르는 불상사를 대비하기 위해서 높이 8m의 담을 둘러쳤다. 따라서 예루살렘에서 베들레헴으로 들어가려면 2개의 체크 포인트(예루살렘쪽과 베들레헴쪽)에서 검문을 받아야 한다.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 간의 대립의 현장이 언제 영원한 평화가 깃들 것 인지 안타깝기만 하다.
목자들의 들판 교회
예수그리스도 시대에 목자들이 양을 이끌고 풀을 먹이던 들판으로 베들레헴 중심가에서는 약 2Km정도 떨어진 곳에 있다. 예루살렘 방향으로 벌판이 펼쳐져있는 가운데, 20세기 중반에 건립한 목자들의 들판교회가 있다. 이탈리아 건축가 안토니오 바루치가 캐나다의 지원을 받아 건축한 개신교회로 목자들의 텐트를 본따서 지었다고 한다. 지붕은 작은 종 모양이 달린 돔형이고 교회정면 윗 부분은 3개의 아치도 장식하였다.
교회 내부는 1950년대에 그린 ‘예수의 탄생’, ‘베들레헴으로 가는 양치기들’, ‘천사의 음성을 듣는 양치기들’ 등 3점의 프레스코 벽화로 장식하였으며 4세기의 모자이크화가 보존되어 있다. 교회 뒤쪽의 계단을 내려가면 ‘목자들의 동굴’이 나오는데 이곳에는 옛 양치기들의 소박한 신앙생활을 짐작케 하는 흔적이 남아있다.
<다음호에 이어짐> 1209